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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의 서재 정우영의 에세이] 가볍게 툭툭... 잽으로 인류의 욕망을 KO시키자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7. 5. 19.

욕망은 카운터펀치 한방으로 제압되는 게 아니다. 부지런히 몸을 놀리면서 끊임없이 잽을 날려야 한다.

지리산을 베고 누운 시인 박두규의 제안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밖으로는 모든 사회적 문제의 근원이 되는 인간의 탐욕을 식히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안으로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살아내기 위해 내 문학이 있다.” 이 책 ‘여는 글’의 이 발언을 보는 순간, 내 서평은 굴러가기 시작했다.

 

‘탐욕’을 우리 시대 모든 문제의 근간으로 보는 시각과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살아내”고자 하는 그의 선한 의지에 나는 선뜻 물들었다. 그때 들여다보인 내 안의 하찮고 불순한 미망들은 잠시 접어두었다.

 

더불어 이런 고려도 약간은 있었다. 그가 서울 어디가 아니라, 부산지역 출판사에서 책을 내었다는 살핌에 대한 내 나름의 존중. 지방에서 사는 작가가 지방에서 책을 낸다는 건 지역출판에 대한 애정의 표출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욕심을 버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산만 해도 출판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치로는 변방이다. 그러니 그의 이 선택이 내게는 탐욕을 내치겠다는 실천적 메시지로 다가온 것이다. 어찌 고맙지 않을 것인가.

 

이 책 ‘욕망의 인간화’라는 꼭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이제 인류 최고의 적은 과학도 아니고 자본도 아니고 자본의 결탁이 만들어낸 ‘탐욕’이라고.” 맞다. 현대문명의 자본주의화와 함께 확장되어 온 인간의 ‘탐욕’이 현대사회 만악의 근원이다. 그는 이를 일러 심암(心癌)이라고 일컫는데, 그만큼 치유하기 어려운 심각한 병증이란 뜻일 터이다. 하지만, 나는 탐욕이 심암보다 더한 중독성을 갖고 있다고 여긴다. 암은 나만 소멸시킬 뿐이나, 탐욕은 나와 너, 우리 모두를 파멸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참 궁금했다. 내가 알건대 박두규는 그저 시인이자, 샌님 같은 교사였다. 그러던 그가 언제 이와 같은 깊은 사유에 눈떴을까. 무엇이 그를 이런 방향으로 이끌었을까. 나는 그의 생래적인 선함과 함께 지리산을 꼽는다. 지리산은 그에게 단순한 산이 아니라, 지리산이라는 이름의 영적인 스승이다. 그 지리산의 영험한 기운이 그를 어떤 깨인 자로 인도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중략)

 


생을 버티게 하는 문장들

박두규 지음

산지니 발행ㆍ220쪽ㆍ1만3,000원


그는 이 쨉과 같은 개인의 성찰과 반성 없이 탐욕의 자본주의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라 본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자는 누구라도 열심히 쨉을 날려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현대문명은 전지구적이다. 혼자만의 쨉으로 거꾸러뜨리기에는 너무나도 방대하고 힘도 세다. 전세계의 영성체가 연대하지 않고서는 상대할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그리하여 탄생한 게 ‘생명평화’인데, 그는 열정적으로 이 ‘생명평화’에 매진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대안문화, 대안문명을 위한 실천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자본의 문명이 가질 수밖에 없는 반생명적이고 비인간적인 문제들을 극복해야 하는 전환기적 인식이 요구되는데,” 그는 생명평화운동이 바로 그 중심화두라고 믿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의 글 속에 등장하는 자연은 외경과 순리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내 눈과 귀를 잡아 끈 부분이 바로 여기이다. “가난이라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오. 자연에 어디 가난이 있습니까? (중략) 원래 사람은 자연인데 사람들이 스스로 구분하면서부터 가난도 생기고 욕심도 생긴 겁니다. 자연은 그 모두가 그 존재 스스로를 나누는 것들이어서 가난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지요.”

 

그래, 맞다. 우리도 잘 안다. 자연에는 가난도 없고 차별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둘러보라. 자연마저도 자본가들의 소유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소유와 탐욕을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생명평화’든 뭐든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는 없다. ‘내 맘의 영성’을 먼저 깨우치라는 그의 곡진한 청유에로. 그 깨우친 눈으로 “눈부신 봄날 마른 가지를 비집고 올라오는 초록빛 새잎을 보면, 잃어버린 아름다운 내가 생각나 눈물이 나고, 온 세상을 초록바다로 만들어 출렁이는 봄산을 보면, 잃어버린 그대가 생각나 이 비루한 몸을 낮춰 수없이 절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런 게 삶이다.

 

2017-05-19 | 한국일보 | 정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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