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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의 만남 | 이벤트

제자리에서 응답하는 일::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작가와의 책이야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12. 9.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작가와의 책이야기

사진: 김민영 

 

11월의 마지막 목요일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김비 작가님과 독자분들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긴 제목 덕분에 『붉, 출』이라고도 불리는 이 장편소설은 

비상계단에 갇힌 가족의 이야기인데요

택배기사로 일하다 허리를 다친 남수, 근무력증을 앓는 아내 지애그리고 뇌성마비를 가진 아들 환이가 주인공입니다.

동반자살을 하기 전, 가족은 마지막 만찬을 위해 초호화 백화점에 왔다가

층수도 쓰여 있지 않고, 이상한 붉은 불빛으로 물든 비상계단에 들어섭니다.

여기서 비정규직 20대 정화, 명예퇴직 압박에 시달리는 명식

성전환 수술을 위해 돈을 모으려는 수현 등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출구를 찾아 헤멥니다

 

행사가 있었던 26일은 손발이 얼어붙을 만큼 바람이 강한 날이었어요

그럼에도 많은 독자분들께서 참석해주셔서 

행사 공간을 빌려주신 호랑이 출판사의 작업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난롯불 쬐며 이야기했답니다



이 날 이야기는 작가님께서 책의 일부분을 직접 낭독해주시면서 시작됐어요.


남수는 찬찬히 사방 벽을 둘러보았다. 손으로 짚어가며 붉은 벽을 꼼꼼히 살폈다. 그러고 보니 매끈하게만 보였던 벽 위엔 무수히 많은 작은 돌기들이 오돌토돌 돋아 있었다. 조금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벽이었지만, 손으로 더듬어보니 무작위의 돌기가 빼곡히 만져졌다. 그것은 마치 공포에 질린 누군가의 팔뚝 같았다. "이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틀림없어."

성급한 손길로 그녀는 환이를 쓰다듬었다

(…) 

순간 남수는 엉뚱하게도 역사 속에 희생되어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최선이 아니라 차선을 택해야 하는 시간,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택할 수밖에 없는 순리. 그렇다면 우리는 차선이나 차악이 될 수 있을까? 남수는 다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쾅쾅, 또 한 번 있는 힘껏 철문을 두드렸다

"그럼 고장 아닌가?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고장이니 인재니 만날 그러잖아?"

"그러면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어야지. 갇힌 게 우리뿐이라는 건 말이 안 되지."

더 이상 지애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몸짓을 흉내라도 내듯 남수도 붉게 물든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상해, 여기.' 그녀는 또다시 그렇게 중얼거렸다(22~23)

 

소설 속 짧은 한 장면에서도 주인공들의 불안과 절망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붉, 출』을 암울한 이야기라 부르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 아닐까 합니다. 김비 작가님은 비상계단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갇혀 있으면서도 인물들이 그 안에서 스스로 원하던 것, 하고 싶어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뤄 나간다는 점을 짚으셨습니다. 가난 속에서 떳떳한 가장이 되기 힘들었던 남수는 계단 속에서 가족과 함께 걷고 있고, 침대를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했던 지애는 남수와 환이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존재가 됩니다. , 비틀린 팔다리 때문에 스스로 움직이기 힘들었던 환이도 비상계단에서는 온 세상을 자기의 그림으로 채우는 꿈을 이룹니다.

이런 점이 『붉, 출』의 숨겨진 반전이라고 할까요. 이어진 김대성 평론가님과의 대담에서도 이렇게 『붉, 출』을 숨겨진 면모들을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대담의 일부를 아래에 옮겨봅니다.


