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저자 김비 작가님의 이야기가 9월 20일 경향신문에 실렸습니다!

 


 

서로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남다른 부부’가 사는 법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펴낸 박조건형·김비

▲ 일상을 드로잉하는 박조건형과 소설가 김비 부부가 함께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를 펴냈다. 우울증 환자와 성소수자인 부부는 서로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끌어안는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만나기 전에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드로잉 작가와 소설가 부부, 페미니스트와 성소수자 부부, 만성 우울증 환자와 트랜스젠더 부부. 두 사람에겐 다양한 수식이 가능하다. 실제 만난 두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서, 그저 ‘박조건형’과 ‘김비’ 부부였다. 세상이 어떻든, 누가 뭐라든 서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고 사랑해서, 함께 있을 때 더 빛날 수 있는 사람. ‘상대방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란 사랑의 교과서적 정의를 이들에게서 봤다.

 
박조건형(41)과 김비(47) 부부가 그리고 쓴 책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일상, 그리고 쓰다>(김영사)를 펴냈다. 25년간 앓은 우울증, 성소수자의 삶, 열악한 노동의 현장,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와 소소한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엮은 책이다. 슬플 수도, 비장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담백하고 유쾌하게 털어놓는 두 사람이 궁금해졌다. 부부를 지난 17일 서울 중구 정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 예술과 인생의 조력자 


시작은 박조건형의 책이었다. 박조건형이 그린 그림을 책으로 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그의 발목을 잡았던 우울증은 이번에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책을 준비하면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책을 포기하려 했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김비였다. 박조건형의 그림에 김비가 글을 보탰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첫 책이 출간됐다.


맞잡은 두 사람의 왼손 약지엔 각자 건(建)과 비(飛)가 한자로 새겨져 있었다. 결혼반지 대신 새긴 서로의 이름 글자다.


“짝지가 공저로 참여한 책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보고 관심이 생겼어요. 소설가란 걸 알게 됐고, 홈페이지에 글을 남기곤 했죠. 김비 작가의 팬으로 시작된 관계죠. 그러다가 서울에 올라와 처음 만난 뒤 호감을 갖고 사귀게 됐어요.” 김비는 “처음엔 이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호기심에 만나다가 또 헤어지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나를 숨기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귀한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서로의 상처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강한 끈이다. 박조건형은 “우울증 때문에 삶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 미래에 대해서도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데, 옆에서 지켜봐주는 최고의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비는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준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림과 소설을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일으켜 준 것도 서로였다. 박조건형은 대학 만화예술학과에 진학했지만 우울증 때문에 학업을 포기했다. 어머니가 있는 경상남도 양산으로 내려가 정유공장에 생산직 노동자로 취직하면서 그림을 손에서 놓았다. 하지만 데이트 도중 그려준 그림을 보고 김비가 너무 좋아했다. “만나면 자꾸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니 억지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보니 계속 그려볼까라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비는 2007년 <플라스틱 여인>으로 여성동아 장편소설상을 탔지만, 그 이후에 잘 풀리지 않았다. 함부로 보관해 깨져버린 상패를 집 구석에서 찾아 정성껏 붙인 건 박조건형이었다. 박조건형은 ‘영업이사’를 자처하며 출판사에 투고를 했고, 그 결과 <빠스정류장>이 출간됐다. 김비는 “신랑이 없었다면 지금도 소설을 안 쓰고 잊혀졌을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저를 끄집어내줬어요. 서로가 서로를 끄집어내고 일으키는 과정들이 쌓여 신뢰가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 우울증을 끌어안고 사는 법


두 사람에겐 우기와 건기가 있다. 박조건형이 우울증에 빠져 무기력한 시기가 우기, 우울에서 빠져나와 활기차게 보내는 때는 건기다. 김비는 “우기일 땐 힘들어 하지만 건기일 땐 누구보다 경쾌한 삶을 산다. 보이지 않는 밧줄에 옥죄어 있다가 풀려난 사람 같다”고 말했다.


사춘기 시절 정서적 돌봄을 받지 못했던 박조건형은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박조건형은 “우울증에 시달리다 빠져나오고를 반복하다보면 절망감도 크고 지친다. 하지만 나처럼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다른 사람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비는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우울증 또한 박조건형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말한다. 김비는 “제 정체성과도 똑같다. 나도 그걸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신랑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비가 박조건형에게 말했다. “승리하지 않아도 돼, 극복하지 않아도 돼. 버티고 있는 스스로를 칭찬하고 쓰다듬으면서 살아가는 것도 멋진 삶이야.”


■ 성소수자로서 “내 꿈은 자연사”


박조건형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한다. 박조건형은 “페미니즘은 약자들의 존재를 긍정하는 철학인 것 같다. 내게도 우울증이 있으니 약자로서의 정체성이 있다. 양성 쓰기를 하면 차별적 행동이나 발언을 조심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비는 성소수자로서 누구보다 삶과 치열하게 싸워온 사람이다. 김비는 “차별이나 편견을 많이 겪었지만 애써 기억하고 살진 않는다. 제 삶에 소중한 사람들만 생각하고 살아도 정말 바쁘다”며 “성소수자로서 일상을 지켜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역할 같다. 농담으로 내 꿈은 자연사라고 말한다”고 말했다.

 

이번 책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앞으로 공동작업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지난해 42일간 다녀온 유럽 여행기도 함께 책으로 엮어낼 계획이다. “우울증을 겪으며 비를 맞았다가 해가 쨍쨍 났다는 기록을 남기고, 성소수자로서 삶의 기록을 함께 남긴다면 귀한 기록이 되지 않을까요.” 김비가 말했다.

 

경향신문 이영경 기자 

 

기사원문 보러가기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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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오랜만에 인사 드리는 잠홍 편집자입니다.



지지난주 금요일, 김비 작가님을 뵙고 왔어요. 


봄날의 김비 작가님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이 라디오에 출연하게 되어서였는데요.


사진출처: 부산대방송국 페이스북


방송 시작을 알리는 ON AIR 등의 붉은 빛.

내심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핫)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캠퍼스에서 

방송국을 찾다가 길을 잃기도 했지만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소풍을 나온 기분으로 작가님과 함께 부산대 캠퍼스를 걸었습니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방송국 창문에서 보이는 나무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텐트를 펴고 있더라구요. 

위 사진에서 오렌지색 텐트가 보이신다면... 와! 눈이 참 좋으시네요 ^^



<김명건의 책 읽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담당 PD (겸 방송국장), 아나운서, 엔지니어 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 둘러 앉아 담소 중 //


지체 없이 스튜디오로 입장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저도 대학생 때 라디오 프로그램 하나를 맡았던 적이 있었는데요. 

심야 음악방송이라 준비할 게 많지 않았지만

그때 제가 혼자 PD/아나운서/작가/엔지니어 역할을 다 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시스템이 갖추어진 곳이었습니다 ! 


전날에도 밤샘 작업을 하셨다던 엔지니어분, 그리고 PD님


게다가 이번 방송은 음성 녹음뿐만이 아니라

보이는 라디오로 진행되었어요 (!)

김비 작가님, "대학교 방송국이 이렇게도 해요?" 하시며 미소를 감추지 못하셨죠 ㅎ


이 날 카메라 하나는 스튜디오 안에, 하나는 바깥에 설치됐어요.


보이는 라디오는 편집에 더욱 공이 들어갈텐데, 너무 감사했어요.



이날 인터뷰에는 미리 짜여진 질문지와 작가님께서 간단히 준비하신 답변이 있었지만

사실상 프리스타일로 진행되었습니다. 

종종 강연을 하시기도 하는 작가님의 입담과 김명건 아나운서님의 진행이 어우러져서 

라이브 같은 녹음 방송이 된 것 같아요 ㅎㅎ 



이 날 인터뷰에서는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이라는 제목의 의미,

소설의 착안하게 된 배경 등 책 속에서 미처 다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김명건 아나운서님은 시종일관 친절한 미소로 질문을 하셨는데

다소 난감한 질문을 하셔서 작가님을 놀라게 하시기도 했어요.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

과연 작가님은 어떻게 답변하셨을까요?!! 


이날의 인터뷰와 김비 작가님의 추천곡은 5/13 오후 1시 10분에 방송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방송을 여기서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녹음이 끝나고, 작가님께서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펜을 꼭 쥐셨습니다. 



방송국 소장용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에 싸인해주셨지요.


"to PUBS 

초대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즐거웠습니다"


참고로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은 한 권을 방송국에서 소장하고 

또 다른 한 권은 추첨으로 부산대 방송국 페북에서 추첨으로 선물하실 예정이라고 들었어요.

혹시나 아직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을 읽지 못하셨다면! 좋은 기회가 아닐까요 :)


>>바로 여기에 댓글을 달아주세요<<


활짝 웃는 모습의 김비 작가님, 김명건 아나운서님.


이 날 방송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표정에서 다 보이시죠? ㅎㅎ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퇴근시간이 가까워졌어요. 

이번 주말에는 집에서 소설 한 권과 뒹굴뒹굴해볼까 합니다.

