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발굴 현장 동행 르포,

무고한 죽음 증언하듯 고무신 옆 탄피…“이런 곳 아직 수두룩”

 

 

땅 밑의 ‘70년 원혼’…8년째 손놓은 정부
진실화해위 발굴 10곳에 그쳐…해산 후 국가 차원 조사는 ‘0’
공동조사단 “전국이 공동묘지”

 

 

▲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관계자들이 지난 10월 10일 세종시 연기면 산울리 야산의 은고개 지역에서 진행한 ‘연기 국민보도연맹 사건’ 유해 매장지에서 시신 1구를 발굴하고 있다. 이후 진행된 유해 분석에서 이 시신은 30~35세 남성으로 확인됐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68년 만에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개골 안은 나무 잔뿌리로 가득했다. 뇌 신경망 이미지처럼 보였다. 두개골 밑으로 바싹 마른 상반신과 하반신이 뒤틀린 채 누워 있다. 키는 약 158㎝. 뒤통수 부위의 골격 형태 등을 보아 남성이었다. 치아의 마모도로 추정한 나이는 30~35세. 발밑에서 발견된 고무신은 잿빛으로 말랐다. 딱딱하게 굳은 흙 속에 파묻힌 바스라진 발가락뼈는 화석처럼 보였다. 시신 주변에 탄피도 흩어졌다. 이 남자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증거였다.


“참혹하네.”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두개골 사이로 나온 잔뿌리를 잘라내며 탄식했다. 그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단장이다. 지난 10월10일 세종시 연기면 산울리 야산의 은고개 지역 발굴 현장을 찾았다. 조사단은 7구의 유해를 땅속에서 파냈다. 한국전쟁 시기 국군과 경찰이 사용하던 M1과 카빈 소총의 총탄(탄피와 탄두 등) 59점이 나왔다. 신발류 81점도 찾았다.

 

▲ 208명의 시신이 발견된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 폐금광에서 나온 어린아이의 치아(왼쪽)와 부위별 유해 사진.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제공


매장지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도로 공사 현장의 한가운데 있었다. 1950년 7월 ‘연기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벌어진 곳이다. 2008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 “연기지역 주민 100여명이 국민보도연맹원으로 예비검속돼 조치원경찰서에 불법 구금된 후 이곳으로 끌려와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총살된 유해 매장 추정지”라며 이곳에 표지판을 세웠다. 10년 만에 대규모 공사 진행을 위해 발굴이 시작됐다. 유해는 발굴되지 않았다면 도로 공사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다.


한국전쟁 전후 벌어진 민간인 학살 매장지는 전국에 퍼져 있다. 2007년 6월 진실화해위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유해 매장 추정지 조사용역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용역 조사를 한 168곳의 매장 추정지 중 유해발굴이 가능한 곳으로 59곳이 꼽혔다.


2010년 6월 해산한 1기 진실화해위는 10개 지역 13개 지점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이곳에서만 1617구의 유해와 5600여점의 유품이 발견됐다. 이후 국가 차원의 발굴 조사는 8년간 없었다. 억울한 죽임을 당한 유해들이 학살 자행 70년이 되도록 땅속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말이다.

 

▲ 지난 10월10일 세종시 연기면 산울리 야산의 은고개에서 발굴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의 고무신. 이곳은 1950년 7월 ‘연기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된 민간인들이 집단으로 매장된 곳이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공동조사단에 참여하는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한국 땅 전체가 공동묘지”라고 표현했다. 땅을 파면 어김없이 참혹한 학살 현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 2월부터 약 한 달간 진행된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 폐금광의 유해발굴 현장에서는 유독 여성과 어린이의 유해가 많이 나왔다.


1950년 9월부터 1951년 1·4후퇴 시기까지, 온양읍과 아산군 일대에서 군과 경찰이 좌익 관련자나 부역 혐의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감금했다가 끌고 와 총살했다. 시신이 넘쳐났다. 마을 주민들은 개들이 사람 뼈를 물고 돌아다녔고, 아이들이 두개골을 발로 차며 놀았다고 증언했다.


이곳에서 최소 208명의 유해가 발견됐다. 유해발굴 자리를 다시 파면 또 다른 유골이 나왔다. 총으로 쏘아 죽인 시신 위에 다시 사람들을 끌고 와 죽였기 때문이다. 성인 여성으로 확인된 것은 68구로, 남성(19구)보다 많았다. 12세 미만 어린아이는 58구였고, 6세 미만도 9구가 나왔다. 설화산 매장지(아산시 배방읍 중리 산86-1번지 일대)에선 아이의 갈비뼈가 많이 발굴됐다. 훼손이 잘 되는 어린아이의 뼈가 형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가 두꺼운 옷이나 포대기로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죽었기 때문이다. 유해 주변에서 발견된 군경의 총탄은 범인을 분명하게 가리켰다.


아파트 단지·도로 등 공사
묻힐 뻔한 추정지 추가 조사


진실화해위에서 유해발굴을 담당한 노용석 부경대 교수는 “전국에 매장지가 없는 곳이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실제 민간인 학살 매장지는 3배 이상 많다”고 말했다. 노 교수는 “진실화해위에서 한 유해발굴 추정지 조사용역은 수집된 증언을 기초로 꼽은 전국의 168곳 매장 추정지에 대해 지표조사를 벌인 것뿐”이라며 “1억원도 안되는 사업비로 6개월가량의 짧은 기간 동안 진행해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사를 마친 뒤 새로 발견한 매장 추정지만 20곳이 넘는다”고 말했다. 실제 매장지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란 얘기다.

