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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의 만남 | 이벤트

[저자와의 만남] 주체의 전유물이 아닌 언어와 목소리-『비인칭적인 것』의 저자 '고봉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2. 6.

 

저자 : 고봉준

대담자 : 전성욱 (문학평론가)

사회 : 문호영 (편집자)

일시 : 2015130일 금요일 오후7

장소 : 서면 러닝스퀘어

 

 

안녕하세요! 인턴 2주차 솔율입니다^^하트3

지난번엔 첫 서평으로 인사를 드렸었는데요. 오늘은 130일에 우리 출판사의 주관으로 열렸던 저자와의 만남행사 리뷰를 가져왔습니다. 기대되시죠?(두근두근)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저자와의 만남행사의 주인공은 작년 12월 산지니에서 출간된 평론집 비인칭적인 것의 저자 고봉준선생님이었습니다.

 

저자 고봉준 선생님

 

고봉준 선생님(이하 ’)1970년 부산에서 출생하셨습니다. 2000년에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혁명적 담론에서 생성적 담론으로의 넘어서기 : 백무산론이 당선되어 문단에 발을 디디게 되셨구요.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시며,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에서 활동하면서 지식과 삶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계시다고 하네요.

저서로는 평론집 반대자의 윤리, 다른 목소리들, 유령들을 출간하셨고, 첫 평론집으로 12회 고석규비평문학상을 수상하셨습니다. 현재 계간 포지션, 딩아돌하, 문학선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번 행사의 중심이 된 비인칭적인 것은 선생님의 네 번째 평론집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인 도서 내용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해주시는 센스! 

고봉준,『비인칭 적인 것』, 책소개

 

 

, 본격적으로 저자와의 만남, 시작해볼까요?

우리 출판사 문호영 편집자님의 여는 말로 시작된 만남, 대담은 문학평론가이자 교수님이신 전성욱 평론가님(이하 ’)의 주도로 이루어졌는데요.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저는 매번 학교에서 뵙다 이렇게 교외에서 인사를 나누니 색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질문과 대답은 실제보다 어느 정도 요약되어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전성욱 평론가(좌) 고봉준 선생님(우)

         이번 평론집이 네 번째 평론집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의 세 평론집과 이번 평론집이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점이 있으신지.

 

         우선 제가 가지고 있는 문학에 대한 생각은 문학은 주류적인 것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반대라는 말은 비판이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틀이 있다면 그 틀을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지요. 제가 주목하는 곳은 아프거나 소외된 사람들일 수도 있고 불행한 사람들일 수도 있는데, 문학은 바로 그곳에 낚싯바늘을 들고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곳들을 갖가지 이름으로 불러왔던 것이지요. 따라서 문학은 가난하고 힘들고 아픈 사람들의 소리가 나오는 것이고, 평론은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앞의 평론집 세 권의 이야기였지요.

           네 번째 책은 앞에서 말하고자 한 것들을 약간 바꿔보려 제목을 이렇게 지었습니다. 요즘 대부분의 문학 지망생들과 지도자들이 문학은 쉽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 된다고 말을 하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앞의 말을 따라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 속에 투영하다보니, 대부분의 문학 시점이 1인칭이 되었습니다. 3인칭으로 쓰여졌다 해도 결국 자신을 투영시키지요.

              그러나 문학은 자신만의 경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작품이 모두 작가 본연의 이야기가 아닌 경우도 있지요. 작가, 나 그리고 이외의 목소리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누구의 목소릴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비인칭적이라는 것이라는 제목을 착안했습니다.

 

솔율         약간 어려우시죠? 사실 저는 이번 행사가 아주아주 즐거웠습니다. 가기 전엔 약간의 부담도 있었지만 막상 도착해서 대담을 듣고 있자니 참석하길 너무너무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더군다나 전성욱 교수님, 김남영 교수님, 거기다 학과 전 부조교 선생님까지 뵐 수 있었던 시간. 대담 내용 역시 수업시간에 들었던 내용들이 대부분이어서 정말 흥미롭게 들었습니다(모두 제가 좋아했던 수업들이었거든요). 인턴이 아닌 학생으로 돌아간 시간이었네요. 그런데 왜 제가 갑툭튀인 것이냐! 혹시나 이해하기 어려우실 독자님들을 생각해 부족한 솜씨지만 제 생각으로 풀어드리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뿅뿅!