독자 여러분도 즐거운 주말 되세요!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여기, 여전히 소설을 꿈꾸는 소설가가 있다. 다만 살기 위해 자신을 감추어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상처 받는 것에 익숙해져, 그것에 무뎌지는 자신을 마주하기 두려워지던 시기였다. 세상에서 고립된 게 외려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우연히 글을 쓰게 되었다. 겹겹이 쌓여있던 사연들을 내놓으며 억눌렸던 정체성을 길어 올렸다. 그렇게 글쓰기는 삶의 거의 전부가 되었다.

소설가 김비는 트랜스젠더이다. 학교에서 그녀는 세상의 편견을 배웠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정상’이란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에 희생되곤 했다. 생존을 위해선 몸가짐이나 행동, 말투를 조심해야 했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만이 사회에 내디딜 수 있는 길임을 공부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글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배려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그들에게 말을 걸 수 있다는 것이 큰 용기를 주었다.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학창시절부터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 흔한 백일장에서 상을 타본 경험 한 번 없었다. 글을 배우고 싶어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은 드라마 작가 교육원이었다. 방송극은 글도 쓰고, 돈도 벌 수 있게 해 줄 거란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초반에는 독특한 소재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선생이나 동기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상급반으로 올라가자 ‘난센스’란 규정이 돌아왔다. 애초부터 대중적인 코드를 바탕으로 한 방송극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기성의 가치관과 적당히 타협하며,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서사의 구조는 소수의 이야기를 담고 싶어 했던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소설, 추락하는 자들의 실패한 이야기

소설을 처음 쓴 것은 성소수자 온라인 동호회 게시판에서였다. 전에 써놓았던 방송극을 소설로 풀어 낸 것이었다. 사실 소설은 다른 어느 장르보다 전문적인 글쓰기이다. 단편의 미학과 장편의 문법도 엄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소설이 각별히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소수를 위한 글쓰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세상의 지배적인 가치를 단순히 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수의 이데올로기를 반성적으로 되물으며, 그것의 한계를 지시한다. 소설은 추락하는 자들의 이야기다. 온갖 성공의 스토리를 들려주는 자기계발식 영웅서사들이 만연한 시대에, 소설은 세상에 감추어진 가장 보통의 실패를 담는다. 소설에 자신의 사연을 위탁한 배경에는 아마 이런 연유가 있었을 것이다.

김비의 짝지 박조건형이 김비를 그린 그림. 글의 노동은 멈출 수가 없다. kimbee.net 자료

소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할 때, 게시한 작품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호응해 주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생각이 누군가의 마음에 가 닿는 환희를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동호회에서 알게 된 친구가 홈페이지를 개설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김비의 이야기를 더욱 경청하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마침 글쓰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고심 끝에 승낙했고, 그렇게 개설된 홈페이지(www.kimbee.net)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트랜스젠더 김비의 이야기에 세상이 응답하기 시작한 것이다.

홈페이지 개설은 그녀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김비의 이야기에 감응했다. 그녀의 사연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보듬었다는 말을 들을 때면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설레기도 했다. 반면 트랜스젠더에 대한 단순한 의문과 의심에서 찾아온 이도 적지 않았다. 때론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설이나, 성적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그녀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것은 선의로 응해준 각종 인터뷰들이었다. 그 즈음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도 상승하여, 여러 매체에서 김비를 찾곤 했다. 그녀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고자, 대부분의 제안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인터뷰는 진실을 전하기보단 그녀를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단일 뿐이었다. 기대가 실망으로 이어지는 날들이 연속되고 있었다.

문창과로 가는 대신 독서로 창작 연마

소모되는 시간이 쌓여갈 즈음, 다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잃어가던 자신을 다시 찾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완성한 작품이 ‘플라스틱 여인’. 트랜스젠더의 사랑과 비운을 담았다. 불안한 다수가 되기보단 안정적인 경계인이 되고자 한, 어느 여인의 선택에 관한 소설이었다. 이 작품으로 별다른 기대 없이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응했고, 당선되었다는 믿기 힘든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등단은 김비에겐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 여성동아 공모는 오직 여성들만 응시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만해도, 김비는 주민등록상 남자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관계된 기자가 김비의 성정체성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행히 심사에 오를 수 있었고, 심사위원들은 그녀의 가능성에 내기를 걸었다. 김비에게 등단은 단순히 소설가의 지위를 공인 받았다는 의미만은 아니었다. 그보단 오히려 세상이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받아주었다는 감격이 더 컸다. 등단 이후, 김비는 자신의 소설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한 없이 부끄러웠고, 그리하여 소설을 공부하고 싶다는 바람이 더욱 간절해졌다.

소설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다짐했지만, 별다른 방법을 알진 못했다. 문예창작학과 진학도 고려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만류했다. 창작을 아카데믹하게 습득한다는 것이 김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문예창작학과의 존재를 감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내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그리하여 그저 독서에 열중했다. 여러 선생님들의 작품을 찾아 읽었다. 작가 교육원에서의 경험이 서사적인 짜임에 대한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독서를 통해서는 주로 자신의 문장들을 점검할 수 있었다. 지금도 문장이 메말라 간다고 느낄 때면, 여전히 잘 써진 단편을 찾곤 한다.

김비의 짝지 박조건형이 그린 그림.

외면 당했지만 세상을 버리지 않은 소설가

등단 이후, 김비는 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음에 관해 탐닉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하기까지의 곤경과 그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담은 것이다. 그 과정이란 동일성을 억지로 찾아내는 게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여로에 가깝다. 그렇게 발표한 작품이 ‘빠쓰정류장’(2012)과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2015)이란 장편이다.

‘빠쓰정류장’은 폐암 말기의 순옥과 직장에서 사고로 다리를 잃은 남편, 그리고 트랜스젠더 리브 간의 일시적인 동행을 그린 작품이다. 이들은 존재조차 확실치 않은 사연 많은 버스정류장을 찾아 전국을 떠돈다. 세상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있던 이들이 삶의 여러 관문들(터미널)을 통과한다는 상상력이 이채롭다. 반면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은 비상계단이라는 한정된(혹은 금지된) 공간에서 저마다의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과정을 담은 미스터리다. 위아래로 끝없이 이어져 있는 계단 위에서, 살기 위해 오르거나 내려가야만 하는 군상들의 제자리걸음을 담았다. 대체로 비슷하게 살 것이 강제되면서도, 그 안에서 어떻게든 서열을 정하며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엾은 사람들의 일상을 신비롭게 묘사한다.

이처럼 김비는 절망 앞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곁에 있던 타자를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세상은 그녀를 쉽게 외면하곤 했지만, 그녀는 세상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김비는 한국문단에서도 약간은 비켜서 있다. 그녀는 마감이 없는 소설가이다. 청탁을 받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항상 쓸 수 있었다. 김비의 작품에 여러 출판사들이 응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소설이 조금 더 다양해 질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세상이 다채로운 만큼, 소설의 여러 매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기만을 바랐다. 매출의 규모가 문단 내 위상과 직결되고, 대형출판사의 바깥이 문단에서의 소외로 간주되는 시대이기에, 그녀의 바람은 더욱 소중하다. 배움을 ‘사는 재미’로 알고, 소설이 삶과 다르지 않은 김비의 이야기가 각별한 이유가 여기 있다. 다만 한 뼘 만이라도 더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그녀, 여전히 소설을 꿈꾸는 소설가 김비의 이야기는 언제라도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허민 문화연구자ㆍ인문학협동조합 연구복지위원장

한국일보 | 2016-04-24

원문 읽기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3월이 휘리릭 지나가면서

교보문고에서 진행했던 인문출판사 응원 캠페인! 산지니 편이 마감되었습니다.



산지니 편집자들이 직접 책을 소개하고,

독자분들께서 댓글을 달아 주시면 

추첨을 통해 열 분에게 책 선물을 보내드리는 이벤트였습니다.

댓글이 하나하나 달릴 때마다 "새 댓글 보셨어요?!" 하며 호들갑 떨기도 하고

읽고 싶으신 책들이 이렇게 다양할 수가! 놀라기도 했어요.  


그리고 며칠 전에 드디어(!) 책을 발송해드렸는데요.

독자분들의 선택을 받은 10권의 책을

저, 잠홍 편집자 마음대로 분류해 공개합니다.


※ 주의: 

아래 사진에 등장하는 책들은 실제로 보내드린 책이 아니라 

출판사 식구들끼리 필요할 때 꺼내 읽는 '샘플 책' 입니다. 

독자분들께 1분 1초라도 빨리 책을 보내드리고 싶어서

책을 부리나케 포장하는 바람에 이렇게 '대타'를 쓰게 되었네요. 양해해주세요ㅜㅜ 

보내드린 책들은 아래 보이는 것보다 훨~씬 컨디션이 좋은 새 책이랍니다.


1. 응답하라! 대화를 담은 책


논어, 그 일상의 정치』,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불가능한 대화들 2』




독자 댓글:

[논어, 그 일상의 정치 ]를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삶의 지혜가 담겨 있는 '논어'  순우리말 번역, 정확한 주석, 새로운 해석으로 참된 인간을 위한 정치, 공자의 실천사상을 이책을 통해 논어의  한자 하나하나의 속뜻과 말맛까지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고 싶습니다.