///


김비: 이 안이 굉장히 척박하고 암울하고 절망으로 가득 찬 세계인 것 같지만, 이 인물들은 아무런 것도 변한 게 없다, 예상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많은 것을 이루고 변화된 자기 자신의 또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거죠. 근데 그것은 그쪽 세계뿐만 아니고 우리, 이쪽의 세계의 반영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거든요. 우리가 믿고 있는 어떤 절망이 정말 절망일까. 혹시 내가 어디에 묶여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 저는 예전에... 예전을 생각하면 정말 많이 절망했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자학도 많이 하고 그랬었는데 요즘은 좀 자유로운 느낌을 조금조금씩 갖게 되요. 저 자신을.. 이제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저 자신을 추스르면서 내가 서 있는 여기를 나를 위해서 즐겁게 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아무 생각하지 않고. 가족, 사회, 정치, 다 생각 않고 나를 위해서. 오롯이 나 하나를 위안하면서, 나를 위해서, 그렇게 살고 있거든요. 그렇더라도 저는 그게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느 서면 인터뷰에서 주인공인 남수라는 인물은 왜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고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냐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 실제로 보통의 이야기는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인물이 어떤 사건이나 이유.. 다른 계기가 있어서 다른 인물로 바뀌거든요. 선하게 깨우친다거나, 내가 이제 바뀌어야 되겠다, 내가 이제 가족을 위해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바뀌게 되는데 제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죠. 저는 인물을 바꾸는 대신 세계를 바꾼 거죠. 그러니까 그런 세계라면 그런 인물이 오히려 더 가장 희망적이고, 그 세계를 믿지 않고, 그 세계를 불신하는 비관적인 그 모습이 오히려 더 가장 희망적이고 생을 향해 가장 힘 있는 발걸음을 내딛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궁극적으로 굉장히 암울하지만, 여전히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사람으로 남아 있지만 제가 하려고 했던 것은 희망의 다른 얼굴을 얘기[하는 것이었어요.]


 


김대성: 여기에 한마디 더 보태면, (…) 절망이라는 거는 희망하기를 멈춘다는 거잖아요. 말 그대로 푼다면. 그런데 만약 이 세상이 개별자들의 희망을 지켜주지 못하는 곳이라면 우리가 희망하는 방식이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매번 실패하고 패배하고 좌절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당할 게 아니라 절망이 희망하기를 중단한다, 끊어낸다는 것은 다르게 접근해보면 직전까지 희망했다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막연한 희망들을 품고 상처받을까 두려워할 게 아니라, 잘 절망하자. 절망과 대면하자. 절망함으로써 직전까지 희망하지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자. (…) 남수 또한 (…) '저 위에 뭐가 있다 저 아래 뭔가가 있다' 이야기가 오갈 때 같이 움직이다가 매번 좌절[하고], 오히려 그 좌절을 선명하게 대면하면서, 언제라도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면서 건물 뒷편 계단 안에서의 생의 의지같은 것들을 좀 발견하는 장면들이 전반적으로 펼쳐져 있거든요. 그것이 말씀하셨던 세계를 아예 바꿔버리는, 태도를 바꿈으로서 그런 것과 연관이 되는 것 같아요. 절망하기로서의 희망하기의 문맥하고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김비: , 여기도 카피로 쓰셨지만, "희망이라고 다 옳은 게 아냐. 어떤 희망은 후련한 절망보다 못해." 희망이란 말이 물론 많은 걸 일으키고 있기는 한데, 너덜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문을 사이에 두고 바깥 쪽에서 들려오는 희망의 소리가 있잖아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희망의 소리가 있잖아요. 되게 잔인하지만, 어쩌면 그게 우리 살고 있는 여기가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걸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세계에 살고 있고 그럼에도 나아가는 것이 책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 잔인함을 오롯이 드러낼 수밖에 없는어쨌든 희망이라는 말 아닌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희망이 아닌, 희망을 짓누르는 다른 언어. 정말 우리를 일으킬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희망이라는 언어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요


김대성: [소설에서는] 여기가 몇 층인지도 몰라요. 160층 백화점에서, 지하로 내려가야 될지, 지상으로 올라가야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오르락내리락 하죠. 그런데 남수는 허리가 너무 안 좋고, 아이도 있고, 지애는 만성 무기력증이고. (…) 조금 내려갔다가도 다시 올라와야 되고, 그런 상황 속에서 그런데 위에서부터 소리가 들리고 문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거든요. 금방이라도 나갈 수 있을 것처럼. 그런 단서들이 소설에 전반적으로 계속 펼쳐져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 주신 것 같아요.

