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월 23일, 산지니X공간에서 <문학/사상> 11호 출간 기념 북토크가 열렸습니다. 이번 북토크에서는 문학/사상의 편집위원인김대성, 김만석 문학평론가와 함께했습니다. 특히 김대성 편집위원은 이번 호의 특집을 쓴 필자이기도 합니다. 주제 기획부터 원고 청탁까지, 로컬 문예비평지 <문학/사상>의 출간 전반을 주관하는 두 편집위원이기에 보다 풍성하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 북토크에서는 특집 글 '일하는 사람이 일구는 글쓰기'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김대성 선생님의 소중한 책들을 직접 소개받았습니다. 북토크라고 하면 보통 하나의 책을 앞두고 주로 듣기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여러 책들을 보며 감탄하고, 궁금해하는 시간을 가져 특별했습니다. 그 즐거웠던 현장을 지금 바로 소개합니다.
김만석 편집위원
오늘은 김대성 선생님이 쓰신 글을 중심으로 11호에 관련된 논의를 진행해보려 합니다. 글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인 문제에 대해 딱딱하게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글에 소개된 다양한 '생활 글쓰기'의 사례를 직접 만나보고, 두께를 실감해보는 방식을 통해서 논의의 지형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글쓰기와도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김대성 편집위원
<문학/사상> 11호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도 즐겁겠지만, 특집의 두 번째 글로 수록된 '일하는 사람이 일구는 글쓰기'를 가운데에 두고 김만석 선생님과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이런 글을 썼고 이런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보다는, 이야기 나누면서 제가 가져온 책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이런 책들이 있고, 이런 작업이 있다, 유명한 작가가 아니더라도 잘 알려지지 않았어도 주변부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글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어떻게 기억해야 될지 사람들은 여전히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고, 그 글쓰기에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끈질기게 흐르고 있는 '일하는 사람들이 쓰는 글쓰기'를 뭐라고 부를지, 어떤 모양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여러 책들과 사례를 통해서 제가 짧게 좀 짚고자 합니다.
작가를 중심으로 하는 글쓰기가 아닌, 작가가 아니어도 괜찮은, 어찌 보면 모든 이들을 위한 글쓰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또 어떻게 예감할까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나눌 수 없다면 상상해 보는 것도 작은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서 이 북토크는 출발했습니다. 김만석 선생님도 노동자 글과 글쓰기에 대하여 꾸준히 써오고 계시는 분이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함께 나눠주실 것 같습니다.

오늘 이 북토크를 위해서 간단하게 PPT를 하나 만들었는데 같이 보시면서 이야기를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노동하는 사람이 일구는 글쓰기'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 일구는 글쓰기'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근로라는 말도 있고, 노동이라는 말도 있고, 일이라는 말도 있는데요. '일하는'과 '일구는'은 라임 외에도 이어져 있습니다.
일구고 일으키는 게 몸을 일으키는 것도 있지만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있고 물결을 일으키는 것도 있다라는 점에서 노동이라는 말보다, 노동자라는 말보다, 일하는 사람이라고 붙였습니다. 뒤에도 말씀드리겠지만 이 일이라는 것이 꼭 임금 노동자들이 하는 노동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곳곳에서 때때로 일을 하잖아요. 사실은 아이도 일을 하거든요. 아이들이 일구는 게 있어요.
자기 방을 일구거나 아니면 어른의 눈에 볼 때는 어지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도 외출하기 전에, 밥 먹기 전에 아주 작게 일을 합니다. 아이가 일구는 그 일을 보는 눈길이 없을 뿐이지, 아이, 노인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고 일구고 있거든요. 그런 눈길로 봐야 하겠구나 글쓰기 또한 그렇다, 그것과 이어져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제목은 노동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라고 붙여봤는데요.
이 글의 시작과 큰 얼개는 이렇습니다. 이렇게 단정 지어서 말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말을 한번 꺼내본다면, 거의 모든 글쓰기가 어딘가로 도약하려는, 어딘가로 넘어가려고 하는 시도랑 이어져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에너지랑 이어져 있는 것 같아요.
여기가 아니면 좋겠어. 나는 지금 여기에 머물지만 내 마음, 내 미래, 내 바람은 여기가 아닌 여기를 떠난 어딘가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글을 쓰는 것 같거든요.