잠홍 편집자 답글:

고전을 주석 없이 이해할 수 있는 번역으로 만나는 건 참 드문 일인 것 같습니다. 

논어, 그 일상의 정치』에 이런 구절이 있는데요,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제 몸이 바르면 시키지 않아도 사람들은 하고, 제 몸이 바르지 않으면 시켜도 사람들은 따르지 않는다.”

(…)

바르게 한다는 게 어디서 시작되겠는가? 바로 나에게서 시작된다. 내 몸을 바르게 하는 것과 집안을 바르게 하는 것, 나라를 바르게 하는 것, 그것들이 뭐가 다른가? 겉은 달라 보여도 속은 같다. 


논어, 그 일상의 정치』가 독자님의 하루하루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이 책은 대활자본도 나와 있어서 눈이 좋지 않으신 분들도 편하게 보실 수 있어요!)

논어, 그 일상의 정치 - 10점
정천구 지음/산지니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 <정신 분석적 발달이론의 통합> 두권의 책이 흥미로워 보입니다. 부산에서 꾸준히 인문도서들을 출판하고 있는 것은 멋지고 의미있는 일 인것 같아요. 앞으로도 좋은책 많이 발굴해주시길!!


위대한 사상가들의 내밀한 삶을 조명한 책과 정신분석학계의 고전을 골라 주셨네요. 

소풍의 계절 봄인 만큼, 들고 다니며 읽기 좋은 작은 판형의 책을 드리고 싶어서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를 보내드렸습니다. 이 책은 아렌트와 하이데거의 편지를 토대로 한 최초의 책입니다. 읽으시면서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에게 손 편지를 쓰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ㅎㅎ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 10점
엘즈비에타 에팅거 지음, 황은덕 옮김/산지니



[불가능한 대화들2]를 읽고 싶습니다. [불가능한 대화들]을 무척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하여 두번째 이야기도 만나고 싶어요. 소설, 평론, 시인들의 이야기. 문학 안에서 처절하게 고민하고 공존하려는 작가의 모습을 기대합니다.


와! 5년 전 출간된 불가능한 대화들도 읽어보고 신청하신다니, 너무 반갑습니다. 불가능한 대화들 2』는 제가 편집한 첫 인터뷰집이어서 기억에 많이 남는 책이기도 해요. 좋은 구절이 많아 메모하느라 교정교열이 늦어졌어요^^ 삶의 새로운 질문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덧붙이고 있는 작가들, 그리고 비평가들의 뜨거운 말들. 그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불가능한 대화들 2 - 10점
정유정 외 지음, 오늘의문예비평 엮음/산지니


2. 이야기의 힘! 소설


『물의 시간』,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마르타』




정영선 작가님의 [물의 시간]이 읽고 싶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국모인 명성황후에 대한 시해사건을 시간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정영선 작가님이 재해석 하셨다하니 어떤 구도로 이루어져 있는지 한번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기네요. 정영선 작가님은 역사학을 전공하신 독특한 이력의 창작 소설 작가님이시죠, 본래 작가라 하면 문학과 관련된 분야에서 공부하신 분들이 대개는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데 정 작가님은 역사학을 전공하셨는데도 소설작가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자기만의 길을 가신 분이죠, 그래서 역사학을 기반으로 새롭게 명성황후라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를 새로운 각도로 만들어 내는 창작의 소설이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하기만 합니다, 기존 명성황후를 그려낸 작품들과는 차별화된 조금은 색다른 작품으로 만들어진 내용이라 알고 있습니다.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작가라는 점에서 정영선 작가님의 물의 시간을 꼭 한번 읽고 싶어 신청하게 되네요, 혹여라도 당첨이 안될지언정 조만간 구입해서 읽어볼 생각입니다.


정영선 작가님께서 역사학을 전공하셨다는 점까지 꿰고 계셨군요! 『물의 시간』은 말씀하신 대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시간'이라는 주제로 색다르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정영선 작가님께서는 “그동안의 픽션이 명성황후를 야심찬 정치가, 지엄한 국모, 남편의 사랑을 바라는 여자로 그렸다면 이 소설에선 폐경으로 자신의 시간을 잃은 여자이자 조선의 시간을 잃어 가는 황후로서의 모습을 복합적으로 담으려 했다." 고 말씀하셨어요.

즐거운 독서 되시길 바랍니다!

물의 시간 - 10점
정영선 지음/산지니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제목부터 확 끌리네요~ 닫힌 문 출구가 없는데 어떻게 해쳐 나갈지 한 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기대되는 책이네요 ㅎㅎ

감사드립니다. 항상 수고하시고 화이팅하세요. 화이팅!


제목의 의도를 간파하셨습니다 :) 제목이 설명하고 있는 독특한 공간, 출구가 없는 비상계단을 주인공들은 어떻게 오르내리고 빠져나갈까요? 서스펜스와 반전이 있는 소설이지만, 힌트를 하나 드리자면... 표지에 답이 있습니다ㅎ 독자님도 화이팅 하세요!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마르타] 를 읽고싶어요. 지금은 많이 변화되어 여성이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여자가 홀로 살아간다는것이 얼마나 힘들고 편견들과 싸워야하는지 느끼고 있기에  남편 없이 삶을 살기위해 사회에 나와 겪는 여인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특히  근대 유럽의 산업화를 배경으로 했다니 얼마나 많은것들을 생각하고 고민해봐야할지 문제를 던져줄것같아 기대도 됩니다.  작가의 의도대로 현재에 여성으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사실적 문제들을 공감하고  여성이 교육과 노동에서 소외된 사회 시스템에 적극 의사표현을 하는 의지도 가져보고 싶습니다.


많이 변화된 한국 사회라고 하지만, 역자 장정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1800년대 폴란드와 2000년대 한국은 닮은 점도 있는 것 같아요. 여성의 노동이나 교육, 가정 안팎에서의 역할에 대한 제한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니까요. 『마르타』와 함께 이런 문제에 대해 적극 의사표현 해주신다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좋은 일이지 않을까요. 미리 감사드립니다! 

마르타 - 10점
엘리자 오제슈코바 지음, 장정렬 옮김/산지니



3. 변화하는 중국, 온전히 이해하기


『중국 영화의 오늘』, 『방법으로서의 중국』



해양풍경, 은유를 넘어서,  발트3국에 숨겨진 아름다움과 슬픔, 나는 나, 중국 민족주의와 홍콩 본토주의, 흩어진 모래 등 제 책꽂이에 꽂힌 산지니의 책만 다섯 권이 훌쩍 넘네요. 강내영 선생님의 <중국영화의 오늘>을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100년후에는 모두 아시아의 고전이 될 훌륭한 책들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이 만들어 주세요~^^


와-- 이제 산지니 책을 여섯 권 갖게 되셨네요^^ 꾸준히 산지니 책에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중국영화의 오늘』은 동시대의 중국영화를 담고 있다는 면에서 기존의 중국영화 관련 서적들과 차별화되는 책입니다. 기존의 서적들은 기념비적인 과거 작품이나 저명한 감독들에 집중하고 있거든요. 책 읽으시면서 영화도 함께 보시면 재밌겠죠?ㅎㅎ 

앞으로도 매의 눈으로 좋은 책을 찾아주시는 독자 여러분, 그리고 아시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들과 함께하는 산지니가 되겠습니다. 

중국영화의 오늘 - 10점
강내영 지음/산지니


늘 아시아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책을 출간하는 출판사라 무척 고마웠습니다. 미조구치 유조가 지은 <방법으로서의 중국>은 이에 걸맞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꼭 읽고 싶습니다.


따뜻한 응원 감사합니다^^ 중국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저자 미조구치 유조는 오래 전부터 동아시아적 탈근대론에 천착해온 학자이지요. 그의  첫 저서이자 중국학에 대한 그의 신념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책이 『방법으로서의 중국』입니다. '중국을 온전히 바라봄으로써 우리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미조구치의 시각이 독자님께도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방법으로서의 중국 - 10점
미조구치 유조 지음, 서광덕.최정섭 옮김/산지니


4. 산지니의 고향, 부산에 대한 책



부산을 맛보다』, 『금정산을 보냈다



 


<부산을 맛보다>가 눈길이 가네요. 부산에서 시작해 올해도 10년이 된 출판사라는 소개를 읽으니, 부산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 같아 믿음이 갑니다. 부산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부산 출판사가 말하는 부산이야기. 돼지국밥 같은 진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아요. ^^


산지니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부산을 맛보다』를 골라주셨네요~ 이 책은 일본으로도 수출된 (산지니의 첫 수출도서(!)여서 산지니 식구들에게 더욱 특별한 책이기도 합니다. 돼지국밥과 해산물뿐만 아니라 멋진 까페와 퓨전요리까지, 지역별 맛집을 소개하는 책이니 부산을 맛보다』 들고 조만간 부산 한 번 들러주세요! 

