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던 홍콩은 과연 사라졌을까
홍콩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다
『사라진 홍콩』
우리가 ‘홍콩’이라 불렀던 것들의 시작과 끝에 대하여
아시아총서 46 ▏류영하 지음
책 소개
당신이 알고 있던 홍콩은 사라졌다.
우리가 기억하는 ‘홍콩’의 시작과 끝을 찾아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홍콩’은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형성되어 왔을까. 홍콩 사회와 홍콩인 정체성 형성에 관심을 두고 30여 년간 홍콩을 연구해온 류영하 교수는 1840년 아편전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홍콩의 정체성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정리한다. 『사라진 홍콩』을 통해 중국과 홍콩의 정체성은 각기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왜 두 정체성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지, 두 나라 간 갈등의 해법은 있는지 모색해보고자 한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영국의 통치 아래 만들어진 홍콩의 역사는 1997년 중국으로의 주권 반환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2020년 6월 발효된 홍콩보안법으로 홍콩 역사는 한 번 더 나누어진다. 홍콩보안법 발효는 중국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홍콩을 납작하게 만든 신의 한 수였고, 홍콩 입장에서는 통한의 한 수였다. 홍콩보안법 발효 이후 홍콩의 인구 감소와 두뇌 유출 현상이 심화되고 있으며 ‘외국 세력과의 결탁’이라는 죄목으로 활동가들이 체포되고, 인문학 관련 세미나들이 사라졌으며, 홍콩 정체성을 다룬 책의 출판은 중지되었다.
그 시절 우리를 매혹했던 애매함과 남다름의 홍콩 정체성
‘제3공간.’ 홍콩의 정체성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개념이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공간, 누구도 누구에게 사상이나 이념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며 선택하라고 강요받지 않는 공간. 홍콩이야말로 아시아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곳이라고 여겨졌다. 아편전쟁 발발 이전까지만 해도 인구 8천 명 정도의 어촌이었던 홍콩은 1842년부터 1997년까지 155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일본의 통치 3년 8개월 포함) 시절을 지나며 ‘남다른’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홍콩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특성이 공존하는 곳이었고, 홍콩인들의 사고방식 역시 혼종적으로 만들어졌다. 홍콩 특유의 애매함과 남다름은 많은 사람들에게 홍콩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했다.
그러나 중국으로의 주권 반환을 기점으로 홍콩인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나아가서 더 이상 애매한 공간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의지가 점점 강해졌다. 그러나 애매한 공간에 두지 않으려는 중국의 의지 역시 강했다. 중국은 중국대로 홍콩의 ‘분명함’을 원했고, 홍콩 역시 자신의 ‘남다름’ 즉 정체성을 인정해달라는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중국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의식으로 철저하게 무장된 중국인, 영국식 자유를 맛보고 스스로 ‘영국인’이라고 생각한 홍콩인의 갈등은 예견된 일이었다. 중국과 홍콩은 서로를 모르고 있었고, 알려고 하는 노력도 부족했다.
집단기억이 만들어낸 오늘날 홍콩인 정체성
저자는 『사라진 홍콩』에서 오늘날 홍콩인 정체성이 몇 가지 주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지나며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 사건들에 대한 ‘집단기억’이 중국과 구별되는 홍콩인의 정체성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홍콩인 정체성이라 부르는 것들은 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1950년, 60년대 대륙에서 벌어지는 살벌한 정치 운동을 바라보는 홍콩인들에게 정치적인 안정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홍콩의 소중함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홍콩(영국)정부는 중국 전통문화를 존중하면서도 서구의 대표적인 가치인 자유와 법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홍콩(중국)인을 통치했다.