작가뿐만이 아니라 글 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이어지는 걸 꿈꾸고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어딘가로 떠나고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것, 그게 꼭 장소가 아니라 어떤 정체성이 될 수도 있죠. 이게 글쓰기의 보편적인 방향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문맥으로 '글쓰기: 여기가 아닌 너머로 가려는 도약'이라는 큰 제목을 붙여봤는데, 결론부터 얘기한다면 '일하는 사람이 일구는 글쓰기'는 너머로 가지 않아도 되는 글쓰기예요. 머무는 글쓰기, 여기에 있어도 되는 글쓰기예요.
특히 지역의 청년들이나 글을 쓰려는 많은 사람들은 도약하려고 하거나 떠나려고 하는 에너지가 좀 더 강한 편입니다. 그렇지만 여기 쌓여 있는 책도 그러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일군 글쓰기 역사를 들여다보면, 떠나는 것이 능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떠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떠날 수 있으면 떠나십시오. 다만 머무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그 머무는 사람들이 보수적이거나 꼴통이거나 무능력해서 머무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일구기 위해서 머무는 사람들도 있고 한데 그런 것들이 눈에 잘 안 띄죠. 뜨이지 않기 때문에 뭘 하는지 모르거나, 무언갈 해도 사람들이 보지를 않아요.
그래서 저는 '너머로 가려는 글쓰기만 있는 건 아니다'라고 얘기를 꺼내기 위해서 랑시에르가 19세기 노동자들이 남긴 글에 대해 쓴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가져 왔습니다. 어떤 이론이라든지 자기의 관점이 아니라 실제 노동자들의 글을 통해서 기존의 계급 관념이라든지 역사관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책입니다. 실제 남겨진 자료를 하나하나 읽어보니까, 19세기 노동자들이 밤에 내일을 위해서 쉬는 게 아니라 무언갈 하고 있었던 거죠. 뭘 하고 있었는지를 보니까, 노동자이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남긴 문서고, 사건 기록 같은 것을 통해서 이런 것들을 발견하고, 이걸 뭐라고 불러야 될까를 다룬 책입니다.
책이 상당히 두꺼워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한 7강 10강 정도 해도 모자랄 수도 있지만, 아주 짧게 말씀드린다면 '밤'이라고 하는 시간이 문서고를 통해서 보니까 '불가능한 것들을 준비 하고 꿈을 꾸는 시간'이었다. 육체 노동에 종사했던 사람이 계속 그 일을 반복할 수 있게끔 위계를 계속해서 연장시키는 시간이 아니더라. 랑시에르가 그 문서고를 통해서 보니까 당시에 드물지만 글 쓰는 노동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유명한 작가들로부터 추천사도 받고 작가들과 어울려서 토론도 했다. 또 노동자들을 위한 잡지들도 많이 많이 창간되었는데 거기에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있어요. 예를 들어, '나는 구두공이고 내 일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거 너도 알지 그런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구두공이 아니야 나는 글을 쓰고 싶어' 이런 목소리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정보값 위에서는 노동자의 글쓰기가 '내 노동이 얼마나 가치 있고 나라는 사람과 내 신성한 노동이 얼마나 힘을 갖고 있고,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를 증명하는 글쓰기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동안 한국 노동자 글을 바라보는 시선도 주로 이런 맥락에서 형성되어 왔는데요. 랑시에르가 열람한 19세기 노동자들의 문서에는 어떻게 보면 완전히 반대의 이야기가 있었던 거죠. '나 노동자 원하지 않아. 이 밤은 내가 노동자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야'라고 하는 이야기. 노동자를 대표하지 않고 노동자라는 할당된 자리를 거부하는 글쓰기 입니다.
