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작가 리아오(李敖)가 쓴 『北京法源寺』란 작품이 있다. 국내엔 아직 번역본이 나와 있지 않지만, 영문으로 번역됐을 정도로 꽤 알려진 소설이다. 얼마 전 오랫동안 존경해 오던 교수님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됐는데, 중국 관계 이야기를 나누다 이 책을 오랜만에 떠올릴 수 있었다. 2004년 대만과 중국에서 출판된 책으로, 근대 중국의 혁명 주역이었던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이 주인공이다. 지금도 북경에 남아 있는 ‘법원사’는 원래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희생된 수나라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당나라 때 세운 절이다. 무술변법이 실패하고 강유위가 잠시 몸을 피해 있던 이 절을 배경으로 리아오는 혁명 전후의 숨 가쁜 상황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필자가 유학 생활을 마무리하던 시기에 출간된 이 책이 기억에 생생한 이유는 근현대 중국철학이 전공인 탓도 있지만, 변법 실패 후 혁명을 꿈꿨던 이들의 좌절과 고뇌가 인간적으로 잘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강유위이지만, 실제 기억에 더 깊숙이 새겨진 이는 譚嗣同(1865~1898)이다. 담사동은 서태후의 쿠데타로 변법이 실패하자, 망명 권유를 거절하고 康廣仁, 劉光第 등과 함께 서른셋의 나이로 순절했다. 처형 당시 그가 남긴 말이 압권인데, “각 나라의 혁명은 피를 먹고 자랐다. 도적을 죽이려했으나, 능력이 없어 죽는다. 가치 있게 죽으니, 빨리 형을 집행하라”다. 지식인의 순절이 드물지 않은 중국의 전통에서 보더라도 장쾌한 죽음이다.     

 

신해혁명을 주도한 손문이나 黃興, 여성으로 혁명에 참여했다 희생된 秋瑾 등의 회고를 들어보면 그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바로 담사동이다. 현대 중국의 국학파 영수 章炳麟 역시 담사동의 『仁學』을 읽고 혁명의 길에 나섰다고 말한 바 있다. 『인학』은 담사동이 순절하기 직전인 서른두 살에 쓴 책이다. 여기에서 담사동은 양명학을 바탕으로 전통 유가의 ‘仁’사상에 화엄종과 유식불교, 묵자 사상을 아우른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서구의 정치 체제, 기독교, 물리학, 수학, 사회학, 경제학 등 다양한 근대학문의 성과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담사동이 유가의 ‘인’ 사상을 당시 상황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라는 계몽적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근현대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비견될 만큼 새롭고 다양한 사상들이 등장한 시기다. 철학사에서 이 시대를 주목하는 이유는 지식 패러다임의 전환기가 지닌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인학』은 그 대표 작품 중 하나다. 이번 학기 우리 학계에 반가운 소식 중 하나로, 전공자 외에 그 내용을 접하기 어려웠던 『인학』(임형석 옮김, 2016)의 우리말 번역본이 출판됐다. 부산 지역의 대표 출판사인 ‘산지니’가 내놓은 1차 근현대중국사상 총서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중국 근현대 사상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우리 현실에서 새로운 계기가 될 만한  의미 있는 기획이다.


현실적으로 학술서 번역은 출판사나 역자에게 고달프기만 하고 마땅한 보상이 따르지 않은 작업이다. 적지 않은 시간과 들인 품에 비해 그 평가는 논문 한 편만도 못하고, 상업적 성공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학계에서 학술 번역에 대한 평가 체계가 개선돼야 한다고 누누이 얘기해 왔지만, 교육부와 대학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연구 재단의 번역 과제 공모가 우리 사회의 고전 출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의 전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현실에서 ‘산지니’와 역자들의 이번 총서 출간은 무모하리만큼 용감해 보이고, 그래서 더 감동적이다.


  담사동의 『인학』 외에 함께 출간된 책은 양계초의 『歐遊心影錄』, 『新中國未來記』, 1920년대 중국의 대표적 학술 쟁점이었던 『과학과 인생관 논쟁』이다. 특히 『신중국미래기』는 전공자들조차 생소한 책인데,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의 정책 슬로건으로 떠오른 ‘중국의 꿈(中國夢)’의 근대적 구상을 엿볼 수 있다. 최근 들어 중국뿐 아니라 한국, 독일, 프랑스, 영미 등의 현대철학에 대한 관심과 출판물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학계의 균형 잡힌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서울 독점의 출판 환경에서 꿋꿋하게 지역을 지키며 제 갈 길을 가는 ‘산지니’의 기획이 성공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이연도 서평위원/중앙대 교양학부·철학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