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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니 책/비평지 문학사상

반딧불이와 같은 문학의 희망을 말하다 :: 『문학/사상』 9호 발간 기념 북토크 후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4. 5. 28.

 

조금씩 더워지는 날씨가 그저 불편하지만은 않은 요즘입니다. 여름이 가까워지면 그 생생한 에너지를 받아 어딘가에 열정을 쏟고 싶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5월 23, 산지니X공간에 문예비평지 문학/사상편집인 구모룡 문학평론가를 초청하여 최근 발간된 9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북토크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 시가, 더 나아가서 문학이 가질 수 있는 의미가 무엇일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뜨거웠던 그 현장을 지금 공개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최정란 시인의 낭송으로 오시프 만델슈탐의 시 시대를 음성으로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탈린 치하의 수용소에 있으면서도 단 하루도 시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던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구모룡 평론가는 만델슈탐의 시를 분석하는 알랭 바디우의 논의를 소개하며 시대를 두고 질문을 던지는 시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구모룡 평론가: 그러니까 1차 세계대전과 벌써 스탈린 체제를 경험하면서 이런 예감을 한 거예요. ‘우리 시대가, 인류가 척추가 부러졌다.’ 이런 표현을 하고 있거든요. 척추를 이을 수 없는 그런 시대다. 알랭 바디우는 20세기 초반에 쓰인 이 오시프 만델슈탐의 시가 20세기를, 20세기의 본질을, 20세기의 주요한 존재론적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알랭 바디우는 이 시편이 20세기의 폭력에 맞서 인간적인 슬픔에 저항하고, 그 문턱을 넘어설 수 없으나 기다림, 혹은 유지하는 능력을 지닌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알랭 바디우가 이 시편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결국 21세기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21세기도 만델슈탐이 1923년에 이야기한 이런 상황, 그러니까 인류가 척추가 부러진 그런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재난, 크고 작은 전쟁 그리고 기후 위기. 이런 것들을 보면 더 하면 더 하지 못 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알랭 바디우는 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고민하지 않는지 질문합니다. 세기가 바뀌었는데, 21세기인데, 잠수함의 토끼와 같고 광산의 카나리아와 같은 존재가 시인인데 시인들은 왜 만델슈탐 같은 감각을 가지고 우리 21세기를 얘기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어서 동아시아의 핵심 현장인 오키나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9호의 기획을 통해 오키나와의 상황을 점검하고 폭력을 마주하고 맞서는 작가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모룡 평론가: 우리가 한반도의 분단 체제를 동아시아 문제의 핵심으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 그보다 더 핵심적인 문제가 오키나와입니다. 이에 대해, 『문학/사상』 3호에 원고를 받아 싣기도 했던 도미야마 이치로의 글을 윤인로 선생이 이어서 읽고 다시 이야기했습니다. 윤인로 선생이 이런 말을 합니다. 거듭 그 지점으로 돌아가 무릅쓰고 다시 시작할 줄 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문제를 자꾸 잊어버리고 해결된 것처럼 망각하거든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오키나와는 근대에서 폭력의 현장 그 자체입니다. 오키나와 전투도 그렇고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윤인로 선생은 이야기합니다. 이미 있었던 폭력이자 또 앞으로 있을 수 있는 그런 폭력의 예감으로 가득한 그런 장소가 오키나와다. 이런 데 대처하는 태세는 파르티잔과 다를 바 없다. 도미야마 이치로가 언급한 ‘유착의 사상’, ‘폭력의 예감’ 같은 논의를 윤인로 선생이 이제 받아서 다시 거듭합니다. 폭력 앞에서 태세를 갖추는 자의 말, 그런 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바로 시인에게서 나와야 하고 또 작가에게서 나와야 하겠죠.

아우슈비츠의 역사 또한 기억해야 할 폭력의 역사입니다. 그 안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모든 것을 무릅썼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디디-위베르만은 이러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분석하려 했습니다.