글 쓰는 노동자는 그래서 꿈꾸는 노동자들이고 수다쟁이고 엉터리 시를 짓고 추론하고 궤변을 일삼는 사람들이고, 그러니까 질서를 어지럽히는 거죠. 노동자에게는 노동자가 머물 수 있는 공간, 할 수 있는 거, 해야 하는 거, 꿈꾸는 것이 어찌 보면 딱 몫이 할당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이 노동자들은 그 할당된 몫을 거부하고 다른 것을 욕망한다라는 거예요. '왜'는 몰라요. '목표를 세워가지고 작가가 될 거야'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거를 이 책에서는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그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기' 어떻게 보면 모순되는 말이죠. 노동자들이 글쓰기를 통해서 그런 것들을 계속 꿈꿨다라는 거예요. 랑시에르는 그래서 이 모순 속에 어떤 해방의 가능성이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19세기 노동자들이 노동자답지 않은 것을 욕망하면서, 그 사회를 주관하고 있던 지배 논리를 근원에서부터 조금씩 흔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랑시에르가 짚었다면, 한국에서도 이천 년대 초반부터 여성 노동자들의 구술 기록 작업이 꾸준히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명박근혜 정권 후반부에 또다시 활발해졌는데, 암울했던 당시, 1980년대 변혁의 시대에 노동자들이 세상을 바꾸고 목소리를 내던 그 역사를 다시 열어서 그 힘을 발굴하려는 문맥에서 노동자들의 글쓰기 기록들을 연구 대상으로 많이 삼았어요. 그 후반부에 전태일에 대한 연구도 이어졌는데요. 여전히 전태일을 노동 열사로서, '우린 기계가 아니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슬로건으로서 많이 기억합니만, 그가 쓴 책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가 있습니다.

이 책은 진작에 절판된 반면, <전태일 평전>은 스테디셀러로 여전히 잘 나가고 있죠. 이 당시 노동자들도 마찬가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호사 출신의 조영래라는 분에 의해 쓰인 전태일은 알지만, 전태일이 직접 남긴 대학노트 5권에 담긴 글은 잘 모릅니다. 5권을 남길 정도면 계속해서 글을 썼다라는 건데, 이런 부분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노동자 글쓰기에 주목한다면, 가장 먼저 복원해야 될 텍스트가 이 책인 것 같은데 아직까지 복원이 안 된 게 좀 의아합니다. 아무튼 글 쓰는 노동자는 80년대에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라 계속 있어 왔다는 거죠. 80년대에 잠깐 나타났다가 90년대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런 단절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글쓰기가 아니라 이전부터 희미하게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이 역사를 알아보려면 이게 꼭 노동자라고 하는 정체성이나 역할에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 노동자 글쓰기이기보다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로 확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프랑스 19세기 노동자들이 글 쓰면서 무엇을 욕망했는지 그 글쓰기가 무얼 뜻하는지를 이야기한 뒤에 한국의 노동자 글쓰기,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를 어떻게 봐야 될 것인가. 그 이야기를 할 때 '노동 열사'라는 수사로만 기억되고 있는 전태일의 글쓰기가 뭘 가리키는지를 사실 이제라도 제대로 좀 들여다봐야 된다.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 이 얘기를 가져와 보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념사업회에 사업 계획서뿐만 아니라 소설 편지 독후감 앙케이트, 그리고 유서라고 일컬어지지만 실제로 유서는 아니고 전태일이 쓰다 만 소설들이 꽤 있어요. 그런 기록들이 잔뜩 쌓여 있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여성 노동자들의 글쓰기를 많이 다룰 때 이들이 문학가가 되고자 하는 꿈을 꿨다라고 말들을 많이 하고, 실제로 그런 기록들이 나와 있습니다만 이런 다종한 글쓰기를 전태일이 계속해서 해나왔다라는 거는, 이 사람의 글쓰기가 문학이라고 하는 전문가적인 글로 수렴되지 않았다라는 거는, 그냥 썼다라는 거예요.그걸 뒤에 이거는 소설이고 이거는 편지고 이렇게 이제 이름을 붙인 거여서 꼭 글쓰기가 문학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그것을 오히려 이제 전태일의 노트가 보여준다라는 차원으로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또 한국 노동자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앞서 얘기했던 랑시에르 책 인용을 상당히 많이 하고 이론적 근거로 많이 가지고 오는데요. 한국에서 노동자 글쓰기는 노동자성을 강화하거나 증명하는 매개로 많이 논의되어 왔어요. 스스로 각성하고 자기의 가치와 의미를 글쓰기를 통해서 피력하는 그것이 노동자다움을 증명하는 거죠.