환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환이가 너무 핵심적인가요


김비: 그렇죠, 아무래도. (key).


김대성: 희망 말고 환이.


김비: 그거 좋네요.


김대성: (…) 모두가 무력해질 때 환이가 천진난만함으로 방향을 제시하거든요. "아이의 그림은 이제 혼돈에 빠진 그들을 이끄는 마술같은 표식이었다"라고 176페이지에서 177 페이지 사이에 걸쳐 있는 문장이 있는데. 되게 아무런 희망도 없[] 것 같은 뇌성마비[를 가진] 아이가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면서. 그것을 보고 여기가 몇 층이다. 우리가 몇 층 올라왔구나 [알게 돼요. 그 이전에는] 아무도 그걸 시도를 안 해요. 그냥 출구를 찾으려고 아등바등거리지 여기가 몇 층이라는 표시를 할 생각을 아무도 하지를 않는데, 환이가 그걸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그냥 그림을 그리는 거에요. 그게 표식이 되어서 작은 이정표가 되는데. (…) 마치 횃불 같[기도 하]고 가끔씩은 조명등 같고 촛불 같은 (…) 환이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를 [해주세요.]


김비: 아이.. 이건 개인적인 습성 같은데요. 전 항상 소설에 아이를 써요. 그것도 한 여섯일곱살의 아이를 꼭 쓰는 편이에요. (…) 어쩌면 그게 저 자신이 갖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동경, 계속된 동경이겠죠. (…) 내가 갖지 못한 순수함에 대한 욕망, 욕구 같은 것일 수도 있고, 그 나이대로 돌아가려는 회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이 아이 같은 경우는 장애[를 가진 소수자에요.] 성소수자는 제가 주변에서 많이 봤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편안하게 쓰는 편인데, 장애를 가진 아이를 쓰는 건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건 뭐 취재하고 이런 어려움이 아니라 그 인물을 만드는 것 자체가, 일단 한 인물을 탄생시키는 거잖아요. 그것도 장애를 가진 한 인물을.. 그거는 굉장히 아픈 일이거든요, 제 생각으로는. 그런데 이 아이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요. 횃불이고 촛불 같다고 하셨는데. [제가] 어렸을 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 저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행동하는데 주변에서는 제가 이상하다고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런데 만약에 환이가, 이거 정말 조심스런 얘기지만, 선천적으로 그런 몸으로 태어났다면 이 아이에게 과연 꿈꿀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일까, 이 아이는 꿈을 안 꿀까, 정말, 이 아이는 정말 고통스럽기만 할까 하는 생각을 한 거거든요. 가끔 병원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같은 걸 보면 아이들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굉장히 순수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금방 고통을 가졌었던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순수한 웃음, 그런 걸 발견할 때. 이건 제 욕심일 수 있어요, 정말 위험한 욕심일 수 있는데 좀 그렇다면 좋겠다는 바람인 것 같아요. 누가 옆에서 이쁘다고 해 주면 자기 스스로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나 이쁘구나하고 생각하는 그런 존재이기를 바란 제 마음인 것 같아요. 그래서 되게 조심스러웠어요


(…)