부산을 맛보다 - 10점
박종호 지음/산지니


[금정산을 보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제 곁엔 늘 당연히 금정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계절 내내  저와 가족들을 말없이 품어준 금정산에 대한 시인의 생각 또한 엿보고 싶어요!^^


이 시집이 출간되고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했을 때 "금정산은 어떤 산인가"하는 질문을 받고 최영철 선생님께서 "금정산은 서울의 남산 같은 산"이라고 하셨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ㅎ 독자분께서는 이런 설명이 전혀 필요하지 않으시겠지만요. 올해도 넉넉한 품을 가진 금정산과 아름다운 사계절 보내시길 바랍니다 ^^

(참고: 이 책도 큰 글씨 책으로 읽으실 수 있어요!)

금정산을 보냈다 (양장) - 10점
최영철 지음/산지니



전국 곳곳에 계신 독자분들로부터 이렇게 응원을 받으니

산지니 식구들, 힘을 내지 않을 수 없네요 :)

댓글 달아주신 모든 분들께 답변 드리고 책을 보내드릴 수 없어 아쉽습니다.


올해도 좋은 책들로 인사드릴게요.

감사합니다!


Posted by 비회원

3월 11일 저녁, 

부산 남산동의 작은 도서관에서 세상에 하나뿐인 자리가 열렸습니다. 



바로 '아름다운 낭독회'.

남산역 근처에 있는 금샘마을도서관에서 매달 열고 있는 행사인데요. 

평소에는 도서관 식구들이 오손도손 모여 서로 책을 읽어주신다고 하는데

이번 낭독회는 작가님과 함께한 자리라 더욱 특별했습니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김비 작가님께서 함께해주셨어요. 

소리내어 작품을 읽다 보면 눈으로는 휙휙 지나갔던 단어들이 새롭게 다가오기도 하고 

목소리로 전해지는 말은 정말 그 자리, 그 시간에만 있으니 세상에 하나뿐 아닐까요.

그래서! 저 잠홍 편집자 이 자리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ㅎㅎ 



길치인 나머지 약간 길을 헤메다 도서관에 들어서자 

작가님과 몇몇 독자분들께서 담소 나누고 계셨습니다. 도서관 구경 조금 하다가 

낭독 시작하기 전에 와인 한 잔! 


왼쪽이 김비 작가님이세요.


그러면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세계로 들어가 볼까요.



문이 닫히자, 세 사람이 섰던 좁은 공간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진흙 같은 빛이었고 이상한 암흑이었다. 그들을 뒤덮은 묵직한 어둠은 지독히도 끈적거렸다. 늪에 몸을 빠트린 듯 버둥거리기라도 하면,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더욱 깊은 곳으로 침잠할 듯했다. 

(...) 

순간 어둠에 갇힌 사방이 몸을 떠는가 싶더니, 그들의 머리 위에서 파팍 불꽃이 튀었다. 비상등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붉은 빛이었다. 침이 고이는 주홍색 불빛은 순식간에 작은 공간을 삼켜버렸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세 사람은 이제 빛의 피를뒤집어썼다. 시뻘건 불빛 아래 겁에 질린 아내의 모습이 어쩐지 사자(使者)를 닮았다고 남수는 생각했다.

_프롤로그 '벌레' 중에서


소설의 도입부를 읽어주시고 작가님께서는 『붉 닫 출』의 배경으로 착안하게 된 실제 공간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부산 도심부에 있는 *** 영화관은 겉은 휘황찬란하지만 내부는 오래된 건물입니다. 

그곳의 비상계단을 올라가면서 작가님께서는 

'어쩌면 나갈 수 없는 공간을 그저 앞에 가는 사람의 뒤꿈치만 보며 걷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셨다고 해요. 그 느낌이 우리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셨고 

그렇게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초호화 백화점의 비상계단'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독자분들과 『붉 닫 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소설의 주인공 남수는 사실 좋아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요. 

저도 동의합니다. 남수는 공장의 생산직, 택배기사 일 등을 전전하다가 

아무리 노력해도 줄지 않는 빚 때문에 가족과 동반자살을 결심한 가장입니다. 불신과 열패감으로 가득한 남수는 결코 순수하거나 정의로 똘똘 뭉친 멋진 주인공이 아니죠. 

그런 남수에 대해 제가 연민이랄까 공감을 느끼게 된 지점은 바로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아버지는 남수에게 어떤 의자로 기억되는데요. 작가님께서 읽어주신 부분을 옮겨 볼게요.


이미지 출처: http://alamode.news/user/nopynalda

남수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엔 언제나 그 의자가 있었다. 나이가 들고 시간이 지나며 판잣집에 대한 기억은 거의 대부분 사라졌는데, 유독 그 의자의 모습은 항상 기억 속에 선명했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 의자엔 언제나 그의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도망가버린 엄마를 찾아오라며 술에 취해 어린 남수에게 주먹질을 해대고 온 집안의 물건들을 엉망진창을 만들어놓고 나면, 그는 언제나 이백 원짜리 청자 담배를 물고 그 의자에 앉았다. 한쪽 다리가 부러져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데, 벽에 기대어선지 그 의자는 용케도 아버지의 몸뚱이를 버티고 서 있었다. 아버지는 그 의자에 앉아 담배 연기를 뿜으며 공장 벽을 타고 오르는 시커먼 흙먼지와 곰팡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술에 취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남수는 더욱 더 자주 그 의자에 앉아만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아야 했다.

-'의자' 중에서


이 부분을 읽고 나니 어느 독자분께서 '아버지의 의자' 라는 노래도 있다고 알려주시더라구요.



"아버지는 의자 하나 남겨 놓은 채 / 지금 그 어디로 떠나셨나요" 

라는 가사는 남수가 할 것 같은 말이네요. 


혐오스럽지만 그리워할 수 밖에 없는 아버지의 기억을 떨치려 애쓰며, 

남수는 끊임없이 계단을 오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올라왔는지 알 수 없고 다리가 무감각해졌을 때쯤,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붉은색 벽 위에 쓰인 두 글자.


'다시'


너의 구구절절한 투정 따위 알겠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_'의자' 중에서


김비 작가님이 말하시길, 

'다시'는 누군가를 길어올리기도, 농락하기도 하는 말입니다.


'다시 시작해보자', '다시 일어나자'.

희망의 언어로 자주 쓰이지만 때로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책의 표지에도 '다시'가 여러 번 적혀 있는데요. 


 

가운데 부분에 연한 회색 글씨로 쓰여진 '다시'들. 보이시나요? 

참고로 표지에는 작가님께서 직접 그리신 일러스트와 캘리그라피가 쓰였습니다.


위 인용문의 '다시'는 탈출구를 찾아 고통을 견디며 계단을 오른 남수를 무너뜨리는 말이지만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또 다른 모양으로, 체온으로 다가옵니다.

'다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람 중 하나는 장애가 있는 남수의 아들 환이 이구요. 


작은 테이블 여럿을 이어붙여 만든 낭독의 장. 하나둘 독자분들이 모여 테이블 주위를 꽉 채웠습니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아름다운 낭독회에 참석하신 어느 독자분께서는 

"작가님이 낭독해주시고 이야기해주시는 것 들으면서 책을 읽으니 

소설인데 에세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하셨어요. 

작가님이 책을 직접 읽고 그 맥락을 나눠 주시고,

독자분들이 스스로의 배경을 모아 책을 이야기해주시니 

저도 몇 번 읽은 이 작품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낭독회가 마무리될 즈음, 노란 공책 하나가 테이블 주위를 돌았습니다. 

공책에는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며 그 날의 감상을 적었어요. 


+

저는 집 근처에 시립도서관이 있어서 큰 공립도서관을 이용하는 편이라

마을도서관 방문이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금샘마을도서관처럼 작은 도서관들은 책을 읽고 빌리는 공간뿐만이 아니라 

마을의 사랑방 역할도 하고 있지요.

사진출처: 금샘마을도서관


'아름다운 낭독회'에서 저에게 놀라웠던 건 

작은 공간에 예상보다 많은 분들께서 찾아와주시고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함께해 주셨다는 점이었어요. 

구비하고 있는 도서가 많고 다양한 것도 중요하겠지만, 

에 대한 어떤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지야말로 

책과, 공간과 관계를 맺고 이어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어느 독자분께서 말씀하셨듯, "밤에 언어를 나누는 즐거움"을 만들어주신 

금샘마을도서관 활동가 여러분, 그리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금샘마을도서관 찾아가는 길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안녕하세요, 여러분. 

봄과 함께 어김없이 찾아온 제비...가 아닌 잠홍 편집자입니다 :)

오늘은 마을도서관에서 열리는 귀한 자리, 낭독회에 대해 알려드리려고 해요. 


남산역 근처에 있는 금샘마을도서관은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작은 도서관입니다.

매달 '아름다운 낭독회'를 열어 

소리내 책 읽는 즐거움을 나누고 계신데요.


사진출처: 금샘마을도서관


이곳에서 이번 주 금요일 (3월 11일)에는 소설가 김비 작가님께서 직접!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을 낭독해주신다고 하네요.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지음 | 문학 | 국판 268쪽 | 13,000원 

| 2015년 10월 20일 | 978-89-6545-319-2 03810

“희망이라고 다 옳은 게 아냐. 어떤 희망은 후련한 절망만도 못해.” (98쪽)

동반자살을 결심한 가족, 비상계단에 갇히다. 
희망이 '고문'이 된 시대, 이 장편소설은 우리를 둘러싼 암흑으로 몸을 던져 희망이 아닌 '후련한 절망'에서 첫발을 내딛는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인 김비 작가의 네 번째 장편소설. 