그런데 랑시에르가 말한 해방, '노동자 안 할래 노동자 말고 다른 걸 꿈꿀래'라고 하는 이 해방이 한국 노동자들이 쓴 글을 해석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지만, 그 '해방'이 노동 운동과 투쟁을 통해서 현실을 변혁하는 것으로서의 '해방'과 쓱 겹쳐버릴 때가 있는데요. 이게 사실 다른 해방이거든요. 한국에서의 변혁 운동하던 곳에서의 해방은 노동자다움이에요. 각성하고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어떤 노동자 상. 근데 랑시에르가 얘기하는 해방은 노동자 하지 않아도 되는, 노동자답지 않고, 오히려 노동자가 아닌 무언가가 되려고 하는 해방이었는데. 이 해방이라는 말이 겹치면서 약간의 이제 혼선이거나 좀 정교하지 않게 뭉그트려서 얘기를 꽤 많이 해오지 않았는가. 이 부분도 좀 짚어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김만석 편집위원
지금까지 노동조합 글쓰기 연구가 꽤 많이 축적되었는데, 지금 김대성 선생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노동자 글쓰기라고 부르는 것이 가지고 있는 최근의 연구 경향에도 불구하고, 아직 연구되지 않은 영역이 남아 있음을, 그런 글쓰기의 흔적들이 구성되어 있음을 소개해 주시는 방식에 가깝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흥미롭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노동자 정체성을 강화해 왔던 연구의 경향들과 입장, 이것을 노동자의 글쓰기와 머뭄의 글쓰기를보게 된다면 해석의 방식이나 방향이 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고. 그와 더불어서 노동자 수기 연구가 축적해 놓은 결과물을 훌쩍 뛰어넘는 형태가 될 것 같다 이런 생각이 조금 들어서 메모를 조금 해보고자 했습니다.

사실 마지막에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먼저 얘기를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얘길해보겠습니다. 문학/사상 11호의 표지인데요, 응원봉과 무지개 색이 있습니다. 이번 내란 사태 때 아스팔트를 일군 사람들을 상징화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 표지도 일군다라는 감각이랑 같이 매개되어 있고, 그리고 흥미롭게도 사실은 아스팔트 시위에서 특징적으로 책을 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스팔트 위에서 책을 읽는 경험도 같이 하거든요. 그래서 이런 경험을 보면 특정한 어떤 형태의 주체성들이 그 안에서 다른 무언가를 조직해 내고 일구려고 하는 진짜 생동하는 무언가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이거를 역사의 눈으로 시야를 돌리게 되면 훨씬 더 풍부한 이야기들이 조직되고, 우리의 오늘날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응할 수 있는 논리적 자양분으로도 괜찮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선생님 얘기하시는 동안은 좀 들었습니다.

김대성 편집위원
덧붙여 주셔서 감사하고요.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라고 하는 르포르타주를 보면,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가진 것 없는 사람들, 무산자들이 신분을 바꿀 수 있는 유효한 창구였습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 특히 식민지 조선에서 (물론 집이 좀 살아야 일본 유학도 갔겠지만) 지식인들이 문학을 통해서 뭔가를 극복하려고 하는 그 애씀 같은 것들과 이어져 있다라는 점에서 문학은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간다라는 역사의 흐름을 곳곳에서 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의 한 문구를 가져와 봤습니다.

'노동', '근로', '일'이라는 단어에 대한 대목은 조금 더 정교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노동 일 근로라고 하는 것이 비슷한 말이고 표현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보통 생각합니다. 저도 분명히 그렇게 읽히는 면이 있고 이게 엄밀하게 구분해서 이렇게 사용돼야 한다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용법이 다르다라는 거죠. 그리고 그 말을 썼었을 때의 자장이 다르다라고 한다면, 천천히라도 이거를 구분하고 개념사라고 하는 것에 대한 접근도 좀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하며 이 책을 찾았습니다.

