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책 정리를 하다가, 할아버지가 쓰시던 옥편을 발견했다. 누런색 크라프트 용지로 거풀이 씌어진 옥편은 참 곱게 낡아 있었다. 식민지 시대에 건너온 물건인 듯, 한자-한글이 아닌 한자-일본어 사전이라는 것도 새삼 신기했다. 옥편을 잠깐 쓸어보노라니, 어린 시절 기억 한 자락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내가 해야 할 커다란 임무가 있다는 듯이 한 번씩 부르시곤 했는데, 달려가 보면 한자 책과 메모지가 펼쳐져 있곤 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깨알같이 작고 복잡한 한자를 크고 시원시원하게 ‘그려 드리는(!)’일이었다. 부수도 획순도 모르던 꼬맹이였던 데다, 인쇄 상태도 조악한지라 그것은 마치 커다란 임무처럼 여겨졌다. 때로는 “할아버지, 글자가 너무 복잡해서 못 그리겠어!” 하고 도망간 적도 있었는데, 그 일이 이토록 잊히지 않을 줄 몰랐다. 늙음을 탓하며 잠시 책을 덮기도 하셨겠지, 하고 생각하니 죄송할 뿐이다.
 


   두 가지 버전의 <차의 책>


오카쿠라 텐신이 쓰고, 정천구 선생이 옮긴 <차의 책> 대활자본이 발간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최근에 시력이 좋지 않은 '어르신을 위한 대활자본 도서 보급'사업을 실시했는데, 거기에 <차의 책>이 선정된 것이다. 20종(22책) 400만원 상당치를 '문학관, 도서관에 문학작가 파견' 사업에 참여한 80개 도서관ㆍ문학관에 배포했다고 하니, 아직은 ‘시범’ 단계인 셈이다. 앞으로 사업이 보다 확장되어 어르신들이 도서관에 발걸음하시는 횟수가 늘어나면 좋겠다. “여가는 있어도, 눈이 침침해서…….” 하셨던 분들께 부디 희소식이 되면 좋겠다.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주로 독서 확대기에 의존해온 약시자들에게도 ‘대활자본’은 유용할 것 같다. 독서확대기를 통해서 보거나, 특수도서관에 가지 않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대활자본을 펴들 수 있다면 책 읽는 기쁨이 두 배로 늘어나지 않을까.

(위) 일반인들을 위한 <차의 책> : 11포인트.
(아래) 노인 및 약시자들을 위한 <차의 책> 대활자본 : 17포인트.

조만간 교보문고 매장의 한켠에 ‘대활자본’ 코너가 생긴다고 한다. 아무쪼록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서점 나들이가 늘어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책의 향기와 더불어 늙어가는 일은 정말 멋진 일이지 않겠는가. 책을 좋아하는 어르신들께 아들딸, 손주, 며느리들이 대활자본 책을 선물해드리는 것도 좋은 일일 것 같다.

  얼마 전, 아마존에 들어갔다가 “어머니(아버지)의 날을 맞아, 킨들을 선물하세요.”라는 배너 광고를 본 적이 있는데, 절묘한 프로모션이란 생각이 들었다. 활자 크기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전자책 단말기의 이점을 강조해, 중․장년층 소비자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할부금을 부어가며 전집을 사주셨던 부모님의 은혜를 되갚는 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돋보기도 거추장스러운 어르신들께, 전자책 단말기는 더욱더 먼 나라 얘기일 터. 뭐니뭐니해도 맨눈이 최고라면, 대활자본이야말로 효자가 아닐까 싶다.

(좌) 킨들의 광고. (우) 독서확대기로 책을 읽고 있는 모습.
대활자본은 전자책 단말기나 확대기 없이도 맨눈으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덧) 이 글을 쓰고 있노라니, 사장님께서 <출판문화> 9월호에 대활자본 기사가 실렸다며 참고하라고 주신다. 나사렛대학교 점자문헌정보학과 학과장이신 육근해 선생님께서 쓰신 <출판의 새 지평을 열며-큰글자도서 출판에 부쳐>에는 큰글자도서 활성화 방안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부는 매년 장애인용 대체자료 구입비를 확보, 출판된 도서를 일괄 구매한다.’ 그리고 ‘정부는 장애인용 대체자료를 출판한 출판사에 국가 기여도를 인정한다’라는 항목이 눈에 띈다. 달리 말해, 노인과 장애인들을 포함, 모두를 위한 책(Books for everybody) 시대를 활짝 열기 위해서는, 출판사와의 정부의 협동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공공도서관이 노인들 및 장애인들에게 서비스를 하고 싶어도, 출판된 책이 없어 안타까워했다는 소문은 이제 그만 사라지길. 아무쪼록 <차의 책>에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대활자본을 펴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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