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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의 인물탐구]서영해 문서 발굴 역사가 정상천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12. 19.

2월 출간예정작,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외교로 조선의 독립을 알리다>를 집필하신 정상천 박사의 서영해 인물과 발굴과정에 대해 16일 <경향신문>에 실렸습니다. 


기사에는 출판사와 책 이름이 없네요. 그렇지만 저자는 확실합니다! 사진이 근사해서 저자분께 칭찬을 듬뿍했습니다. 


발굴되지 않은 서영해 선생의 자료를 성실하게 수집하신 정상천 박사의 열정적인 집필 과정을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서영해 문서 발굴 역사가 정상천 “남로당 선전 목적으로 제주 4·3에 개입했다”




역사의 씨줄과 날줄을 하나하나 엮어 나가다 보면 ‘의외의’ 사실이 발견되기도 한다. 주말에만 역사공부를 한다고 해서 스스로 ‘일요일 역사가’를 자처하는 공무원이 있다.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상천 운영지원과장(55)은 현직 공무원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프랑스 통상관계사로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아마추어를 넘는 거의 프로 수준의 역사학자다.

■파리대학 박사학위 받은 현직 공무원 

그는 파리에서 논문 준비를 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행서 서영해를 알고, 그를 연구하다 최근 중요한 사진 하나를 발굴했다. 1938년 5월 7일 중국 장사에서 백범 김구가 일제 밀정에게 피격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독립운동사에 ‘남목청 사건’으로 기록되고 <백범일지>에도 중요하게 언급된 사건이다. 정 과장은 이 사건으로 심장에 총을 맞은 백범이 병원에서 치료받고 거의 완치된 사진을 발굴했다. 

-사진을 어떻게 발굴했는가. 

“서영해 부인으로 경남여고 교장을 지낸 황순조 여사가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앨범과 편지를 1986년 국어를 가르치던 류영남 선생에게 남겼다. 류 선생은 이를 경남여고 도서관에 넘겼는데, 최근 부산시립박물관으로 이관됐다. 부산시립박물관에서 서영해 자료를 찾던 중 발견했다.”

-앨범에는 다른 사진도 있나. 

“서영해의 파리 유학시절 사진이 많고, 파리 언론학교 재학시절 사진도 있다. 이승만과 같이 찍은 사진 원본, 백범 김구와 찍은 사진 원본 등이 있다.” 

-기증 자료 목록에는 서영해가 백범·조소앙 등과 나눈 서신도 많다.

“서영해가 백범 김구에게 보낸 편지, 조소앙 선생에게 보낸 편지, 조소앙이 ‘서영해 동지 앞’이라고 보낸 편지, 이동녕·김구·조완구·조소앙·김창숙 등이 서영해 선생 태감(台鑑·‘살펴 보소서’라는 의미) 등의 편지가 있다.” 

기증 목록에는 2005년 기자가 쓴 ‘다시 쓰는 독립운동 열전 Ⅴ-3 서영해 파리대사의 외교 투쟁’ (<경향신문> 2005년 4월 18일자), ‘광복 70주년 특별기획-수지의 뿌리찾기 아리랑 “독립운동가 서영해 손녀 찾았다”(<주간경향> 2015년 8월 18일자) 스크랩도 포함돼 있다. 부산시립박물관 이해련 학예연구실장은 “이 사진이 앨범에 붙어 있어 사진 뒷면에 혹시 무슨 글이 쓰여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면서 “연말쯤 기증한 자료 정리가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자료에서 압권은 바로 남목청 사건으로 쓰러진 백범이 중국 상아병원에서 한 달여 치료를 받고 거의 완치한 사진이다. 우리 국민들은 백범이 안두희의 총에 맞아 숨져 누워 있는 사진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이 사진은 백범이 총탄자국이 확연한 가슴을 열고 당당히 앉아 있는 사진이다. 백범기념관 자료실장을 지낸 홍소연 임시정부기념관건립추진위 자료실장은 “<백범일지>에 글로만 기록된 사실을 사진으로 확인시켜준 충격적인 사진으로 백범기념관에도 없는 최초 발굴 사진”이라고 말했다. 

1938년 중국 장사 상아병원에서 가슴에 총을 맞고 거의 한 달 만에 살아난 백범이 의사와 기념촬영을 했다.

1938년 중국 장사 상아병원에서 가슴에 총을 맞고 거의 한 달 만에 살아난 백범이 의사와 기념촬영을 했다.

■백범기념관에도 없는 귀중한 사료 

<백범일지>에는 “소생할 가망이 없어 보이자 의사들은 백범에 대해 응급처지도 하지 않은 채 문간방에 놓아두고 장남 인과 안공근에게 사망소식을 알리는 전보를 쳤다. 그러나 4시간이 지나도 백범이 살아있자 의사들이 백범을 치료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 실장은 또 “심장에 총을 맞고도 당당하게 살아난 백범 모습이 해방 후 공개되지 않을 리 없었을 것”이라면서 “아마 당시 사진을 찍어 곧장 파리에 있는 서영해에게 보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즈음 서영해는 1936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비난하는 기고를 하는 등 파리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일 때다. 따라서 백범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릴 필요 때문에 임정이 사진을 찍어 파리 서영해에게 보냈을 수 있다. 

남목청 사건은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38년 5월 7일 장사 조선혁명당 본부에서 한국국민당 김구와 조완구, 조선혁명당 이청천과 현익철·유동열, (재건)한국독립당 조소앙과 홍진 등 3당 대표가 통합회의를 열었다. 이에 조선혁명당원 이운한이 회의 중인 3당 대표를 권총으로 쏜 것이다. 현장에서 현익철은 사망하고, 김구는 가슴에 총을 맞고 상아병원으로 긴급 이송되고, 유동열은 중상, 이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김구는 총알이 심장 바로 앞에서 멈춰 <백범일지>처럼 극적으로 살아났다. 당시 중국 국민당 장개석은 백범 피격 소식을 듣고 친서와 치료비를 보내는 등 각별한 관심을 표시했다. 백범은 이 사건 이후 임정 국무회의에서 내무·국방·외교 등 전권을 쥐는 주석으로 선출됐다. 