김경일 선생님이 쓰신 <노동(한국 개념사 총서)>인데, 소화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이 분이 일찌감치 이 작업을 하셨어요. 그리고 이 책은 고대 시대부터 사료로 확인할 수 있는 것에서 노동 근로라는 말을 다 찾아가지고 고려시대 삼국시대에는 어떻게 썼고 고려, 조선, 식민지까지 어떻게 써왔는지를 한 명의 연구자가 할 수 있는 만큼 찾아가지고 정리한 책입니다. 이 책에 반복해서 나오는 말이 '이게 맞는지 모르겠는데'예요. 이 개념사 연구가 하나도 안 돼 있다라는 거죠. 또 심지어 '일'이라는 단어는 아예 없어요. 이 '일'을 어떻게 개념적으로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습니다. 그럴 때 노동은 조금 좁혀가지고, 노동조합을 바탕으로 권리를 쟁취하는 노동자성을 조금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근로는 근면을 바탕으로 국가에 이바지하는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좀 많이 상기하는 것. 그래서 70년대 80년대에 특히 이제 70년대에 우수 근로자들 모범 수기 같은 게 박정희 정권에서 많이 권장되면서 해외 노동자들 수기집 같은 거라든지 근면 성실한 근로자들 수기 책들이 국가기관을 통해서도 많이 나오고 또 그런 자료들이 꽤 있거든요, 70년대에는. 이제 80년대에는 노동자들이라고 하는 호명을 통해서 노동 수기라든지 그런 책들이 또 많이 나오고요.

'일'의 '스스로 일구는 여러 일'이라는 뜻은 제가 그냥 붙여봤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농촌 어린이 시집이라고 이름 붙인 <일하는 아이들>이라고 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이 일. 이오덕 선생님의 그 '일'이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요 조그마한 문구를 제가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거지, 제 스스로 생각한 건 아니에요. 그래서 스스로 일구는 여러 일을 가르키는 거고, 앞서도 얘기한 것처럼 때때로 곳곳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글쓰기가 너머로 가려고 하지만 너머로 갈 수가 없거든요. 보통 어떻게 가려 하냐면 이미 간 작가들을 따라가려 하고, 그러니까 흉내 내거나 따라 쓰기가 글쓰기 전반에 흐르고 있어요. 그럴듯한 표현, 좀 더 멋져 보이는 거, 문학적으로 쓰는 것이 꼭 나쁠 까닭은 없지만, 그 기저에 뭐가 흐르고 있냐면 흉내 내기, 비슷해지려고 하는 욕망이 있는 거예요. 그것도 애를 써야 되지만 어느 정도 따라하는 것도 능력이 되어야 하지만, 그게 유일한 글쓰기 길은 절대 아니거든요. 따라하지 않고도 쓸 수 있는 글이 엄청 많은데 학교 교육도 그렇고요. 대학 포함해서요. 그리고 일반인들이 뭔가 글을 쓸 때 흉내를 낸다는 거죠. 그렇게 안 써도 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글쓰기 역사가 사실은 이제 이런 책들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고, 아까 김만석 선생님이 언급한 생활 글쓰기라는 용어보다는 저는 살림글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제가 이름을 붙였는데요. 그 말이 더 맞겠더라고요. 왜냐하면 집안을 일구는 것만이 살림이 아니라, 달리 얘기해서 여성에게 할당돼 있는 노동만 살림이 아니라, 지금 이런 것도 살림을 일구는 거고 저마다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작은 살림을 이룬단 말이에요. 모두가 사실 살림을 해요.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살림을 안 하면서 현실과 오늘에 대해서 끝없이 얘기하는 사람도 많죠. 밥 한 번 짓지 않아본 사람도 이 자리에도 있을 겁니다. 빨래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글을 무진장 쓰죠. 오늘에 대해서, 오늘의 행복과 우리의 삶에 대해서 엄청나게 쓰는데. 아까 제 말과 좀 충돌하는데 살림을 하지 않으면서 쓰는 글과 살림을 꾸리면서 쓰는 글은 저는 매우 다르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보는 눈길 자체가 없어요. 그냥 얼마나 잘 썼나 얼마나 대단하게 썼나 얼마나 미학적으로 잘 썼냐라는 관점의 힘이 너무 강한 것 같고, 독점적인 것 같아요. 그거를 폐기하자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세상에는 상당히 많은 글이 있고 그 글을 보는 여러 가지 눈길이 있어야 되는데, 앞서 얘기했던 그 문학적인 글쓰기가 너무나 독점적이라서, 오히려 아주 많은 다양한 글쓰기가 거기에 먹혀버리거나 가려지지 않았나 그걸 좀 강조하고 싶습니다.