 


학살 규명 신청만 7900여건
“국가가 나서 유골 수습해야”


1기 진실화해위가 활동한 기간 동안 7900여건의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신청이 들어왔고, 1만6000여명이 희생자로 확인됐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최소치다. 유족회는 100만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했다고 주장한다.


학살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국가 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제대로 된 매장 절차 없이 맞은 비정상적인 죽음이 대부분이다.


노 교수는 가해자였던 국가가 나서 전국에 묻힌 학살 피해자들의 유골을 수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가에 의해 죽임당한 이들을 발굴하는 것도,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사람들을 찾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며 “유해발굴은 이 죽음을 정상적으로 되돌려 놓는 작업이고, 단순히 유가족을 위한 것이 아닌 사회적인 위령과 화해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아무리 민주적인 정부라도 국가 폭력에 의해 죽은 사람을 국가가 나서서 발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이 이런 일에 솔선수범한다는 것은 인권 국가로 도약하고 그 위상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이 산이 전부 아버지 무덤이라 여겨요”

     김장호 아산유족회장

 

▲ 김장호 유족회장이 충남 아산시 탕정면 용두리의 한 야산에서 유해가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현진 기자

 


 

아버지 끌려가고 집안 몰락
‘부역 혐의자’ 자식 꼬리표
유골 찾아 장례 치르기 소원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 김장호 아산유족회장(76)은 2012년 4월 등산가방을 메고 야산에 올랐다. 충남 아산시 탕정면 용두리 농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다. 이곳에 오른 건 처음이었다. 가방엔 소주와 호미가 하나씩 들어있었다.

 

1950년 10월9일 김 회장의 아버지는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이 야산으로 끌려와 총에 맞아 숨졌다. 아버지 나이 39세 때였다. 김 회장은 매장 추정지를 호미로 파헤쳐 보다가 소주를 뿌리고 바닥에 절했다. 이 산이 전부 아버지 무덤이라고 여겼다.
 
김 회장의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 김 회장은 “다음날 탕정 지서(파출소)에 삼촌이 면회를 갔는데 아버지가 많이 맞아서 한쪽 눈알이 빠져 나올 것처럼 부어있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면회를 하고 온 날 밤 지서 뒤편 야산에서 총성이 울렸다. 10살도 채 안된 어린 나이였지만, 김 회장은 68년 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통곡하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지난달 8일에도 김 회장은 나뭇가지를 헤치며 길 없는 야산을 다시 올랐다. 김 회장은 사전조사를 위해 찾은 유해발굴 공동조사단과 아산시 관계자를 마을 주민이 지목한 유해 매장 추정지로 안내했다. 김 회장은 낙엽이 떨어지고 잎사귀가 무성해져 혹시라도 흔적을 찾지 못할까봐 공사장에서 쓰는 띠를 구해다 ‘주변’이라고 크게 적어둔 나무에 묶어뒀다.

 

김 회장은 이날 경향신문과 만나 “아산 지역에서 부역 혐의로 숨진 피해자가 적어도 800명이 넘는다. 돌도 채 안된 아이도 죽였다”고 말했다. 1950년 9월28일 서울을 수복한 국군은 인민군이 점령했던 전국의 마을 곳곳에서 ‘부역 혐의자’라는 이유로 아무런 절차 없이 학살을 벌였다. 당시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는 정확한 숫자를 헤아리기 불가능할 정도로 많다. 그때 어린 소년, 소녀였던 유족들은 이제 학살당한 부모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고령의 노인이 되었다.

 

김 회장의 증조할아버지는 중국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주원이다. 집을 판 돈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댔고, 이 공로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대한제국 정객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김 회장은 풍족하진 않지만 부족하지 않은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학살로, 어머니는 지병으로 돌아가신 뒤 집안은 완전히 몰락했다. 조부모 밑에서 힘겹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 꿈을 묻자 김 회장은 “아버지가 나를 육사에 보내고 싶어 하셨던 기억이 난다”며 눈물을 닦았다.

 

김 회장이 진상규명에 나선 건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출범하면서부터다. 그에게는 ‘부역 혐의자’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계속 따라다녔고 회사생활을 할 때도 신원조사를 당했다. 진실화해위에 진상규명을 신청한 뒤에야 억울한 죽음과 잔혹한 학살의 피해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제서야 김 회장은 가족들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할 용기가 생겼다. 수십년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건, 가족들에게도 피해가 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제 소원은 아버지 유골을 찾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올해 초에는 아버지의 유해를 찾는 심정으로 아산시 배방면 설화산 폐광의 유해발굴 작업에 손을 보탰다. 발굴 기간 내내 직접 땅을 파고 유골이 나오면 솔을 이용해 조심스레 흙을 털어냈다. 귀가 먹먹했다. 어린아이의 뼈가 나올 때는 울컥했다. 가해자들이 살아있다면 어떻게든 끌고 나와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었다.

 

 

경향신문 전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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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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