지은이: 김비

1971년 남과 북의 경계 위, 삶과 죽음의 경계 위,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경계 위에서 태어났다. 2000년 서른 살의 나이에 ‘여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012년 세계문학웹진 『국경없는문학』www.wordswithoutborders.org의 세계 퀴어문학을 소개하는 자리에 단편소설 「입술나무」의 영어판을 게재하였고,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를 출간했다. 부끄러운 기억 같은 책 몇 권을 썼으며,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 데 함께했다.


///


『붉,닫,출』의 첫 출간기념 행사에서도 작가님께서 책을 낭독해주셨는데

글로 읽는 것과는 또다른 생동감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번 행사에도 참가할 계획이에요. 주저 말고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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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샘마을도서관 아름다운 낭독회:『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일시: 3월 11일 (금) 저녁 7시

장소: 금샘마을도서관

문의: 금샘마을도서관 051-512-1742





참고로, 낭독회에는 위 드로잉을 그려주신 김비 작가님의 짝지, 박조건형 님도 자리하신다고 하네요.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여러분은 서점에 가면 어떤 책들이 눈에 들어오시나요? 저는 표지가 예쁘거나, 주위에서 많이 들어, 제목이 친근한 책들을 주로 구매한답니다. 지난 일요일에도 그렇게, 책 한 권을 구입했습니다. 서점에서 익숙한 책이 눈에 들어왔는데요. 산지니 도서『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이었습니다. 마침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라 바로 구입했습니다. 




  표지가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표지 일러스트와 캘리그라피를 작가님께서 직접 하셨더라구요. 더욱『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이 궁금해지지 않나요? 

  이 책은 김비 작가님의 장편소설입니다. 160층 백화점, 정확하게는 비상계단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 탈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위, 아래의 층으로 오르내리지만 그들에게 나타난 것은 또 다른 계단과 ‘다시’라는 절망입니다.

  이 소설의 시작은 남수네 가족이 비상계단에 갇히면서부터 시작됩니다. 택배기사인 남수, 무기력한 삶을 살아 온 아내 지애, 뇌 손상을 가지고 태어나 팔과 다리도 불편한 어린 아들 환이. 이들은 가난한 현실에 동반 자살을 계획하며 마지막 만찬을 위해 호화스러운 백화점에 갔다가 갇혀버리게 됩니다. 몇 층인지 알 수 없는 계단, 일반적인 색과는 다른 붉은색 비상등, 그리고 굳게 닫혀버린 문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하지요. 남수는 자신의 삶을 본인의 의지로 끝내고 싶어 합니다. 이대로 알 수 없는 존재에 농락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비상계단의 출구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처럼 비상계단에 갇혀 출구를 찾으려 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지요.

여기 이 세계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가 어디든 몸을 눕히고 싶은 곳이 나타나면, 그곳에 작은 집을 삼고 추억을 만들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살겠다고 말했다.  p233


  저는 그 중 ‘수현’이란 인물과 ‘정화’라는 인물이 인상 깊었습니다. 수현은 가슴이 달린 20대 청년이고, 정화는 아픈 엄마와 함께 사는 가난한 집의 가장이었습니다. 두 인물은 남수네 가족과 가장 오래 함께하는 인물이기도 하고, 가장 선한 인물이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정말 그들이 인상 깊었던 것은 암흑과 같은 상황에서도 둘이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며 새로운 꿈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응원하며 짙은 색 크레파스를 건네는 환이도 귀여웠습니다. 환이는 크레파스로 그들이 원하는 집을 그리라고 했고, 수현이 남수에게 건네는 칼을 보며 상어가 나타날지도 모르니 그냥 수현이 가져가라고 합니다. 붉은 등이 파란 등으로 변할 때, 바다 속이라며 유일하게 좋아하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인물들은 같은 상황 속에서도 각자의 해답을 찾기 위해 계단 위로, 아래로 떠납니다. 결국 남수네 가족만 남고, 그들은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계단 위를 올라갑니다. 

  비상계단은 우리의 삶과 닮아있는 또 다른 세계입니다. 자의와 타의에 의해 오르락 내리락 거리지요. 갇힌 이유도, 탈출의 이유도 모른채 우리는 그저 탈출구를 찾을 뿐입니다.

과연 진정한 삶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비상계단에서 탈출해야할까요.  


 벌써 마지막이라니 아쉬움이 남네요. 하지만 인턴 활동을 하며 평소에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히 했던 글쓰기와 독서를 다시 시작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조미형 작가님과 최은영 작가님을 인터뷰하며 소설과 희곡. 두 장르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볼 수 있어 저에게는 의미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저의 인턴일기를 읽어 주신 분들과 산지니에 감사드립니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안녕하세요, 여러분. 잠홍 편집자입니다. 

연휴에는 푹 쉬셨나요? 

부산은 겨울인가 봄인가 싶을 정도로 따뜻한 날씨였는데요.

저는 새해맞이 등산을 갔다가 꽃이 피어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12월 말의 철쭉이라니!


그런데 '12월 철쭉'으로 검색하면 사진이 참 많이 나오네요...ㅎ_ㅎ 사진출처: http://bit.ly/1TBwlYh


지구온난화는 현실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기후변화와 신사회계약>을 추천해드리는 바입니다. 

(새해에는 당당한 홍보...!)


2016년이라는 숫자가 슬슬 익숙해져가는 지금

산지니 어워드는 2015년, 저 건널 수 없는 강 너머에 두고 왔으리라 생각하셨겠지요.


훗... 


새해가 밝았다고 방심하시면 아니되는 것입니다.


산지니 어워드의 완결판


산지니 디자이너와 편집자가 편애하는 


2015년의 귀한 책!


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럼 어서 어서 만나 보실까요.



1/ 다시 시작하는 끝

조갑상 소설집



단디SJ 편집자님이 뽑아주신 책은 제목에서부터 가슴 저릿한 느낌이 오는 

조갑상 작가님의 소설집 <다시 시작하는 끝> 입니다. 

"25년만에 재발간된 만큼 의미가 큰 책"이라고 하셨는데요. 


1990년 처음 출간된 이후 다시 만나는 작가님의 첫 소설집 <다시 시작하는 끝>은 데뷔작 「혼자웃기」와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사라진 하늘」을 비롯해 총 17편의 중단편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작품 수만큼이나 묵직한 삶의 이야기를 전하는데요. 특히 재출간본에는 등단 후 두 번째로 발표한 소설 「방화」가 수록되어 「혼자웃기」,「은경동 86번지」와 함께 은경동 3부작을 이룹니다. 소설에는 고단한 삶과 그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들, 공간에 대한 긴 묘사, 그리고 쉬이 위로하지 않는 시선이 존재합니다. 독특한 상상력과 스타일로 무장한 소설의 홍수 속에서 오랜만에 현실을 삼켜 소화하는 고통을 고스란히 담은 소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끝> 재출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작가로서 놓치지 않고 추구하려 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선생님께서는

"사람이 억압당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추구하는 바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는 삶과 사회를 줄곧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분단이라는 어려움이 드리워 있어 

더욱 예민했다"고 답하셨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끝 - 10점
조갑상 지음/산지니


2/ 내 안의 강물 


김일지 소설집



엘뤼에르 편집자님은 기억에 남는 책을 <내 안의 강물>을 뽑아 주셨어요. 여성 작가의 소설집으로서 편집하면서 보람을 느끼셨다고 하는데요. 

"중편작의 여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뭐랄까..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도시인의 느낌이 표지와 잘 어우러져서 올해 제게 의미 있는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표지, 정말 예쁘죠? 실물로 보면 색감이 훨씬 멋지답니다.


앞에서 언급된 중편 「내 안의 강물」은, 6년째 동거 중인 한 연인의 삶을 교차하여 그려내고 있습니다. 동거 형태의 불확실한 사랑 속에서 흔들리는 여자(연이)와 그런 그녀에 대한 사랑이 깊어져가는 남자(준규)의 상처와 고민, 변화의 양상이 소설의 주요한 테마이고요. 두 주인공은 오랜 기간 함께 살아왔지만 서로 자신의 과거와 상처를 상대에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깊은 정을 통하는 연인일지라도, 내면의 상처를 보여줄 수 없는 현대인들의 취약한 관계성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결혼이라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아가던 그들은 연이가 수술을 위해 열흘간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계기로 관계가 보다 끈끈해집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학대를 겪었던 연이와 기혼자였던 아버지의 사생아로 태어난 준규는 각기 다른 상처를 서로 드러내지 못하고, 그들 마음의 생채기는 결코 봉합되지 못합니다.



내 안의 강물 - 10점
김일지 지음/산지니




3/ 조금씩 도둑


조명숙 소설집



조명숙 작가님의 <조금씩 도둑>은 온수입니까 편집자님과 제가 공동 선정한 책입니다.


온수입니까 편집자님은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섬세하고 치밀하게 표현했다"고 적어 주셨는데요.

저는 저자와의 만남에서 정미숙 평론가님께서 짚어 주신대로 후각, 촉각을 활용하여 인물과 세계를 만들어내시는 점, 그리고 여성의 삶에 대한 선명한 시각이 감명 깊었습니다.