넘어가 본다면 '여공 문학'이라고 하는 이름은 한국 사람이 붙인 게 아니에요. 호주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온 루스 베러클러프라고 하는 분이 유학 시절에 80년대 한국 노동자 수기를 보면서, 공장 여공들이 쓴 글들을 카테고리화하는 그 방법론을 가지고 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글쓰기에 이름을 붙여준 거예요. 되게 재미있죠.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여공 문학이라는 이름은 제가 알기로는 이분이 붙인 거예요. 이게 무슨 대단히 새로운 이름은 아니죠. 여공이라고 하는 말하고 문학이라고 하는 너무나 당연한 말을 아무도 붙일 생각을 안 했던 거예요. 근데 이 외국인이 붙인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이 여공 글쓰기가 노동자라는 대표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하죠. 이 여공이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서, 공장이라고 하는 곳에서 여성으로 일한다라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차별과 성폭력이라고 하는 이중 구속의 상태를 폭로하는 이름이라는 거예요. 그것을 선명하게 드러내면서 여공 문학을 이렇게 대단히 훌륭하게 적어낸 책입니다. 이 책 안에 여공들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쭉 풀어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도 뭔가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하는 열망이 가득해요.


<공장의 불빛>과 <빼앗긴 일터>를 가지고 왔는데, 이런 책들을 연구할 때 편집자나 학출 출신들, 야학 선생들이 글을 많이 고쳐줬을 거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대단히 많던데요. 물론 그런 면이 분명히 있겠지만 저는 이제 장남수 선생님의 글을 볼 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들의 윤색을 거치지 않고 이 사람 나름의 역량으로 써낸 글이라고 하는 생각이 들고, 장남수 선생님은 그 이후에도 <빼앗긴 일터 그 후>라는 책도 냈고, 몇 년 전에는 <파문>이라는 소설집도 낸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석정남 선생님의 이 <공장의 불빛>은 어떻게 보면 가장 유명하다고도 할 수 있고, 또 그 당시 그 <창작과비평>인가요? 어떤 좌담회 같은 곳에서도 비평가들이랑 같이 노동자 대표로 앉아서 좌담을 나누는 경우도 있고, 석정남 작가는 그 당시에도 소설을 계속 썼어요. 그리고 그 소설이 상당히 잘 쓴 소설이었습니다. 인터넷에 계속 검색하다 보니까 석정남 작가님이 유튜브를 하시더라고요. 전라도 쪽에 살고 계셨고, 산을 이렇게 다니면서, 자연의 어떤 아름다운 여유로움 등을 혼자서 막 얘기하고. 고구마 같은 거 먹고 친구랑 어디 산에 같이 가서 이야기 나누는 그런 클립들이 몇 개 있더라고요. 그게 한 4~5년 전 소식들인데 제가 열심히 찾아서 조금 보기도 했습니다.
<공장의 불빛>에는 한 시인과의 만남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와요. 꾀재재해 보이는 그 시인이 무슨 시를 읽는지 물어보아, 낭만주의 계열의 목록을 얘기하죠.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내던 <대화>라는 잡지에 실린 글에 언급된, 하이네, 바이런, 괴테 등. 이게 당시 전집류나 교양 보급 사업 일환으로 노동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책 라인업이에요. 그런 걸 읽고 있다니까, 요 시인이 지금 그거 읽어서 될 게 아니야 황석영 읽어야 돼 고은 강은교, 이런 리얼리즘이라든지 뭔가를 좀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거 읽어야 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76년도 <대화> 잡지에서 석정남 작가는 '나는 이런 거 꿈도 못 꿀 거야. 나는 돼지니까.'라며 자기를 되게 비하합니다. 문학이라는 거울에 비춰서 나를 보니까 돼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노동 운동을 하고, 동료들을 알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던 그 시기를 거치면서, 이 시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에게 하는 얘기를 보니까 좀 우스운거죠. 꾀재재한 사람이 이게 무슨 시인이야 싶은 사람이. 약간 좀 핀잔하듯이 쓰고 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문학이 우리를 환호에 이르게 하는 역할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한다, 수치스럽게 만든다 이런 역할도 동시에 하고 있다. 문학 또한 절대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 그런 것들을 잘 보이는 하나의 에피소드로서 좀 가지고 왔고요.

앞서 얘기한 <일하는 아이들>은 지금 읽어도 감동의 눈물 바람을 하게 하는, 너무나 훌륭한 책입니다. 분교에서 10대들이 쓴 시를 모은 이 책은 보통 아동 문학으로서 얘기가 돼요. <비바람 속에서 피어나는 꽃>은 노동자의 글로 이야기되는데, 10대 도시 야학 노동자들이 쓴 글이고요. 이 두 책은 별개가 아니지만 항상 별개로 생각되어졌습니다.