김대성그러면 환이 이야기는 이 정도 하고요. 전작 『빠쓰정류장』에서는 기억 속의 장소를 찾기 위해서 로드무비처럼 계속 옮겨 다니[고, 찾고 있는] 그곳은 없는 곳으로 밝혀지는데, 정류장이라는 것이 머무는 장소는 아니잖아요. 머물지 못하고 바로 가야 되거든요. 정류장의 장소라는 것은 대합실 의자 정도의 공간? 떠남인지 상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자리에 앉아야 다음 행보를 시작할 수 있는, 뿌리내릴 수 없는 존재들의 거처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붉, 닫, 출』은 계단이어서 이전처럼 수평적으로 옮겨 다닐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수직적이고 갑갑하고 변동 없는 장소로, 폐쇄적인 곳[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변화에 대해서 좀 말씀해주세요. 겹쳐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 건 뭐냐면, (…) 소설에서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각 층들이 정류소일 수도 있다. [그곳이] 절망하면서 멈춰 설 수도 있구요,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는 그런… 내몰린 이들이 잠깐 머물 수 있는 거처일 수도 있겠다. 가까스로 버틸 수 있는 장소일 수도 있겠다, 라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는 초반에 남수가 ‘출구를 한 번 찾아 볼게’ 하고 계속 내려가거든요? 그때 위에서 지애가 ‘여보, 있어요?’ 하고 물어요. 그 때 남수가 ‘있어!’ 하고 대답을 하는데  [그 대화가] 무기력하고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애의 무력함을 드러내기보다는 이 폐쇄적인 공간을 그들의 교류와 교신이 일어나는 장소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조금 받았는데. .그런 면에서 이 계단은 폐쇄적인 공간은 아니구나. 언제라도 새로 시작할 수 있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질 수 있고,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고, 이곳이 좀 정류소 같은 느낌도 든다, 연장선에 있겠구나 하는 대목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적 공간에 대해서 염두에 두시거나 조금 더 이야기해주시고 싶은 대목이 있으면 들려주세요.


김비 (…) 실제로 이 공간은 부산에서 만났어요. 서면 cgv아시죠? 마트가 밑에 있잖아요. 지하주차를 하면 지나서 가야 하잖아요, 홈플러스를 지나서 가지 않으려면 비상계단을 올라가게 되있어요. 근데 그 비상계단 들어가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 비상계단에 층수가 없었어요. 중간쯤 올라가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는 거에요, 갑자기 두려움이 굉장히 크게 밀려왔었어요. 그게 이 이야기의 시발점이었는데 그 계단이라는 공간이, 과연 저 표지판이 없다면 무엇을 보고 오르내릴 수 있을까 생각을 했던 것 같고 그것을 생각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우리 일상과 겹쳐졌어요.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끊임없이 누군가를 따라서 올라가고. 저도 그때 다른 게 앞에 없었거든요. 앞에 다른 사람이 걸어 올라가니까 올라가고. 어쩌면 계단이라는 공간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이 자본주의 사회.

횡으로 설 수 없는 공간이에요. 일직선으로 설 수밖에 없는 공간이거든요.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이기도 하고, 저는 등장인물들이 또 다른 의미의 각자의 희망을 만들어 가면서 이 공간이 더 확장되기를 바랐어요. 욕심으로는 우주를 담고 싶었어요, 이 안에. 그래서 우주에 대한 힌트들이 남아 있어요. 이게 또 다른 세계이기도 하고, 이 공간을 태초로 돌리고자 하는 욕망이기도 하고, 작가로서 시도하는 전복, 빅뱅같은 의미였거든요. 실제로 굉장히 좁은 공간이지만, 작가로서는 이 공간이 우주로까지 확장되는 공간이었어요. 그래서 벌레 이야기도.. 벌레가 처음에는 눈에 있었죠. 마지막에는 이 건물 자체가 벌레처럼 꿈틀거린다고 했거든요. 확장되는 느낌이고. 이 인물들의 이름에도 유치하긴 하지만 한가지씩 힌트를 넣었어요. 혹시 아시나요?


김대성: 어떤..?


김비: 이름들에 은하계 행성들의 이름을 하나씩 집어 넣었어요


김대성: , 그렇구나. 수현, 지애,


다같이: 금이, 정화… 


김비: 정말 유치한 거거든요, 하지만-


김대성: 보물찾기 같은 거네요.