1925년 상하이에서 발생한 530참안으로 파생된 홍콩 대파업이 장기간 지속되자 파업에 반대하는 흐름이 생겼고 이는 강고한 중화민족 정체성에서 이탈하여 식민 주체인 홍콩정부와 일체가 되는 홍콩인 정체성을 확인시켰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발생한 67폭동에서 과격해지는 좌파 시위를 목격한 홍콩인들은 보수화되었고, 탈중국화 정체성이 견고해졌다. 1989년 천안문사건은 문화대혁명에 이어 중국으로부터 홍콩이 완전히 이탈하게 된 사건으로 홍콩인들의 집단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 집단기억은 오늘날 대륙 중국과는 구별되는 홍콩인 정체성을 만들게 된다.
주권 반환 그 이후, 홍콩 사회와 홍콩인은 변화하고 있다.
아니,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민주는 없고 자유만 있는 사회, 그것이 바로 홍콩식 자유였다. 정부의 규제와 간섭을 배제하고 민간에게 맡기는 불간섭주의로 돌아가던 홍콩 사회에서 1997년 이후 행정을 지배하는 것은 정치라는 사실이 새삼 확인되었다. 중국 정부는 중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만이 홍콩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2021년 4월부터 충성 서약을 거부한 129명의 공무원에 대한 해임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홍콩의 학교 수업에서는 정치적인 노래, 무용, 구호 등이 허용되지 않는 홍콩교육법(1971년)이 공포되어 교육이 정치로부터의 자유를 보장받았었다. 현재 홍콩 사회를 이끌어가는 두뇌는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주권 반환 이후 홍콩인들은 텔레비전 뉴스를 시청하기에 앞서 ‘마음과 조국은 하나’라는 국가홍보영상을 시청해야 했으며 2015년 중국 정부는 ‘국가 안전 교육일’을 제정했다. 2021년부터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국가안보에 대한 교육을 받는 등 홍콩인들의 두뇌는 완전히 다른 교육 환경에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산운동 그 이후, 이제 홍콩은 어디로 가는가.
‘사라진 홍콩, 새롭게 만들어지는 홍콩’ 그 길목에 서서 역사를 돌아보다
주권반환 2년 뒤부터 홍콩인들의 불만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1999년부터 시작된 시위는 2003년 보안법 입법 반대 시위, 2004년 보통선거 요구 시위, 2015년 중국의 밀수꾼을 반대하는 게릴라 시위, 2016년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일어난 ‘어묵혁명’ 등으로 이어지며 홍콩의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결집시켰다. 2014년 직접선거 쟁취를 위해 홍콩 도심을 점령한 ‘우산 운동’이 79일간 전개되었고, 2018년 대만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에서 촉발된 송환법 반대 시위로 홍콩 시민 2백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 이 시위에서는 송환법 반대와 함께 홍콩의 민주화를 요구되었고, 정부가 송환법을 공식 철회했음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2020년 초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사태는 홍콩 민주화운동에도 영향을 미쳤고, 2020년 6월 중국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홍콩특별행정구 국가보안법을 공포했다. 홍콩 역사는 2020년 6월 30일을 기준으로 다시 나누어진다. 그날 이후 홍콩에서 정치적 시위는 사라졌고, sns에서조차 홍콩인들은 조용하다.
중국은 홍콩을 확고한 중국 정체성으로 포섭하기 위해, 홍콩은 자기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요지부동인 중국 정체성에 비해 홍콩 정체성은 더욱 빠른 속도로 분화되어갔다. 홍콩은 이제 망한 것인가? 분명한 건 우리가 알던 ‘홍콩’은 사라졌다. 하지만 아편전쟁 이후 새로운 홍콩의 역사가 시작되었듯, 어쩌면 이전에 없던 새로운 홍콩이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책 속으로
p.31 홍콩섬(香港島)은 1800년대 중엽인 아편전쟁 발발 이전까지만 해도 매우 애매한 곳이었다. 홍콩을 표현할 때 ‘애매한 신세’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뚜렷한 정체성이 없다는 말이다. 당시 홍콩섬은 중앙정부 통제권이 미치기도 하고, 해적들이 드나드는 곳이기도 한 인구 8천 명 정도의 어촌이었다. 그런 홍콩섬을 제국주의 영국이 주목했다. 홍콩섬과 주룽반도(九龍半島)가 얼마나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인지는 동남아시아 지도나 세계지도를 놓고 들여다보면 바로 알 수 있다.