이 남목청 사건은 지금까지 우리 독립운동 세력 간 파벌 다툼으로 이해됐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일제 기밀문서에 의하면 일제의 밀정공작에 의한 것임이 드러났다. 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일제가 상해에 파견한 경찰 히토스키 도헤이(一杉藤平)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 보낸 ‘대 김구 특종공작 보고서’를 발굴했다. 이에 따르면 일제는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세 차례나 백범 암살을 실행했고, 마지막 백범의 특무대장 박창세를 아들을 통해 회유하고, 박창세는 이운환을 꾀어 암살을 실행한 것으로 드러났다.(<동아일보> 2018년 3월 21일자)

정 과장은 또 하나 의미 있는 사료를 발굴했다. 서영해가 1948년 12월 1일 프랑스 외무부 아주국장을 면담한 보고서다. 당시 국내에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이에 반대하는 김구가 대립하고 있었다. 1948년 9월 21일 파리에서 열리는 제3차 유엔총회를 앞두고,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장면을 수석대표로 해 장기영·모윤숙을 파견했다. 이에 김구는 8월 1일 김규식을 단장으로 ‘통일독립촉진회’를 조직하고 서영해를 파리에 파견했다. 그러나 서영해는 상해에서 사회주의자로 몰려 중국 국민당 정부에 체포됐다. 이에 따라 사학계에서는 서영해가 파리에 가지 못했다는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이 문건 발굴로 서영해는 뒤늦게나마 파리에 도착한 것이 드러났다. 프랑스 외무부 아주국장의 문건에는 서영해는 “김구는 격렬하게 한국의 통일을 추구하며, 전력을 다해 미국과 소련 군대의 철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평양회의(남북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회 연석회의)에 간 것은 김구의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 문건에는 제주 4·3사건에 대한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서영해는 “소요사태는 미국이 과거 행정체제와 친일 경찰들을 유지하려는 것에 반발하는 애국자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면서 “당초 이 폭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선전 목적 필요성에 의해 신속하게 이 사태에 개입했다”고 언급돼 있다. 이는 제주 4·3사건을 촉발한 계기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라는 관점과 다른, 주목할 기록이다. 

사진과 문건을 발굴한 정 과장은 1963년 경북 경주 출신으로 경북대 사대 불어교육과를 나왔다. 1989년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에서 7급 공무원 생활을 시작, 1998년 통상분야가 외교부에 통합되면서 외교통상부로 옮겼다. 그의 관심은 독립운동사가 아닌 한불 통상관계사였다. 정 과장은 “2000년 휴직하고 1년간 프랑스 외교부 자료실을 출퇴근하다시피 하면서 자료를 복사했다”면서 “1945년 1월 21일 프랑스 외무부가 중국 중경에 있는 프랑스대사관에 보낸 전문 ‘서영해로부터 온 아래 메시지를 조소앙 선생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Agree Safety(안전하다)’라는 문서에 첨부된 서영해의 명함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가 서영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다. 명함은 ‘대한민국 임정 주프랑스 대표 서영해’라고 돼 있다. 

서영해와 프랑스 외무부 아주국장 면담 결과를 기록한 문서.

서영해와 프랑스 외무부 아주국장 면담 결과를 기록한 문서. 

■서영해 자료 모아 책으로 펴낼 계획 

그는 ‘1886~1910년 한·불 통상관계가 미약했던 원인에 대한 역사적 고찰’(2004년), ‘파리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 설립(1968)에 관한 연구’ 등의 논문과 대중서로 <나폴레옹도 모르는 한-프랑스 이야기>(2013년)를 썼다. 이 책에는 서영해에 대한 개략적인 언급과 프랑스 최고 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 고종이라는 점, 1972년 이수영 주불대사의 의문의 죽음 등이 언급돼 있다.

정 과장은 자신이 모은 서영해 자료를 곧 책으로 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학창생활에 대한 서영해 자필 기록도 부록으로 첨부된다. 정 과장은 “<경향신문>이 쓴 서영해 기사를 책에 많이 인용했다”면서 “연구는 선행연구의 축적으로 이뤄지는데 <경향신문>의 선행연구 보도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서영해(1902~?)는 17세에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 경찰을 피해 상해 임정을 찾았으나 김규식은 어린 그를 프랑스로 보내 공부하게 했다. 프랑스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서영해는 1929년 <고려통신사>를 설립하고, 주불외교행서(대사 격)로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흥부와 놀부’ ‘나무꾼과 선녀’ 등 한국 민담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유럽에 소개하고, 1937년 파리에 유학 온 오스트리아 여성 엘리자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 통에 헤어졌다. 서영해는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한국과 중국, 프랑스 등 유럽, 심지어 아프리카 이집트, 에티오피아까지 당시로서는 매우 독특하게 ‘세계적’ 공간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서영해는 해방 후 연세대 등에서 불어를 가르치며 김구와 함께 서울과 평양, 그리고 다시 프랑스를 오갔다. 그러나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되자 서영해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한국의 아내는 평생 그를 기다렸지만 서영해는 1956년 중국 상해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일설에는 북으로 갔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전언일 뿐이다. 정 과장은 “통일부를 통해 북의 자료를 찾았지만 북에서 서영해 행적은 없었다”면서 “서영해는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은 서구화된 사람으로 북에서 살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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