구모룡 평론가: 아우슈비츠는 폴란드에 있는 도시 이름입니다. 아우슈비츠 안에 유대인들을 집어넣어 절멸시키는 그런 캠프가 한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게 비르케나우죠. 비르케나우라는 말은 폴란드 말로 자작나무라는 뜻인데, 자작나무 숲에 있는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가 유명합니다. 히틀러의 에스에스(친위대)는 증거가 없으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처음부터 작전을 세웠어요. 그래서 철저하게 증거를 인멸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끝나는 일은 없죠.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에서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을 가스실에 보내고 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들을 바깥에 끌고 나와 불태우고 하는 일을 돕는 유대인들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들을 존더코만도라고 해요. 이 사람들은 자기도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폴란드 레지스탕스가 이 존더코만도에게 카메라를 전달해서 겨우 네 장의 사진이 밖으로 나옵니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이 네 장의 사진을 가지고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이라는 책을 썼어요. 9호 두 번째 특집의 여문주 선생의 글이 바로 디디-위베르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여기서 등장하는 반딧불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문예비평지 『문학 / 사상』 편집인 구모룡 문학평론가

구모룡 평론가는 디디-위베르만이 반딧불이 이야기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위기감을 전합니다. 밝은 빛의 의미가 변하고 시가 약한 빛이 되어가는 현실을 점검했습니다.

구모룡 평론가: 디디-위베르만이 쓴 『반딧불의 잔존』이라는 책에는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이자 소설가인 파솔리니 이야기가 나옵니다. 파솔리니는 무솔리니의 등장, 파시즘의 등장을 두고 반딧불이가 사라지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반딧불이가 다 사라졌다는 이야기까지 했죠.

디디-위베르만 책에는 단테의 『신곡』 이야기가 나옵니다. 과거 단테 시대의 빛은 광명이죠, 신앙의 은총이고. 근데 오늘날 현대에 와서는 이게 역전이 됐다는 거예요. 오늘날 이 강한 빛은 죽음이라는 겁니다. 단테 시대에는 깜깜한, 칠흑 같은 밤이 악이고, 밝은 빛은 선이었는데 지금은 역전이 됐어요. 강한 빛, 강한 불빛, 스펙터클, 서치라이트와 같은 것이 약한 빛을 미미한 불빛으로 사라지게 만들고 없애버리는 거죠.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때, 시는 이런 약한 빛입니다. 디디-위베르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그 사랑은 근절되고, 무화되고, 공동화된다. 파솔리니는 ‘나는 한 마리의 반딧불이를 위해서라면 몬테디손 전체라도 건네주겠다’ 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반딧불이는 산업화와 소비주의가 독재하는 시대에 소멸했다. 이런 시대에 각 개인은 결국 쇼윈도의 상품과 동등한 것으로 자신을 전시한다. 정확히 그것은 출현하지 않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디-위베르만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결국 시대를 돌아보고 미래를 그리는 것은 문학을 읽고 쓰는 우리의 몫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구모룡 평론가: 파솔리니는 반딧불이가 완전히 사라졌다며 절망합니다. 그런데 디디-위베르만은 ‘그렇지 않다, 반딧불이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을 뿐이다, 아직 희망이 있다’라고 이야기해요. 파솔리니의 말을 해석하고 있는 디디-위베르만의 말을 읽어 보면 반딧불이가 사라진 이유는 오늘날 시인, 작가, 지식인들이 쇼윈도의 상품과 동등한 자신을 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문학을 그런 전시가치로 생각한다는 거죠. 테리 이글턴도 이런 말을 했어요. “시가 사유화되었다.” 사유화라는 단어는 ‘빼앗기다, 분리되다’라는 어원을 가집니다. 뭘 잃어버렸냐 하면, 코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공통의 감각, 공통의 장소, 공통의 자리를 다 잃어버렸다는 것이죠. 오늘날 시도 사유화되었고 시인이 자기를 전시하는 데에 시가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시작할 때 20세기의 오시프 만델슈탐을 읽었는데 우리가 지난 세기를 돌아보고 지금 세기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근시안이거든요. 우리가 사는 오늘날 사회를 근시사회라고 합니다. 자기 가까운 것만 생각하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가까운 이해관계, 가까운 데만 생각하고 만델슈탐과 같은 어떤 예언자적인 감각이 없다는 거예요. 또, 가속시대가 맞는 것 같습니다. 1945년부터 지금까지 탄소 배출, 오존층 파괴, 여러 가지 현상들, 기후위기, 쓰레기가 계속 늘어나는 일, 이런 것은 확실하죠.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앞으로의 흐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크 피셔는 디스토피아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희망이 없다는 거예요. 그걸 생생하게 그리는 것, 그것이 리얼리즘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디디-위베르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파솔리니는 반딧불이가 없다고 절망했는데, 파솔리니가 본 로마에는 반딧불이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곳에 반딧불이가 살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직 희망이 있다.’ 이것이 에른스트 블로흐가 이야기한 희망의 원리입니다. 희망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아직은 아니다. 희망이 있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도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우리가 희망을 가져야 되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문학의 역할을 고민한다는 것은 때론 막막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북토크를 통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앞서 희망을 긍정하는 일, 희망을 기꺼이 말하는 일이 가지는 힘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참석해 주신 분들과 고민을 나누고 미래를 그려볼 수 있어 기뻤습니다.