홍콩섬은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관문임과 동시에 태평양을 향하는 길목이다. 나아가서 유럽,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의 해운을 연결하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광둥성(廣東省)의 젖줄인 주강(珠江)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 중국 내륙으로 진출이 쉽다. 게다가 황해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목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핵심 정책인 세계를 띠(帶) 하나와 길(路) 하나로 연결하자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의 그림이 그대로 보이는 곳이다.
홍콩섬은 수심이 깊어 큰 배가 정박하기 좋은 천혜 항구였다. 일찍이 바다를 오가는 세계인들에게 생필품을 보급하는 보급기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홍콩은 아편전쟁으로 ‘역사 전면에 등장’했다. 아니,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고 일반적으로 서술된다. _1장 「아편과 전쟁과 역사」
p.100-101 홍콩인들이 지금까지 영국 통치에 대해 연연해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교육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1971년에 공포된 홍콩 교육법에 의하면 수업이나 관련 활동에는 정치적인 노래, 무용, 구호 등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법은 정치교육을 하지 않겠다는 홍콩 정부의 의지를 더욱 추동했다. 교육이 정치로부터의 자유를 보장받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학문의 자유일 것이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학문의 자유는 사회 발전으로 이어졌다. 홍콩인들 두뇌(유전자)는 이런 환경에서 성장했던 것이다. (…)
하지만 1997년 중국으로 주권이 반환될 즈음부터 국가와 민족은 홍콩인 두뇌를 향해 시시각각 도발해 오기 시작했다. ‘국민교육센터’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는데, 그즈음부터 홍콩인들은 텔레비전 뉴스에 앞서 ‘마음은 조국과 하나’라는 ‘국가홍보영상’을 보아야 한다. 2015년 중국 정부는 ‘국가 안전 교육일’을 제정했다. 매년 4월 15일 홍콩에서도 교육국과 보안국이 주축이 되어 강연과 전시 등 각종 활동을 전개한다. 2021년부터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국가안보에 대해서 교육을 받는 등 이제 그들 두뇌는 완전히 다른 (교육) 환경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두뇌(유전자) 구조도 다시 만들어질 것이다. _5장 「체제와 교육」
p.192-193 문화대혁명에 이어서 홍콩인들의 마음은 다시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이탈되었다. 홍콩이라는 정체성이 다시 힘을 얻었다. 홍콩에서 중국공산당이라는 어휘는 금기시되었다. 홍콩인들의 두뇌에 ‘너희 중국’은 독재, 잔혹, 야만으로, ‘우리 홍콩’은 민주, 인도, 문명이라는 이분법이 자리 잡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집단기억’에는 반드시 타자가 등장한다. 타자화는 ‘미워하기’와 ‘구분 짓기’, ‘편 가르기’라고 할 수 있다. 타자는 나와 ‘더불어 같이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
천안문광장에서의 유혈진압에 대한 집단기억은 홍콩인 정체성을 구성하는 첫 번째 요인인지도 모른다. 시기적으로나 규모 면에서 홍콩인들에게는 그만큼 큰 충격으로 와닿았다. 홍콩인들 유전자에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공산당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를 확인하고 다시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홍콩인들은 공황에 빠졌다. 주가지수와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다. ‘너는 어떻게 할래?’라는 말이 서로의 인사가 되었다. ‘64천안문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9년에만 4만 명이, 다음 해인 1990년에는 6만 5천 명(홍콩 인구의 1%)이 홍콩을 떠났다. 홍콩의 정체성이 다시 전환되고 재편되고 있었다. _11장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
p.352-353 ‘중국-홍콩 체제’는 전근대와 근대, 다수와 소수, 특수성과 보편성의 대립구조이기도 하다. 어쩌면 모든 갈등이 근대와 전근대라는 도식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홍콩이 민주와 과학으로 무장하고 있다면, 중국은 국가와 민족을 앞세운다. 중국이 여전히 국가나 민족 이데올로기를 숭상한다면, 홍콩은 말끝마다 합리성을 내세우는 정체성이다. 중국 정부는 중국적인 정체성을 주입해야 문제 해결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중국은 홍콩을 향해 국가와 민족 이데올로기 주입에 총력을 기울였다. 홍콩인들을 빠른 시간 내에 국민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중국과 홍콩이라는 정체성은 다시 작은 정체성으로 나누어진다. 중국에도 홍콩에도 각각 여러 개의 작은 정체성이 있다. 즉 작은 정체성들이 모여서 큰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중국과 홍콩은 각각 작은 정체성들의 총합이다. 그 작은 정체성들의 변화는 큰 정체성의 변화와 직결되며, 큰 정체성은 다시 작은 정체성에 영향을 준다.