작가님께 '몸'의 의미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조명숙 작가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정신이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몸이 잖아요. 제가 나이가 드니까 그런게 보이더라고요. 어느날 한의원에 갔는데 어르신들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서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아픈 것은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 사람의 아픈 부분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픈 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함으로서 그 사람의 내면적인 고통을 조금 더 또렷하게 나타낼 수 있었고요.



조금씩 도둑 - 10점
조명숙 지음/산지니



4/ 소금 성자

정일근 시집



 추천을 받다 보니 소설집이 많았지만2015년은 산지니 시인선 002가 탄생한 해이기도 합니다.

정일근 시인의 열두번째 시집, 등단 30주년 기념 시집 <소금 성자>에서는 시인의 정제된 철학이 빛을 발하고 있는데요.

표제작에 등장하는 '성자聖子' 히말라야에서 '소금 받는 평생 노역'을 하고 있는 한 노인입니다

네팔 지진 사태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집이 나오게 되자, 정일근 시인은 인세 전액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네팔 지진 구호성금으로 내놓았습니다올해 초에 네팔 신두팔촉 지역에서 있을 대한적십자사의 구호활동에 직접 참가하시기도 할 예정입니다

온수입니까 편집자님은 "시가 물론 좋았고 앞으로도 산지니가 좋은 시인을 만날 수 있게 다리 역할을 해준 것 같아요."라며 이 책을 뽑으셨어요

<소금 성자>출판진흥원에서 '이번 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지요. 정일근 작가님, 축하드립니다!

 


소금 성자 - 10점
정일근 지음/산지니



5/ 패션, 영화를 디자인하다


진경옥 



진경옥 교수님의 <패션, 영화를 디자인하다>는 권디자이너님, 온수입니까 편집자님의 표를 받았습니다.


권디자이너님: "사진이 많은 책이라 안팎(표지/본문)으로 디자인하기 힘들었는데 실물책의 화려한 자태를 보니 모두 용서가 되었죠."

온수입니까 편집자님:  <패션, 영화를 디자인하다>도 추천할게요. 새롭고 신선한 기획이라 좋았습니다. 이 책으로 독자들에게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가는 산지니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화려한 패션, 그리고 우리를 사로잡는 영화! 놓칠 수 없는 조합이 아닌가 싶습니다. 


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쇼윈도를 바라보며 입었던 검은색 드레스, <7년 만에 외출>에서 환기구 위로 불어온 바람에 치솟아 오른 마릴린 먼로의 흰색 드레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커텐으로 만든 비비안 리의 녹색 드레스…. 

이런 영화의상들은 영화 속 인물의 캐릭터를 잘 보여주면서 동시에 스토리를 이끌어가기도 하고, 그 시대의 패션유행을 이끌어나가기도 했습니. 잘 만든 영화의상은 20, 21세기 패션에서 감초 같은 역할을 맡아왔다고 할 수 있지요. 

<패션, 영화를 디자인하다>는 쉰한 가지 영화 속에 등장하는 패션을 통해 그동안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영화의상의 세계를 조명합니다. 이를 통해 패션과 영화의상의 공생관계와 더불어, 패션디자이너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았던 영화의상 디자이너의 이야기와 함께, 시대를 주름잡았던 영화 속 패션아이콘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패션, 영화를 디자인하다 - 10점
진경옥 지음/산지니




6/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장편소설



마지막으로 꼽을 책은 김비 작가님의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입니다. 연초부터 '출구 없음' 이라니, 무슨 소린가?! 하실 수도 있지만, 담당 편집자로서 이 책을 뽑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이 '출구 없음'이 사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이미 가지고 있는 힘을 들여다보기를 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인 김비 작가님은 장편소설, 에세이 등을 통해 꾸준히 위태로운 삶 속에서 반짝이는 힘에 주목해 오셨습니다. 네 번째 장편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은, 가난의 쳇바퀴를 도는 데 지쳐 동반자살을 택하지만, 자살이라는 출구조차 막혔음을 깨닫는 한 가족의 ‘후련한 절망’에서 시작하는데요. 이 소설은 우리를 둘러싼 암흑으로 몸을 던져, 희망이 아닌 다른 언어로 삶을 비추고 있습니다.


작가님과의 책이야기 자리에서 하신 말씀을 발췌해 봅니다.

어느 서면 인터뷰에서 ‘주인공인 남수라는 인물은 왜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고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냐’ 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 실제로 보통의 이야기는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인물이 어떤 사건이나 이유.. 다른 계기가 있어서 다른 인물로 바뀌거든요. 선하게 깨우친다거나, 내가 이제 바뀌어야 되겠다, 내가 이제 가족을 위해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바뀌게 되는데 제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죠. 저는 인물을 바꾸는 대신 세계를 바꾼 거죠. 그러니까 그런 세계라면 그런 인물이 오히려 더 가장 희망적이고, 그 세계를 믿지 않고, 그 세계를 불신하는 비관적인 그 모습이 오히려 더 가장 희망적이고 생을 향해 가장 힘 있는 발걸음을 내딛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산지니 어워드의 귀환, 느닷없지 않으셨나요 ㅎㅎ;

이렇게나마 산지니 디자이너와 편집자들이 편애하는 

2015년의 책을 낱낱이 공개해 보았습니다.


새해에도 멋진 책들이 등장할 예정인데요.

궁금하시다면 

산지니 어워드 1부: 2016년 달라지는 산지니!

에 힌트가 있습니다 :)


그럼, 저는 신간과 함께 조만간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Posted by 비회원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작가와의 책이야기

사진: 김민영 

 

11월의 마지막 목요일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김비 작가님과 독자분들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긴 제목 덕분에 『붉, 출』이라고도 불리는 이 장편소설은 

비상계단에 갇힌 가족의 이야기인데요

택배기사로 일하다 허리를 다친 남수, 근무력증을 앓는 아내 지애그리고 뇌성마비를 가진 아들 환이가 주인공입니다.

동반자살을 하기 전, 가족은 마지막 만찬을 위해 초호화 백화점에 왔다가

층수도 쓰여 있지 않고, 이상한 붉은 불빛으로 물든 비상계단에 들어섭니다.

여기서 비정규직 20대 정화, 명예퇴직 압박에 시달리는 명식

성전환 수술을 위해 돈을 모으려는 수현 등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출구를 찾아 헤멥니다

 

행사가 있었던 26일은 손발이 얼어붙을 만큼 바람이 강한 날이었어요

그럼에도 많은 독자분들께서 참석해주셔서 

행사 공간을 빌려주신 호랑이 출판사의 작업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난롯불 쬐며 이야기했답니다



이 날 이야기는 작가님께서 책의 일부분을 직접 낭독해주시면서 시작됐어요.


남수는 찬찬히 사방 벽을 둘러보았다. 손으로 짚어가며 붉은 벽을 꼼꼼히 살폈다. 그러고 보니 매끈하게만 보였던 벽 위엔 무수히 많은 작은 돌기들이 오돌토돌 돋아 있었다. 조금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벽이었지만, 손으로 더듬어보니 무작위의 돌기가 빼곡히 만져졌다. 그것은 마치 공포에 질린 누군가의 팔뚝 같았다. "이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틀림없어."

성급한 손길로 그녀는 환이를 쓰다듬었다

(…) 

순간 남수는 엉뚱하게도 역사 속에 희생되어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최선이 아니라 차선을 택해야 하는 시간,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택할 수밖에 없는 순리. 그렇다면 우리는 차선이나 차악이 될 수 있을까? 남수는 다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쾅쾅, 또 한 번 있는 힘껏 철문을 두드렸다

"그럼 고장 아닌가?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고장이니 인재니 만날 그러잖아?"

"그러면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어야지. 갇힌 게 우리뿐이라는 건 말이 안 되지."

더 이상 지애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몸짓을 흉내라도 내듯 남수도 붉게 물든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상해, 여기.' 그녀는 또다시 그렇게 중얼거렸다(22~23)

 

소설 속 짧은 한 장면에서도 주인공들의 불안과 절망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붉, 출』을 암울한 이야기라 부르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 아닐까 합니다. 김비 작가님은 비상계단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갇혀 있으면서도 인물들이 그 안에서 스스로 원하던 것, 하고 싶어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뤄 나간다는 점을 짚으셨습니다. 가난 속에서 떳떳한 가장이 되기 힘들었던 남수는 계단 속에서 가족과 함께 걷고 있고, 침대를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했던 지애는 남수와 환이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존재가 됩니다. , 비틀린 팔다리 때문에 스스로 움직이기 힘들었던 환이도 비상계단에서는 온 세상을 자기의 그림으로 채우는 꿈을 이룹니다.

이런 점이 『붉, 출』의 숨겨진 반전이라고 할까요. 이어진 김대성 평론가님과의 대담에서도 이렇게 『붉, 출』을 숨겨진 면모들을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대담의 일부를 아래에 옮겨봅니다.