김비: 그렇죠. 환이는 앞에 나오죠. "그만해, 김달환!" 이렇게 나오잖아요. (…) 이 공간을 우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끝나는 건 우리밖에 없거든요. 그냥 우주는 계속 지나가고 있는 거죠.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끝이 아닌 웜홀을 통해서 다른 곳으로 나가서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세계를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거든요. 협소하게 읽으면 협소하지만 작가로서는 굉장히 큰 것 까지 생각하면서 그려냈던 공간이었습니다.


김대성: 여러분, 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주가 여러분들을… (웃음)


김비: (웃음) 작가는, 아무래도, 병인 것 같아요. 굉장히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해요. 한군데에 몰아넣으려고 하고 그것에 잘 완성되면 되게 보람이 있어요. 인물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이건 우주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에요]. 


김대성: 계단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 경향신문[에 실린 서평처럼 소설을] '재난' 이야기로서 읽을 수도 있지만 (…) 한 개인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부침을 묘사해놓은 것으로도 읽을 수 있거든요. 일상적으로 읽을 수 있는 문맥이 훨씬 풍부하다고 생각하는데.. 모두가 공통적으로 겪는 재난이 아니라,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존재들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정서의 부침들, 이를테면 조증 같은거요. 좋았다가 끊임없이 추락하고. 추락하면서는 다시는 올라갈 수 없을 거라고 절망하면서, 바닥을 치죠, 그리고 이 추락은 얼마나 또 쉽게 됩니까. 그런 것들도 (…) 충분히 염두에 두고 쓰신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소설을 재난서사로 단박에 규정하기에는 좀 더 세밀하고 폭넓게 읽을 수 있는 대목들이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비: 맞아요, 저는 재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재난서사로 쓰려면 이 재난을 주인공들이 어떻게든 극복해야 하거든요. 어떤 방식으로든. 그런데 제가 묘사한 방식은 재난서사의 극복방식은 절대 아니거든요. 누군가 영웅적인 행동을 해야 하고 누군가를 살려내야 하고 , 떠나면 안돼!’, 이런 게 있어야 되는데, 저는 재난서사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그냥 우리 현실과 꼭 닮은 궁지를 그려내고 싶고 그 궁지를 좀 깨트리고 싶었어요. 중간에 구상을 하는 와중에 세월호 사건도 있고 그래서 감금, 폐쇄라는 것이 굉장히 크게 다가왔어요. 너무너무 크게, 아프게 다가왔[어요].


(…)


독자: 여기서 조명이 세 번 바뀌잖아요, 처음에 붉었다가, 나중엔 파랬다가, 나중에 없어지잖아요. 어떤 뜻을 담으신 건[가요].


김비: 앞서 말했던 환경의 변화고요, 우주 얘기를 했잖아요. 우주를 만든 것은 불, 물 그런 물질이거든요. 그것의 상징을 쓰려고 했고저는 이 세상이 바뀌면 뭔가 굉장히 많이 바뀌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ㅠ요. 그 차이 없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불이 꺼지면서 밖으로 암흑이 되고 불빛이 떨어지잖아요, 불빛의 파편이 떨어지고 건물이 흔들리면서 먼지가 떨어지는데요. 그 공간 안에 우주의 모습을 그리려는 욕심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우주에 꽂혀 있었어요. 이 세계를 태초로 돌리고 싶은 욕망. (…)


독자: 아까 세월호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학생들이 몇 백 명 내려간다고 []셨잖아요. ‘수장 당한이런 표현도 있었고. 염두에 두신 건가요?


김비: 망설였어요. 이건 쓰면 안돼. 근데, 어차피 제가 현실을 담고자 했고무기력함을 담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여기를 담고 싶었어요.


