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2025년 산지니 첫 북토크가 열렸습니다. 산지니시인선 22번째 도서인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의 저자 신진 시인은 이번 시집으로 열한 번째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특히 출간된 작년은 신진 시인이 문학활동을 시작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는데요. 5년 만에 출간된 시집인 만큼 독자들과 문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북토크 현장에도 여러 문인들이 참석해 주었는데요, 그 현장을 소개합니다.
신간 시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소개 부탁드립니다.
슬픔이라는 건 다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슬픔을 부인하는 사람은 오만한 사람입니다. 아주 독선적인 사람이죠. 우리 모두 슬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못 걷는 슬픔도 있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슬픔은 늘 부인하고 외면하는 독선적인 기득권자들의 발언들이 쏟아지는 이런 세태에서 사랑이라거나 인, 측은지심 등이 전부 가장 인간의 인간적인 슬픔에 있다는 말이 아니었던가 이런 생각을 같이 합니다. 그래서 다 같은 슬픔이니까 못 걷는 슬픔을 만나면은 조금 다독이기라도 하자, 외면하지 말자, 슬픔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외면하지는 말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집의 표제시를 정할 때도 편집자께서는 <시 쓰지 마라>와 몇 가지를 추천했는데, 이런 생각들 때문에 표제시를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로 정했습니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을 선별하시는 데 있어 주안점으로 생각한 것이 있으신가요?
시를 선별하는 데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다.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사회 생태주의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추상적이고 미적인 생명감, 생명성 대한 어떤 그 추구가 있었고, 환경생태적인 시를 한 때는 또 썼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의 본성, 본연의 모습에 대한 탐구가 심층적인 것이고 본질적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사회 전체가 생태적인 생명성을 잃으면 논리적이고 관념적인 유희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아름답지도 않은데 아름다움을 강요하고 감동을 강요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4쪽에 수록된 <비우지 마라>라는 시도 굉장히 역설적으로 들렸습니다. '오히려 비우고 산다는 그 말 자체도 욕심일 수 있다'라고 해석하면 좋을까요?
네. 우리는 가끔 버리자, 비우고 살자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가난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웃들이 앞뒤로 사방에 바글바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좋게 샀다고 해서 말만 버리자, 비우자라고 하는 것은 슬픔마저 버리자는 말이거든요. 다 가져놓고 못 가진 사람한테 긍정적으로 살아라고 하는 것은 나를 긍정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비우고 살자 하는 것은 오만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비우지 마라>의 맥락을 말하자면 좀 진정성 있게 어떤 진실을 가지고 사랑을 품되 그것은 여는 일이니까 열고,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 드나들게 살면 좋겠다,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 본래 사람의 사는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가, 좋은 방식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 것을 바탕으로 집필한 시입니다.
시를 너무 어렵게 쓰려고 하는 것, 내가 시를 위해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 시를 쓰는 데 방해가 되는 걸까요?
어렵게 쓰는 것이 방해가 된다기보다 어렵게 쓰는 것이 쉬워서 어렵게 쓰는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말만 어려운 시는 쓰기가 쉽거든요. 이유 없이 어렵게 쓰고 그럴싸하게 다듬어진 시를 쓰는 것이 멋진 시인이 되는 방법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었고, 저도 젊은 시절에 그런 유혹을 많이 받았어요. 언어를 창작한다는 것은 창작 주체가 역동적으로 만날 때 창작의 생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의 의미맥락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언어가 있어야 시의 의미가 효과적으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훌륭한 시는 최소의 언어로 최선의 창의를 최대의 독자와 공유할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시집뿐만 아니라 시 창작 이론서와 같은 책도 많이 집필하셨습니다. 최근에 내셨던 <차이 나는 시 쓰기>와 같은 이론서에서 '차유'라는 생소한 용어를 사용하셨어요. 이 자리에서 '차유'를 쉽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차유'는 나름대로 제가 오랫동안 논리를 다듬어 온 용어입니다. 비유에 대해서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문장 '내 마음은 호수요.'의 수사법은 무엇입니까? 은유입니까? 직유입니까? 우리가 수업 시간에 배운 바로는 '-같다', '-인양' 등의 단어가 없으니 직유가 아니라 은유입니다. 이렇게 수사법을 정의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 이론을 가지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매긴다는 것에 대해 저는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의문은 학창 시절부터 있었고, 이 의문이 '차유'라는 용어를 만들게 된 계기입니다.
또 하나 예를 들면,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에서 '옥같이'의 수사법은 뭡니까? 직유죠. 여기서 '부서지는 옥이 되리라' 이렇게 바꾸면 수사법은 은유가 됩니다. 이것은 참 웃기는 일입니다. 수사법을 기존의 방식으로 분류하지 말고, 문장의 맥락을 보고 구조적 비유 혹은 문맥적 비유로 보자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은유는 유사한 것을 이용해 비유하는 전통적인 비유입니다. '내 마음은 호수요'는 그동안 호수를 마음에 비유한 것은 흔했기 때문에 은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먼지요'라고 하면 두 단어 사이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차유라고 봅니다. 비유는 크게 유사성과 차이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차유도 비유이니 그 문맥적인 의미가 있을 때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즉, 아주 차이나는 생각을 가지고 그에 맞는 언어를 입히는 것이 차유이고, 이것이 창작의 바탕입니다. 기발한 착상을 가질 때 비유가 차유가 되는 것이죠. 엉뚱한 듯하다가 만나서 접점을 갖기 때문에 차유는 역동성이 있고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글로는 소개하지 못한, 신진 시인의 낭독과 청중들과의 즐거운 소통, '차유'에 대한 신진 시인의 설명 등은 아래 링크에서 전체 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live/jPCUOToV5wk?si=9sexMTdoEp5g4Hpt
★ 시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구매하기
'저자와의 만남 | 이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에 평화를 주고 싶다면?_『명상』 구치모 저자 강연이 개최됩니다! (1) | 2025.01.24 |
---|---|
영미시의 매혹에 빠질 시간!_『영미시의 매혹』 김혜영 시인 북토크 (0) | 2025.01.23 |
신진 시인의 북토크가 내일(1/16) 산지니x공간에서 열립니다! (0) | 2025.01.15 |
동물 유토피아 실현을 위해 전 세계를 넘나든 한 활동가의 치열한 기록_『동물 유토피아를 찾아서』 편집자 북토크 후기 (0) | 2025.01.10 |
36년 경력의 대학도서관 사서가 말하는 부전도서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_도서관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우리가 사랑한 부전도서관』 이양숙 작가를 만났습니다. (0) | 2025.01.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