///


김비: 이 안이 굉장히 척박하고 암울하고 절망으로 가득 찬 세계인 것 같지만, 이 인물들은 아무런 것도 변한 게 없다, 예상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많은 것을 이루고 변화된 자기 자신의 또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거죠. 근데 그것은 그쪽 세계뿐만 아니고 우리, 이쪽의 세계의 반영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거든요. 우리가 믿고 있는 어떤 절망이 정말 절망일까. 혹시 내가 어디에 묶여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 저는 예전에... 예전을 생각하면 정말 많이 절망했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자학도 많이 하고 그랬었는데 요즘은 좀 자유로운 느낌을 조금조금씩 갖게 되요. 저 자신을.. 이제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저 자신을 추스르면서 내가 서 있는 여기를 나를 위해서 즐겁게 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아무 생각하지 않고. 가족, 사회, 정치, 다 생각 않고 나를 위해서. 오롯이 나 하나를 위안하면서, 나를 위해서, 그렇게 살고 있거든요. 그렇더라도 저는 그게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느 서면 인터뷰에서 주인공인 남수라는 인물은 왜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고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냐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 실제로 보통의 이야기는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인물이 어떤 사건이나 이유.. 다른 계기가 있어서 다른 인물로 바뀌거든요. 선하게 깨우친다거나, 내가 이제 바뀌어야 되겠다, 내가 이제 가족을 위해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바뀌게 되는데 제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죠. 저는 인물을 바꾸는 대신 세계를 바꾼 거죠. 그러니까 그런 세계라면 그런 인물이 오히려 더 가장 희망적이고, 그 세계를 믿지 않고, 그 세계를 불신하는 비관적인 그 모습이 오히려 더 가장 희망적이고 생을 향해 가장 힘 있는 발걸음을 내딛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궁극적으로 굉장히 암울하지만, 여전히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사람으로 남아 있지만 제가 하려고 했던 것은 희망의 다른 얼굴을 얘기[하는 것이었어요.]


 


김대성: 여기에 한마디 더 보태면, (…) 절망이라는 거는 희망하기를 멈춘다는 거잖아요. 말 그대로 푼다면. 그런데 만약 이 세상이 개별자들의 희망을 지켜주지 못하는 곳이라면 우리가 희망하는 방식이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매번 실패하고 패배하고 좌절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당할 게 아니라 절망이 희망하기를 중단한다, 끊어낸다는 것은 다르게 접근해보면 직전까지 희망했다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막연한 희망들을 품고 상처받을까 두려워할 게 아니라, 잘 절망하자. 절망과 대면하자. 절망함으로써 직전까지 희망하지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자. (…) 남수 또한 (…) '저 위에 뭐가 있다 저 아래 뭔가가 있다' 이야기가 오갈 때 같이 움직이다가 매번 좌절[하고], 오히려 그 좌절을 선명하게 대면하면서, 언제라도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면서 건물 뒷편 계단 안에서의 생의 의지같은 것들을 좀 발견하는 장면들이 전반적으로 펼쳐져 있거든요. 그것이 말씀하셨던 세계를 아예 바꿔버리는, 태도를 바꿈으로서 그런 것과 연관이 되는 것 같아요. 절망하기로서의 희망하기의 문맥하고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김비: , 여기도 카피로 쓰셨지만, "희망이라고 다 옳은 게 아냐. 어떤 희망은 후련한 절망보다 못해." 희망이란 말이 물론 많은 걸 일으키고 있기는 한데, 너덜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문을 사이에 두고 바깥 쪽에서 들려오는 희망의 소리가 있잖아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희망의 소리가 있잖아요. 되게 잔인하지만, 어쩌면 그게 우리 살고 있는 여기가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걸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세계에 살고 있고 그럼에도 나아가는 것이 책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 잔인함을 오롯이 드러낼 수밖에 없는어쨌든 희망이라는 말 아닌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희망이 아닌, 희망을 짓누르는 다른 언어. 정말 우리를 일으킬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희망이라는 언어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요


김대성: [소설에서는] 여기가 몇 층인지도 몰라요. 160층 백화점에서, 지하로 내려가야 될지, 지상으로 올라가야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오르락내리락 하죠. 그런데 남수는 허리가 너무 안 좋고, 아이도 있고, 지애는 만성 무기력증이고. (…) 조금 내려갔다가도 다시 올라와야 되고, 그런 상황 속에서 그런데 위에서부터 소리가 들리고 문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거든요. 금방이라도 나갈 수 있을 것처럼. 그런 단서들이 소설에 전반적으로 계속 펼쳐져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 주신 것 같아요.

환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환이가 너무 핵심적인가요


김비: 그렇죠, 아무래도. (key).


김대성: 희망 말고 환이.


김비: 그거 좋네요.


김대성: (…) 모두가 무력해질 때 환이가 천진난만함으로 방향을 제시하거든요. "아이의 그림은 이제 혼돈에 빠진 그들을 이끄는 마술같은 표식이었다"라고 176페이지에서 177 페이지 사이에 걸쳐 있는 문장이 있는데. 되게 아무런 희망도 없[] 것 같은 뇌성마비[를 가진] 아이가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면서. 그것을 보고 여기가 몇 층이다. 우리가 몇 층 올라왔구나 [알게 돼요. 그 이전에는] 아무도 그걸 시도를 안 해요. 그냥 출구를 찾으려고 아등바등거리지 여기가 몇 층이라는 표시를 할 생각을 아무도 하지를 않는데, 환이가 그걸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그냥 그림을 그리는 거에요. 그게 표식이 되어서 작은 이정표가 되는데. (…) 마치 횃불 같[기도 하]고 가끔씩은 조명등 같고 촛불 같은 (…) 환이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를 [해주세요.]


김비: 아이.. 이건 개인적인 습성 같은데요. 전 항상 소설에 아이를 써요. 그것도 한 여섯일곱살의 아이를 꼭 쓰는 편이에요. (…) 어쩌면 그게 저 자신이 갖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동경, 계속된 동경이겠죠. (…) 내가 갖지 못한 순수함에 대한 욕망, 욕구 같은 것일 수도 있고, 그 나이대로 돌아가려는 회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이 아이 같은 경우는 장애[를 가진 소수자에요.] 성소수자는 제가 주변에서 많이 봤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편안하게 쓰는 편인데, 장애를 가진 아이를 쓰는 건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건 뭐 취재하고 이런 어려움이 아니라 그 인물을 만드는 것 자체가, 일단 한 인물을 탄생시키는 거잖아요. 그것도 장애를 가진 한 인물을.. 그거는 굉장히 아픈 일이거든요, 제 생각으로는. 그런데 이 아이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요. 횃불이고 촛불 같다고 하셨는데. [제가] 어렸을 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 저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행동하는데 주변에서는 제가 이상하다고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런데 만약에 환이가, 이거 정말 조심스런 얘기지만, 선천적으로 그런 몸으로 태어났다면 이 아이에게 과연 꿈꿀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일까, 이 아이는 꿈을 안 꿀까, 정말, 이 아이는 정말 고통스럽기만 할까 하는 생각을 한 거거든요. 가끔 병원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같은 걸 보면 아이들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굉장히 순수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금방 고통을 가졌었던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순수한 웃음, 그런 걸 발견할 때. 이건 제 욕심일 수 있어요, 정말 위험한 욕심일 수 있는데 좀 그렇다면 좋겠다는 바람인 것 같아요. 누가 옆에서 이쁘다고 해 주면 자기 스스로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나 이쁘구나하고 생각하는 그런 존재이기를 바란 제 마음인 것 같아요. 그래서 되게 조심스러웠어요


(…)


김대성그러면 환이 이야기는 이 정도 하고요. 전작 『빠쓰정류장』에서는 기억 속의 장소를 찾기 위해서 로드무비처럼 계속 옮겨 다니[고, 찾고 있는] 그곳은 없는 곳으로 밝혀지는데, 정류장이라는 것이 머무는 장소는 아니잖아요. 머물지 못하고 바로 가야 되거든요. 정류장의 장소라는 것은 대합실 의자 정도의 공간? 떠남인지 상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자리에 앉아야 다음 행보를 시작할 수 있는, 뿌리내릴 수 없는 존재들의 거처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붉, 닫, 출』은 계단이어서 이전처럼 수평적으로 옮겨 다닐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수직적이고 갑갑하고 변동 없는 장소로, 폐쇄적인 곳[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변화에 대해서 좀 말씀해주세요. 겹쳐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 건 뭐냐면, (…) 소설에서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각 층들이 정류소일 수도 있다. [그곳이] 절망하면서 멈춰 설 수도 있구요,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는 그런… 내몰린 이들이 잠깐 머물 수 있는 거처일 수도 있겠다. 가까스로 버틸 수 있는 장소일 수도 있겠다, 라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는 초반에 남수가 ‘출구를 한 번 찾아 볼게’ 하고 계속 내려가거든요? 그때 위에서 지애가 ‘여보, 있어요?’ 하고 물어요. 그 때 남수가 ‘있어!’ 하고 대답을 하는데  [그 대화가] 무기력하고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애의 무력함을 드러내기보다는 이 폐쇄적인 공간을 그들의 교류와 교신이 일어나는 장소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조금 받았는데. .그런 면에서 이 계단은 폐쇄적인 공간은 아니구나. 언제라도 새로 시작할 수 있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질 수 있고,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고, 이곳이 좀 정류소 같은 느낌도 든다, 연장선에 있겠구나 하는 대목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적 공간에 대해서 염두에 두시거나 조금 더 이야기해주시고 싶은 대목이 있으면 들려주세요.