                저 역시 창작자의 입장에 가깝습니다. 문청이니까요. 시로 시작했으나 현재는 소설을 위주로 쓰고 있는데요. 작품을 쓰면서 쉽지 않았던 적이 많았지요. 무엇보다 어떤 소재로 쓸 것인가가 가장 첫 번째 고민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민을 할 때면, 고봉준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네 이야기를 써라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지요. 아무래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에 쉽게 쓰지 않겠냐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소설은 가족을 팔아서 쓰는 거라고. 제일 만만한 게 가족이라며 가족을 씹어먹고, 고모를 팔고, 친구를 팔아서 쓰는 게 소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한 작품에는 작가 스스로가 투영되어 있길 마련인데요. 그 작품을 읽었을 때, ‘공감이라는 통로를 통해 주인공이 작가가 되었다, 마지막엔 가 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고봉준 선생님께서는 작가, 나 이외에 알 수 없는 다른 목소리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 , 우리, 그와 같은 인칭으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떠한 목소리가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인칭을 하나의 존재로 한정지을 수 없다, 혹은 인칭 자체가 없다는 의미로 비인칭적인 것이란 제목이 등장했을 겁니다. 조금 어려우시죠? 선생님께서 처음에 말씀하신 문학에 대한 단상과 함께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니 너무 겁먹지 말고 따라오세요!

 

         사실 작품의 제목을 잡는 것은 참 어려운 것인데 (이번 책의) 제목이 참 멋졌습니다. 구체적으로 1부에 있는 내용이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을 분석하면서 그걸 판단하는 하나의 틀로써 비인칭적인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요. 우리가 자아, 혹은 주체로 회수할 수 없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 바로 비인칭적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이런 논의들은 이전부터 많이 있어왔는데요. 저자의 비인칭적인 것이 기존의 비인칭적이라는 개념과 어떻게 상이한지 궁금하네요.

 

         문학 전체가 비인칭적인 것이라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가 읽고 쓰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은 일인칭적인 것이니까요. 거의 가족이야기나 자신의 이야기지요.

            이 책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 주목해보려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발터 벤야민과 같은 경우 한 사상가를 언급하면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습니다. ‘그가 언제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왔나와 같은 이야기 말이죠. 벤야민은 그 사람의 일대기가 아닌 그의 작품, 그의 말에 집중합니다. 평론이 바로 그렇지요. 작가나 시인 개인의 일대기와 같은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쓰고 말하는 것을 통해 시대를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김수영을 읽는다고 하면 김수영이란 사람자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50~60년대를 읽어야한다는 말이지요. 

                  2000년대를 살아온 작가가 있을 때, 그 사람이 살아온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닌 그 사람의 목소리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 목소리는 그가 내는 고유의 목소리라 할 순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가는 시대의 목소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책 내용을 봤을 때 고봉준 평론가께서는 2000년대 이후의 시들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스타일, 즉 형식을 읽어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작가나 시인의 목소리가 다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 시대의 목소리를 읽는다, 그런 의미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는 작가 개인의 미학과 같은 단어를 전혀 쓰지 않습니다. 시대가 사람을 통해서 드러나는 거라고 생각하구요. 그런 걸 짚어내는 게 평론이 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작가도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으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가와 독자는 자신을 투영시켜 작품을 쓰거나 보지요. 그렇다면 단지 한 개인의 경험에만 그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대 하나의 문제적인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솔율          선생님께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시는지 느껴지시나요? 핵심은 이것입니다. 평론은 작가 개인의 일대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작품을 통해 그 속에 담긴 시대를 읽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작품 속에서 굳이 작가와 나를 꺼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 시대를 읽으면 되니까요. 다만, 작가와 나는 그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앞의 말씀에서 이 시대의 목소리라는 단어가 나왔지요. 작가가, 독자가 아닌 이 사회가 말하는 목소리가 바로 시대의 목소리입니다. 작품 속에서 한 인물이 말을 하고 있지만 개인적인 이야기처럼 보여도 그 속에 사회의 제도가 있고, 인물이 그런 말을 하게 만든 무언가가 있다는 거지요. (예를 들면, 인물이 학교에 가야해.”라고 말을 했다면 학교를 가게 만든 사회적 시스템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사회를, 세계를 하나로 지칭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대담 중 대의제에 관한 내용이 있었는데요. 대의, 의견을 대신한다, 즉 대의제란 한 집단에서 대표를 뽑아 의견을 좀 더 쉽게 모으고 전달하기 위한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과 같은 사람들을 선출하는 것이 대의제에 속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모두의 의견을 대표 한명의 의견으로 좁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Yes라 해도 극소수의 사람은 No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러나 다수결의 원칙은 소수를 억압하고 맙니다. 결국 Yes라는 의견이 최종적으로 발탁되지요. 현재 우리사회도 비슷합니다. 거기다 대표들이 권력까지 잡고 있으니 소수뿐만 아니라, 힘없는 다수 또한 묵살되고 말지요.