 

편집인 소개

구모룡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문학평론가로 활동해 왔다. 『앓는 세대의 문학』 『구체적 삶과 형성기의 문학』 『한국문학과 열린 체계의 비평담론』 『신생의 문학』 『문학과 근대성의 경험』 『제유의 시학』 『지역문학과 주변부적 시각』 『시의 옹호』 『감성과 윤리』 『근대문학 속의 동아시아』 『해양풍경』 『은유를 넘어서』 『제유』 『시인의 공책』 『예술과 생활』(편저) 『백신애 연구』(편저) 『폐허의 푸른빛』 등의 저서가 있다.

 

문학/사상9호 구모룡 평론가 초청 북토크는 아래 링크에서 다시보기 할 수 있습니다.

 

『문학/사상』 9호 책 소개

문학/사상 9 : 불가능한 말들

구모룡, 김만석, 김서라 지음 / 2024-04-12 / 224쪽 / 15,000원

주류 담론에 반격을 가하고, 담론의 지형을 재구축한다는 취지로 창간한 반년간 문예비평지 『문학/사상』 9호를 발간한다. 『문학/사상』의 이번 호 표제는 ‘불가능한 말들’이다. 온전히 다가갈 수 없는 부재 영역을 향한 글쓰기의 의지를 표명하고자 하였다.

가령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을 다룬 조갑상의 소설 「도항」은 이 사건에 관한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는 이처럼 부정성과 불가능성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하고 형성하는 행위의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반딧불의 잔존하는 이미지처럼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으나 오히려 잔존함이 생성의 거처임을 거듭 말하고자 한다.

오키나와와 제주를 거듭 불러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핵심 현장의 로컬을 통하여 로컬과 국가, 지역과 세계에 중첩한 문제를 따져 읽는다. 『문학/사상』 9호는 중심과 주변의 단순한 이분법을 경계하면서 끊임없이 겹쳐보고 연결하며 겹눈의 시선으로 문학과 로컬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지속한다.

 

 

 

▶ 『문학/사상』 9호 구매 링크

 

문학/사상 9 : 불가능한 말들

주류 담론에 반격을 가하고, 담론의 지형을 재구축한다는 취지로 창간한 반년간 문예비평지 『문학/사상』 9호를 발간한다. 『문학/사상』의 이번 호 표제는 ‘불가능한 말들’이다. 온전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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