실제로 책을 낸 청년사의 대표 한윤수 편집자가 밝히고 있어요. <일하는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비바람 속에 피어나는 꽃>을 묶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 두 개를 같이 다루는 경우가 없죠. 구분하는 거죠. '노동'과 '아동'. 아닙니다. 이어질 수 있어요.
이런 식으로 이오덕 선생님은 학교에서 같이 썼던 글들을 꾸준하게 묶어 책으로 펴내었고, 그중 한 책의 맨 뒤에 뭐라고 돼 있냐면 "이 책이 바로 저의 이력서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대단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자기 이력서라는 거예요. 그 말은 교육자로서 자기가 일구어 놓은 어떤 성과로서 작업들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그냥 드러내는 것으로서 아이들이랑 계속 글을 썼고 그 눈길로 일하는 사람들의 글을 계속 봐왔다라는 거예요. 이오덕 선생님은 여러 글쓰기 심사위원에서부터 크고 작은 단체를 비롯해 90년대 이후까지 활동을 해왔고 많은 영향을 끼치셨는데도, 한국 노동자들의 글쓰기와 너무나 뿌리 깊게 이어져 있다라는 논의로 이야기되지 않고 있습니다. 책을 펼쳐 보면 이오덕 선생님이 해석이 아니고,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아이가 왜 이런 표현을 썼는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가 적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바탕으로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리는 글이 두어 줄 정도 있습니다. 시를 바라보는 눈길을 완전히 바꾸는 그런 것이죠. 한국에서는 연구도 거의 되어 있지 않지만,1920~1930년대 그리고 1950년대 굉장히 활성화되었고,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생활 글쓰기 운동이라고 하는 운동으로부터 이오덕 선생님이 아주 많은 영향을 받았고요. 그게 해방 후에 노붕우라고 하는 사람이 쓴 <생활 작문 교실>이라는 책이 있어요. 이 책도 일본 생활 글쓰기 운동에 영향을 받아서 만든 것이고, 빨리 절판이 되었지만, 아이들의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연구한 이오덕 선생님 같은 일본의 사람들이 쓴 책을 번역한 것도 있습니다.

일본의 운동 그룹이랑 계속해서 연락하면서 그쪽에서 보내준 학생들의 시, 일하는 사람들의 시와 글을 꾸준하게 보면서 선생님이 계속 배우고 느낀 것들과 함께 본인이 번역한 거예요. 공식적인 유통은 제대로는 안 된 것 같아요. 이게 맨 처음에는 <한 사람의 목숨>이라고 하는 책으로 나왔고 그다음에는 임의로 편집돼어 나왔습니다. 저는 복사본을 가지고 있어요.
이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는 일본의 20~30년대 그리고 지역 운동으로부터 발발했어요. 생활 글짓기 운동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연구된 바가 없어요. 이 연결지점에 대해.
물론 이제 식민지 시기 일기 쓰기라든지에 대한 연구들은 조금씩 되어 있고, 식민지 규율을 구성원들에게 내면화하는 한 장치로서의 일기 쓰기, 이런 얘기들은 좀 있습니다만 그 글쓰기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그리고 또 어디로 가는지 살피는 연구는 없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은 오래전부터 문학하는 사람들이 글쓰기를 망친다라고 계속 얘기를 하거든요. 자꾸 그럴듯하게 꾸며 쓴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꾸며 쓰는 그런 글을 백일장 글쓰기 문화가 계속해서 학습시킨다라는 거. 이런 것들을 이제 없애야 된다, 있는 그대로를 쓸 수 있어야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 면에서 사투리는 지역 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손수 지어서 쓰는 말이기도 해요. 일터에서, 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지어서 쓰는 말, 물려받은 말 그게 이제 사투리라고 할 수 있다면, 일하는 사람들이 쓰는 글에는 지역어로서의 사투리가 아니라 '지어서 쓰는 말'들이 가득하다라는 거예요. 저는 그걸 문학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에 쌓여 있는 그 결 같은 것, 삶의 흔적 같은 것들을 보는 눈길이 없기 때문에, 문학에 미달하는 글이라고 자꾸 바라보게 되고, 문학에 가까워지려고 모두가 애쓰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것. 너머를 꿈꾸지 않고도 머물면서 일구는 사람들의 글쓰기가 여전히 있고, 그리고 그런 글들을 더 반갑게 맞이하고, 나 스스로도 그런 글을 또 즐겁게 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제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김만석 선생님께서도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김만석 편집위원
사실은 이게 엄청 논쟁적인 이야기예요. 하나하나 짚으면서 논의해 보면 시간이 엄청 많이 필요하거든요. 근로, 노동, 일 이렇게 이제 나누어서 고려해 봐야 된다라는 주장도 만만한 이야기가 전혀 아니고요. 어떤 점에서 근로라는 말은 사용자가 부르는, 그리고 한국의 보수 정치 세력들이 항상 노동자 대신에 불러왔던 명칭입니다.
