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타분한 할아버지들만 읽는 거라고 여겼던 <논어>가 다시 뜨고 있다. 온라인 서점에 <논어>를 검색해보면 수백 종이 화면에 뜬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책만 그렇다는 말이다. 올해도 한두 달에 한 번 꼴로 논어 관련 책은 꾸준히 출판되고 있다. 왜 사람들은 <논어>에 다시 읽고 있는가.

도덕불감증 정치인들이 큰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금을 탈루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위장전입을 하고도 관행이었다는 말 한마디면 그만이다. 참으로 뻔뻔스러운 얼굴이다. 이런 행태에 대한 역겨움이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았던 공자를 생각나게 했을 것이다.
 
스스로를 먼저 바로세우고 나아가 세상을 바로 잡고자 했던 공자.
사실 공자가 살았던 시대도 지금에 못지 않았다. 공자는 '춘추시대'(기원전 722-481)라 일컬어지는 시대를 살았다. 이 시대는 제후국들 사이에서 전쟁이 격화되고, 사회는 혼란스러웠으며, 제후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면서도 힘없는 백성들의 안위와 삶은 돌보지 않았다.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들은 세상을 제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려 날뛰었고, 예의와 도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子曰: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논어 자로편 13-6)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제 몸이 바르면 시키지 않아도 사람들은 하고, 제 몸이 바르지 않으면 시켜도 사람들은 따르지 않는다.”
내 마음이 참되지 못하고 내 몸이 바르지 못하면, 내 입에서 나오는 명령은 그야말로 빈말이요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빈말을 믿으며 누가 잠꼬대에 맞장구를 쳐주겠는가? 내 몸을 닦는 것이 그대로 남을 다스리는 일이다. 공자가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바르게 한다는 게 어디서 시작되겠는가? 바로 나에게서 시작된다. 내 몸을 바르게 하는 것과 집안을 바르게 하는 것, 나라를 바르게 하는 것, 그것들이 뭐가 다른가? 겉은 달라 보여도 속은 같다. <논어, 그 일상의 정치> 423쪽

공자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완성시키려 하였다.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 서른에 홀로 섰다." 자신을 세우지 않고 어떻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남을 이끌고 천하를 바로 세울 것인가. 위장전입, 세금탈루의 멍에를 뒤집어쓰고 어찌 나라를 다스리려 하는지.

子曰: “苟正其身矣, 於從政乎何有? 不能正其身, 如正人何?” (논어 자로편 13-13)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제 몸을 바르게 한다면, 정치를 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제 몸을 바르게 할 수 없다면, 남을 어떻게 바르게 하겠는가?”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치는 나를 바르게 하는 데서 시작되고, 남을 바르게 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데서 끝난다. 이 평범한 진리를 모르고서 정치를 한다면, 반드시 제 몸이 고달프고 사람들이 괴로워진다. 또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결코 제도만으로 되지 않는다. 제도조차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운용하지 않는가. 어찌 내가 바로 서고서 남을 바로 세우려고 하지 않는가. <논어, 그 일상의 정치> 430쪽

공자가 말한 '어짊'과 '도덕'은 이후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 이념이 되었고, 선비사상으로 이어진다. 선비는 학문을 익혀서 벼슬살이를 하는 사람인데, 선비는 천하 사람들보다 먼저 걱정하고 천하 사람들보다 나중에 즐거워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선비는 제 한 몸을 편안하게 하려는 자가 아니라 천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선비는 오로지 천하의 태평을 위해 배우고 실천하는 존재이다.

子曰: “士而懷居, 不足以爲士矣.” (논어 헌문편 14-2)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선비가 되어서 편안히 살 마음을 먹는다면, 선비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우리 정치인들이 공자 사상, 선비 사상의 10분의 1만 깨우친다면 서민들이 좀 덜 고달파지지 않을까?

논어, 그 일상의 정치 - 10점
정천구 지음/산지니

Posted by 아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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