김대성: 소설에서 35페이지에 보면 남수가 밑에서 되게 절망적으로 고꾸라져 있다가 힘을 내서 그는 제자리를 향해서 뛰고 있다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근데 이 제자리가 주기적인 표현인 것 같아요. 자기 자리이기도 하구요, 두 번째는 원래 있던 자리에요. 그럼 변한 건 없어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데, 근데 그게 원점이 아니라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 내가 와주기를 바라고 있는 누군가가 있는 자리, 책임을 짊어지는 자리이고 응답해야 하는 자리. 그래서 제자리가 되게 힘 있는 자리일 수 있겠다. 그래서 남수가 초반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혼자 걸음이 아니겠다, 이것은 지애랑 달환이의 걸음이 겹쳐져 있는 걸 수 있겠다. 이 절망적인 세계에서 우리가 뭐랄까요, 구조요청, 모두가 구조요청하잖아요. 누구나 쉽게 조난당할 수 있고. 절망에 빠질 수 있는데 이 구조요청에 응답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사람이나 컨트롤타워가 아니다, 바로 함께 조난당한 사람이 구조요청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구조요청에 가장 필요한 건 저는 응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사람을 건져 올리는 게 아니라 그걸 들어야 해요. 그리고 반응을 해야 하는데, 남수의 제자리를 향해서 뛰어올라갔다는 짧은 문장이, 책임을 지는 자리,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거란 측면에서 여기 나오는 많은 무기력한 존재들이 서로에게 응답하고 있고 서로에게 작은 책임을 붙들고 있다는 점에서 이 건물 뒷면이 절망의 공간만은 아니다, 서로가 엉키고 어울리면서 결들을 달리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김비: 정확하게 읽어주셨는데, 아까 말씀 드렸듯이 이 사람들이 결국은 희망을 다 찾고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요.] 그것이 이 안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믿음이고 신념이고 새로운 에너지거든요. 어떻게든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제자리 얘기를 하셨는데, 233페이지에 수현과 정화가 무리와 떨어져서 여행자처럼 계단을 여행하면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서 목종이 "그게 무슨 소리야. 다 똑같은데 가면 뭐해"라고 하니, 수현이 얘기를 합니다

아무리 똑같아 보여도, 같은 건 없지. 여기가 어디인지 우린 왜 여기에 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우린 어쨌든 다른 곳에 와 있잖아? 제자리를 도는 것 같지만, 여전히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지만, 일단 올라서면 그곳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잖아? 다시 돌아내려간다고 하더라도, 그곳은 이미 그때의 거기는 아니잖아? (…) 내가 달라졌으니까, 아무리 그곳이 똑같은 곳이라고 하더라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져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가 똑같은 세계,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세계를 만들었지만, 결국에는 똑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계, 누가 구원해주는 건 정말 아니거든요. 우리 안에 있는 거죠. [후반부에] 종교에 관한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이 책 안에 제가 신을 넣었거든요. (…) 묵묵히 곁에서 남수의 모든 걸 지켜보고 제일 먼저 절망의 상태에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을 때 가장 먼저 앞서서 걸어 올라가는 이름 없는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을 바로 신으로 저는 생각하고 있고요. 신은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종교는 없지만, [저는] 구원을 찾아라, 믿어라, 이래라 그런 게 과연 신일까? 생각하거든요. 조용히 우리와 같이 쓰러지고, 같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하지만 아무 말 없이 가장 먼저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서 인도하는 인물이 신이 아닐까 생각해요.

 

///


남수가 번번이 되돌아오는 '제자리'가 

응답의 자리라는 말을 곱씹게 되는 저녁이었습니다.

(앗 응답하라 198...? 하핫)  

편집자로서 『붉출』을 여러 번 읽었지만, 작가님과 평론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새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인물의 이름에 은하계 행성들을 숨겨놓으셨다니!!! 저만 눈치 못 채고 있었던 건 아니겠죠;)


2015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새해 결심을 할 날도 (그리고 작심삼일 할 날도!) 멀지 않지만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응답하고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 따뜻한 12월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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