지금 또 얘기하신 것도 랑시에르에서부터 출발해서 이거를 다 엮고 일본 생활 글쓰기 이론도 다 포함해서 지금 논의를 하신 건데 사실 랑시에르가 주목했던 것은 아까 잠깐 얘기하셨지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거'. 그래서 노동자 글쓰기라는 한 형태에서는, 사실 지성의 문제하고 관련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노동자 글쓰기가 해방하는 건 뭐냐, 지성이 해방되는 거죠. 지성의 해방이 뭘 뜻하냐면, 노동자들이 무식하고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차별적으로 대우하거나 억압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사실 허용되는 사회적 기반을 만드는 논리인데. 노동자들이 글을 쓴다는 건 그걸 이제 스스로 해방하는 형태의 활동이기도 하죠. 그런데그게 이제 이오덕 선생님의 생활글쓰기와 연류되면서 아동문학이라는 문학적 범주 안에 넣기보다는, 일종의노동자의 글쓰기 안에서만 추출해 왔던, 그 지성의 해방의 문제를 여기서도 좀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논리를 좀 비약해서 설명하자면 그런 부분도 물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만약에 여공 문학이라는 명명법이 가능하다면, 굳이 굳이 '글쓰기'라고 부르는 표현으로 우리가 소환해서 할 필요가 있을까요. 다 그냥 문학이라고 붙이면 안 될까요.
김대성 편집위원
그럴 수도 있죠.
김만석 편집위원
그다음에 문학이라고 부르는 지형의 확장을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에, 이거를 글쓰기와 문학으로 나누어서 강조해야 하는 까닭이 혹시 있을까요.
김대성 편집위원
문학이라고 할 때 작가의 독점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기존에 있는 그 제도, 그 장치로서의 힘이 워낙 강해서 다시 그리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서, 글쓰기라고 이야기를 한 셈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김만석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굳이 구분 지을 필요는 없죠.
김만석 편집위원
왜냐하면 이게 지금 후반부에 이오덕 선생과 관련해서, 야학과 관련해서 중심에 있는 것은 묶음과 엮음이거든요. 사실 묶는 자가 있어야 하고 엮는 자가 있어야 하는 거죠. 묶고 엮는 거는 당대 한국 사회의 제도적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에 근거하지 않으면 사실상 논리상 불가능하죠. 그래서 이런 글쓰기들의 유형들은 대부분 다 묶음과 엮음으로 출현합니다. 그래서 더 이름을 알기 어려운 거죠. 이런 부분들이 전 좀 더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문학/사상 11호 출간기념회의 현장, 재밌게 읽으셨나요?편집자로서 나의 글쓰기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11월 19일 12호의 출간기념회도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산지니 책 > 비평지 문학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바다에서 세상을 본다면? - 문예비평지 『문학/사상』 12호-바다정동 출간 기념 구모룡 문학평론가와의 대화 :: 북토크 후기글 (2) | 2025.11.27 |
|---|---|
| 바다정동_문학/사상 12호 :: 책 소개 (1) | 2025.11.17 |
| 생동하는 글쓰기 _ 문학/사상 11호 :: 책 소개 (9) | 2025.06.02 |
| 한국문학과 대양적 전환_『문학/사상 10 - 대양적 전환』 북토크 후기 (2) | 2024.11.22 |
| 한국문학의 대양적 전환, 『문학/사상』 10호_대양적 전환 :: 책소개 (11) | 2024.11.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