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준 여성들의 시간을 되짚다
한국 사회 페미니즘을 진단하는 연구자 손희정은 3년 전 저서에서 지금의 시대정신을 `페미니즘 리부트(reboot)`로 정의했다. 2015년을 전후로 재정의되기 시작한 페미니즘을 압축하는 단어였다. 이후 5년, 문학계도 화답하듯이 여성 작가들의 서사가 주류를 이뤘다. 올해 6월 이후 출간된 여성 소설가의 신작만 10권이 넘는다.
2020년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 젊은 여성 작가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김성중 단편집 `에디 혹은 애슐리`(창비)부터 눈길을 잡는다. 수록된 단편 `상속`이 압권이다. 창작 아카데미에서 소설을 가르치던 20대 선생에게 뇌종양이 발병하자 40대 여성 기주는 간병을 자처한다. 기주에게 우연한 돌파구였던 소설은 그의 모든 것을 바꿨다. 섬망에 빠진 선생은 기주에게 책을 물려주지만 기주의 글은 진척이 없다. 10년쯤 지나 기주는 암에 걸린다. 찬란한 명저를 생의 마지막으로 읽으며 밑줄을 긋던 기주는 아카데미 동기 선영에게 책을 소포로 전달한다. 유한한 인간의 운명 속에서 사라질 것과 영속적일 것의 관계를 소설은 이야기한다.
손보미 장편 `작은 동네`(문학과지성사)는 기억과 망각의 인간을 묻는 작품이다. 죽기 전의 엄마는 `나`에게 유년 시절 살던 작은 동네에 관한 얘기를 전했다. 명확하게 기억되는 동네와 `나`가 확인하게 되는 공간은 다르다. 비밀스러운 추리극 같던 소설은 한 번의 화재사건과 기억 속 한 사람을 끄집어낸다. 망각 앞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지를 묻는 묵직한 소설이다.
정세랑 장편 `시선으로부터,`(문학동네)는 큭큭 대는 문장으로 열리지만 여성이 처한 위치를 돌아보게 만든다. 엄마의 제사를 하와이에서 치르려는 딸들의 서사다. 전쟁을 겪고 하와이에서 새 삶을 살았던 여성 예술가인 엄마는 생전에 TV에서 "큰딸에게 나 죽고 절대 제사 지낼 생각일랑 말라고 해놨습니다"라는 진보적 발언으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딸들은 과연 무사히 제사를 마칠까. 엄마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강화길 단편집 `화이트 호스`(문학동네)에서는 단편 `음복`부터 펼치게 된다. 결혼 3개월 뒤 시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한 `나`는 사사건건 긴장을 유발하는 남편 고모가 내내 불편하다. 정작 고모가 꾸짖는 `나`의 남편은 무표정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무관심하다. 순간 `나`는 시댁 내력을 간파한다. 진짜 악역은 목청 큰 고모가 아니었다. "여성들의 희생을 통해 무지할 수 있는 권력을 대가 없이 승계받는" 남편이 악역이었다. 남성의 음복(飮福) 이면에서 목소리를 상실한 여성이 있었음을 소설은 밝힌다.
한정현 단편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민음사)는 20세기 여성을 4대에 걸쳐 바라본다. 경성 최고 권번을 졸업한 만신 유순옥, 모친에 이어 대무녀가 된 아들 희, 여성 국극배우가 된 주희, 주희의 조카로 서울대 시위 중 사망한 트렌스젠더 제인까지 `퀴어·여성·예술` 노동자의 시간을 되짚는다. 해녀들의 `숨비소리`를 환기하는 장면의 대사 "살아남은 여성들에겐 숨소리뿐인가 봐"는 한국 여성을 응축한다.
이수경의 `자연사박물관`(도서출판 강) 표제작은 잔혹한 삶의 여러 정면을 들여다본다. 부부가 도착한 자연사박물관에는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져가고 있는 것들"이 전시돼 있다. 소설 안에 전시된 것은 박물관 유리창 밖에 만연한 인간의 불행 같다. 황모과 SF단편집 `밤의 얼굴들`(허블)의 수록작 `모멘트 아케이드`는 전율의 반전을 선사한다.
삶의 모든 순간을 데이터화해 매매하는 모멘트 아케이드가 배경이다. 치매를 앓는 엄마를 혼자 간호하던 `나`는 자신을 버린 언니의 기억에 접속한다. 육체를 상실한 기억은 어디로 가는가란 질문을 건넨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인간의 무력을 그린 박유리 장편 `은희`(한겨레출판), 기자 `륜`의 추적을 통해 진실을 어떻게 정의할지 고민하는 황경란 단편집 `사람들`(산지니), 불안의 미궁을 도도히 추적하는 시(詩)같은 소설들이 꽉 찬 허희정 단편집 `실패한 여름휴가`(문학과지성사) 등도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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