                이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단지 한 인물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해도 단지 그 인물의 말로만 한정시켜선 안 된다는 것을 일러주시고 있는 것은 아닌가합니다. 인물을 만들어 낸 작가, 인물에 투영된 나, 인물을 살게 한 작품 속 사회 등을 모두 보아야한다는 의미도 될 수 있겠지요

 

 

전성욱 평론가(좌) 고봉준 선생님(우)

 

         그렇다면 고봉준 선생님은 평론가이기도 하고, 시인이기도 하고, 작가이기도 하고, 평론(작품) 중 좋은 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시에 반응하는 세 가지 방식마음이 움직이는 시, 머리가 움직이는 시, 비평적 시선이 요구되는 시가 있다 에 대해 말씀해주시고 계시는데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대부분 그렇지 않나요?(웃음) 평론가들 모두 각자 마음이 움직이는 시도 있을 거고, 머리가 움직일 때도 있겠지요. 항상 문학이 마음으로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은 강압적인 말이고, 머리가 움직일 수도 있다는 것도 인식해야겠지요. 그렇다고 평론가가 자신의 취향대로만 판단을 한다면 그건 우스운 일입니다. 그래서 구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개 저는 평론계문학계가 이 세 가지를 구분하지 못해서 문제를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좋아하는 경향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상을 받아야 한다거나 이런 점은 잘못 된 것 같아요. 이런 경향을 타파하고자 이렇게 세 가지의 층위를 나누어 본 것입니다.

 

          저도 어떤 작품을 읽고 좋다 혹은 나쁘다의 판단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어떤 기준으로 매기느냐, 참 어렵고 복잡한 문제지요. 그렇다면 고봉준 선생님께서는 좋은 작품이 어떤 작품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참 추상적인 이야기네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익숙한 감정의 구조 같은 게 있어요. 예를 들면 은유가 뭐냐고 물으면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익숙하고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있지요.

              우리는 흔히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에 어느 정도 생각을 할까요. 밥 먹고, 자고, SNS하고, 수업을 듣다보면 생각하는 것은 채 1시간도 안되죠. 그럼 하루를 24시간이라고 보았을 때, 겨우 1/24을 생각한다는 건데요. 그렇다면 그 생각을 언제 하느냐, 자기가 습관적으로 움직이다가 안됐을 때 우리는 생각을 하지요. 습관에 반대되는 것이 있을 때, 습관의 무서움이나 그것이 놓치고 있는 것들을 문학이 집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전에 대학 강의를 나갔을 때 한 학생이 졸고 있었어요. 그 학생을 보며 제가 창문을 가리키며 물었죠. 창밖에 뭐가 있냐.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데요, 라고 말을 하더라고요. 제가 다시 물었죠. 창밖에 아무것도 없는 게 가능하냐?

              그 학생은 왜 창 뒤를 보지 못했을까요? , 관심이 없는 거죠. 하늘 한 번, 나무 한 번 볼 관심도 없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는 익숙한 것을 맛보고 즐기고 하는데 문학의 상당수는 그걸 깨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미학적 실험이라고 하는데 저는 미학적 실험이 아니라 삶을 바꾸기 위한 한 방법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추운 겨울에 나무가 서 있어요. 헐벗고 있는 나무를 보고 나무가 있네? 라고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나무젓가락, 다 먹고 남은 뼈다귀와 같이 다르게 보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기존에 익숙해져 있는 상식적인 것이나 습관적인 것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그게 중요한 관점인데. 기호학자 랑시에르가 감각적인 것에 대한 분배방식에 대해 말을 했었죠. 관습적이고 상징화 되어있는 분배방식에 저항하고 일탈하는 방식이라 볼 수 있는데, 많은 평론가들이 2000년대에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명명하면서 그런 경향을 가진 시들에 주목했던 이유가 바로 기존의 관습화된 서정과는 달랐던 것이 가장 컸던 게 아닐까 합니다. 고봉준 선생님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네요.