책 앞에서부터 살펴보아 왔듯이 정체성은 외부의 충격 또는 내부의 갈등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한다. 1997년 주권 반환 이후 ‘중국-홍콩 체제’는 수많은 갈등을 보여주었다. 중국은 홍콩을 확고한 중국 정체성으로 포섭하기 위해, 홍콩은 자기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요지부동인 중국 정체성에 비해 홍콩 정체성은 더욱 빠른 속도로 분화되어갔다. 홍콩 정체성의 역사가 생성, 분화, 재조립되듯이, 정체성으로 보면 망하는 역사는 없다. 역사는 부단히 재편되고 재조립될 뿐이다. _「에필로그」
저자 소개
류영하(柳泳夏)
백석대학교 중국어학 전공 교수. 한국에서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홍콩에서 중국현대문학이론 전공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대만대학(國立台灣大學) 인문사회고등연구원과 미국 UC버클리 중국학센터 방문학자를 경험했고, 중화민국 정부 초청으로 국립칭화대학(國立清華大學) 대만문학연구소(대학원)에서 한 학기 동안 강의했다. 저서로 『대만 산책』, 『방법으로서의 중국-홍콩체제』, 『홍콩 산책』(문학나눔 우수문학도서), 『香港弱化-以香港歷史博物館的敘事為中心』, 『중국 민족주의와 홍콩 본토주의』, 『홍콩-천 가지 표정의 도시』, 『이미지로 읽는 중화인민공화국』(문화부 우수교양도서), 『홍콩이라는 문화 공간』(문화부 우수학술도서) 등이 있으며, 역서로 『포스트 문화대혁명』, 『상하이에서 부치는 편지』 등이 있고, 편저로 『중국 백년 산문선』 등이 있다. 그 외 논문 30여 편을 발표했다.
차례
프롤로그
1장 아편과 전쟁과 역사
2장 주권 이양인가? 반환인가?
3장 영국의 홍콩
4장 영국인과 홍콩인
5장 체제와 교육
6장 지역 공동체 홍콩의 등장
7장 일본의 통치
8장 문화대혁명과 홍콩
9장 ‘홍콩은 우리 집’
10장 일국양제(一國兩制)
11장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
12장 정체성이란?
13장 정체성 충돌
14장 다시 국민 만들기
15장 정체성 재조립
에필로그
참고문헌
사라진 홍콩: 우리가 ‘홍콩’이라 불렀던 것들의 시작과 끝에 대하여
[아시아총서46]
류영하 지음|368쪽|979-11-6861-169-6 03910
25,800원|2023년 09월 15일
역사 > 중국사 > 중국근현대사(아편전쟁 이후)
인문학 > 문화/문화이론 > 중국문화
사회과학 > 정치학/외교학> 정치사 > 아시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홍콩’은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형성되어 왔을까. 홍콩 사회와 홍콩인 정체성 형성에 관심을 두고 30여 년간 홍콩을 연구해온 류영하 교수는 1840년 아편전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홍콩의 정체성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정리한다. 『사라진 홍콩』을 통해 중국과 홍콩의 정체성은 각기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왜 두 정체성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지, 두 나라 간 갈등의 해법은 있는지 모색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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