 

          제가 랑시에르를 통해 이해하는 것은 두 개가 서로 다른거다이렇게 나누는 걸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은영이나 심보선 같은 이들은 아주 잘나가는 시인으로써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많이 하지요. 공산당과 같은 단어도 말이에요.

               소설에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대부분이 자본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으로 만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에 대해 (소설에서는) 조금 더 다르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이때 자본주의적, 실용주의적 만남이란, 어떤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 저 사람의 재산은 얼만지, 내게 도움이 될 지와 같은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솔율         랑시에르가 등장했어요. 랑시에르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철학자이며 우리에겐 기호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성욱 평론가님의 말 속에서 감각적인 것에 대한 분배라는 말은 쉽게 말하자면 하나의 텍스트(작품)를 보았을 때, 기존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변화가 있어왔는데요. 어떤 시기엔 형식이, 또 어떤 시기엔 내용이, 또 그 내용 중에서도 표현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었던 적이 있었지요. 오늘날에 와서는 독자의 개념이 중요해지며 개개인의 감성을 중요시 여기게 되었습니다. 작품 자체 보단 작품을 해석하는 독자가 중요하게 된 것이지요. 본디 사람은 모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요.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해석은 수십, 수만 가지가 나올 수 있습니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포착한 것이지요.

               과거엔 작품을 판단하는 좋고 나쁨, 옳고 그름 등의 기준이 있었다면 지금은 개개인의 독특한 기준에 의해 작품이 분열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만의 (참신한) 감각으로 작품을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이죠. 따라서 기존의 의미는 해체되고 다양하고 새로운 의미가 탄생한다는 의미가 바로 감각적인 것의 분배라 할 수 있습니다. 고봉준 선생님께서 랑시에르의 영향을 받으신 부분도 바로 기존의 기준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텍스트를 바라보는 것이지요.

 

         저 또한 독특하고 기존과 다른 참신한 시도들을 문학이 아니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이 매우 무자비하게 느껴지고 기분이 좋지만은 않는데, 그걸 떠나서 제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은 2000년대 시들이 과거와 다른 새로운 인식론, 즉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스타일이 출현한 것이라 말을 하는데 저는 이 새로움에 의문이 생깁니다. 이 새로움의 정체가 물론 사회적으로 의미를 갖는데 그게 정말 새로운 존재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새로운 것이냐, 혹은 어쩌면 이 자체도 진부한 것이 새롭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실 새로움이란 가장 기초적으로 고전과 다르거나 고전에서 탈피하는 것에서 이야기되어집니다. 그런데 오늘날 새로움을 외치는 사람은 주로 자본주의자들이지요. 따라   서 지금 시대에서 새로워져라는 이야기는 자본의 상품이 되란 말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 새롭다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따라서 문학에서도 새로운 것 자체가 문학을 다 흡수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새롭다는 것은 그런 혁신과 같은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무언가를 불편하고 삐걱하게 만드는 것인데, 소설은 그걸 인물의 관계에서 잘 보여주지요. 사실 가족관계 조차도 요즘은 이익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출을 하지 않는 이유는 나가면 배가 고프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가라고 해도 쉽게 못 나지요. 그렇다면 우리 머릿속에 가족은 마냥 좋은 것이라 박혀있나요? 아님 나쁜 건가? 사실 판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움이라는 것은 어떤 기존의 상투적인 것을 깨뜨리거나 문제로 삼을 때의 의미지, 상품으로써의 새로움과는 별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와의 만남]에 참여했던 모든 분들과 함께

 

  자, 여기까지요약된 부분도 많지만 중요내용만 간추려 보았습니다. 사실, 저는 마지막 대담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창작을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저는 이번 대담이 더 와 닿았던 것 같아요. 평론가의 입장에서 문학인이 가져야 할 자세를 알려주시는 것 같았거든요.

  고봉준 선생님의 말씀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기존의 틀에서 탈주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정해져있는 것들에 반기를 드는 것이지요. 창작을 하면서 수없이 듣고 생각했던 비인칭적인 것. 기존의 틀을 깨는 것, 기존에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 비단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을 하는 사람 모두가 갖춰야 할 자세지요. 사실 그 틀을 깨지 못해 글을 쓰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저인데요. 고봉준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을 잘 새기며 문학인으로써의 삶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킬 수 있도록 노력 해야겠습니다^^

   

이상 2015130일 금요일에 있었던 저자와의 만남리뷰를 마치겠습니다^^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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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칭적인 것 - 10점
고봉준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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