김비 (…) 실제로 이 공간은 부산에서 만났어요. 서면 cgv아시죠? 마트가 밑에 있잖아요. 지하주차를 하면 지나서 가야 하잖아요, 홈플러스를 지나서 가지 않으려면 비상계단을 올라가게 되있어요. 근데 그 비상계단 들어가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 비상계단에 층수가 없었어요. 중간쯤 올라가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는 거에요, 갑자기 두려움이 굉장히 크게 밀려왔었어요. 그게 이 이야기의 시발점이었는데 그 계단이라는 공간이, 과연 저 표지판이 없다면 무엇을 보고 오르내릴 수 있을까 생각을 했던 것 같고 그것을 생각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우리 일상과 겹쳐졌어요.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끊임없이 누군가를 따라서 올라가고. 저도 그때 다른 게 앞에 없었거든요. 앞에 다른 사람이 걸어 올라가니까 올라가고. 어쩌면 계단이라는 공간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이 자본주의 사회.

횡으로 설 수 없는 공간이에요. 일직선으로 설 수밖에 없는 공간이거든요.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이기도 하고, 저는 등장인물들이 또 다른 의미의 각자의 희망을 만들어 가면서 이 공간이 더 확장되기를 바랐어요. 욕심으로는 우주를 담고 싶었어요, 이 안에. 그래서 우주에 대한 힌트들이 남아 있어요. 이게 또 다른 세계이기도 하고, 이 공간을 태초로 돌리고자 하는 욕망이기도 하고, 작가로서 시도하는 전복, 빅뱅같은 의미였거든요. 실제로 굉장히 좁은 공간이지만, 작가로서는 이 공간이 우주로까지 확장되는 공간이었어요. 그래서 벌레 이야기도.. 벌레가 처음에는 눈에 있었죠. 마지막에는 이 건물 자체가 벌레처럼 꿈틀거린다고 했거든요. 확장되는 느낌이고. 이 인물들의 이름에도 유치하긴 하지만 한가지씩 힌트를 넣었어요. 혹시 아시나요?


김대성: 어떤..?


김비: 이름들에 은하계 행성들의 이름을 하나씩 집어 넣었어요


김대성: , 그렇구나. 수현, 지애,


다같이: 금이, 정화… 


김비: 정말 유치한 거거든요, 하지만-


김대성: 보물찾기 같은 거네요.


김비: 그렇죠. 환이는 앞에 나오죠. "그만해, 김달환!" 이렇게 나오잖아요. (…) 이 공간을 우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끝나는 건 우리밖에 없거든요. 그냥 우주는 계속 지나가고 있는 거죠.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끝이 아닌 웜홀을 통해서 다른 곳으로 나가서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세계를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거든요. 협소하게 읽으면 협소하지만 작가로서는 굉장히 큰 것 까지 생각하면서 그려냈던 공간이었습니다.


김대성: 여러분, 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주가 여러분들을… (웃음)


김비: (웃음) 작가는, 아무래도, 병인 것 같아요. 굉장히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해요. 한군데에 몰아넣으려고 하고 그것에 잘 완성되면 되게 보람이 있어요. 인물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이건 우주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에요]. 


김대성: 계단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 경향신문[에 실린 서평처럼 소설을] '재난' 이야기로서 읽을 수도 있지만 (…) 한 개인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부침을 묘사해놓은 것으로도 읽을 수 있거든요. 일상적으로 읽을 수 있는 문맥이 훨씬 풍부하다고 생각하는데.. 모두가 공통적으로 겪는 재난이 아니라,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존재들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정서의 부침들, 이를테면 조증 같은거요. 좋았다가 끊임없이 추락하고. 추락하면서는 다시는 올라갈 수 없을 거라고 절망하면서, 바닥을 치죠, 그리고 이 추락은 얼마나 또 쉽게 됩니까. 그런 것들도 (…) 충분히 염두에 두고 쓰신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소설을 재난서사로 단박에 규정하기에는 좀 더 세밀하고 폭넓게 읽을 수 있는 대목들이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비: 맞아요, 저는 재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재난서사로 쓰려면 이 재난을 주인공들이 어떻게든 극복해야 하거든요. 어떤 방식으로든. 그런데 제가 묘사한 방식은 재난서사의 극복방식은 절대 아니거든요. 누군가 영웅적인 행동을 해야 하고 누군가를 살려내야 하고 , 떠나면 안돼!’, 이런 게 있어야 되는데, 저는 재난서사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그냥 우리 현실과 꼭 닮은 궁지를 그려내고 싶고 그 궁지를 좀 깨트리고 싶었어요. 중간에 구상을 하는 와중에 세월호 사건도 있고 그래서 감금, 폐쇄라는 것이 굉장히 크게 다가왔어요. 너무너무 크게, 아프게 다가왔[어요].


(…)


독자: 여기서 조명이 세 번 바뀌잖아요, 처음에 붉었다가, 나중엔 파랬다가, 나중에 없어지잖아요. 어떤 뜻을 담으신 건[가요].


김비: 앞서 말했던 환경의 변화고요, 우주 얘기를 했잖아요. 우주를 만든 것은 불, 물 그런 물질이거든요. 그것의 상징을 쓰려고 했고저는 이 세상이 바뀌면 뭔가 굉장히 많이 바뀌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ㅠ요. 그 차이 없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불이 꺼지면서 밖으로 암흑이 되고 불빛이 떨어지잖아요, 불빛의 파편이 떨어지고 건물이 흔들리면서 먼지가 떨어지는데요. 그 공간 안에 우주의 모습을 그리려는 욕심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우주에 꽂혀 있었어요. 이 세계를 태초로 돌리고 싶은 욕망. (…)


독자: 아까 세월호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학생들이 몇 백 명 내려간다고 []셨잖아요. ‘수장 당한이런 표현도 있었고. 염두에 두신 건가요?


김비: 망설였어요. 이건 쓰면 안돼. 근데, 어차피 제가 현실을 담고자 했고무기력함을 담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여기를 담고 싶었어요.


김대성: 소설에서 35페이지에 보면 남수가 밑에서 되게 절망적으로 고꾸라져 있다가 힘을 내서 그는 제자리를 향해서 뛰고 있다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근데 이 제자리가 주기적인 표현인 것 같아요. 자기 자리이기도 하구요, 두 번째는 원래 있던 자리에요. 그럼 변한 건 없어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데, 근데 그게 원점이 아니라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 내가 와주기를 바라고 있는 누군가가 있는 자리, 책임을 짊어지는 자리이고 응답해야 하는 자리. 그래서 제자리가 되게 힘 있는 자리일 수 있겠다. 그래서 남수가 초반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혼자 걸음이 아니겠다, 이것은 지애랑 달환이의 걸음이 겹쳐져 있는 걸 수 있겠다. 이 절망적인 세계에서 우리가 뭐랄까요, 구조요청, 모두가 구조요청하잖아요. 누구나 쉽게 조난당할 수 있고. 절망에 빠질 수 있는데 이 구조요청에 응답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사람이나 컨트롤타워가 아니다, 바로 함께 조난당한 사람이 구조요청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구조요청에 가장 필요한 건 저는 응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사람을 건져 올리는 게 아니라 그걸 들어야 해요. 그리고 반응을 해야 하는데, 남수의 제자리를 향해서 뛰어올라갔다는 짧은 문장이, 책임을 지는 자리,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거란 측면에서 여기 나오는 많은 무기력한 존재들이 서로에게 응답하고 있고 서로에게 작은 책임을 붙들고 있다는 점에서 이 건물 뒷면이 절망의 공간만은 아니다, 서로가 엉키고 어울리면서 결들을 달리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김비: 정확하게 읽어주셨는데, 아까 말씀 드렸듯이 이 사람들이 결국은 희망을 다 찾고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요.] 그것이 이 안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믿음이고 신념이고 새로운 에너지거든요. 어떻게든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제자리 얘기를 하셨는데, 233페이지에 수현과 정화가 무리와 떨어져서 여행자처럼 계단을 여행하면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서 목종이 "그게 무슨 소리야. 다 똑같은데 가면 뭐해"라고 하니, 수현이 얘기를 합니다

아무리 똑같아 보여도, 같은 건 없지. 여기가 어디인지 우린 왜 여기에 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우린 어쨌든 다른 곳에 와 있잖아? 제자리를 도는 것 같지만, 여전히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지만, 일단 올라서면 그곳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잖아? 다시 돌아내려간다고 하더라도, 그곳은 이미 그때의 거기는 아니잖아? (…) 내가 달라졌으니까, 아무리 그곳이 똑같은 곳이라고 하더라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져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가 똑같은 세계,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세계를 만들었지만, 결국에는 똑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계, 누가 구원해주는 건 정말 아니거든요. 우리 안에 있는 거죠. [후반부에] 종교에 관한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이 책 안에 제가 신을 넣었거든요. (…) 묵묵히 곁에서 남수의 모든 걸 지켜보고 제일 먼저 절망의 상태에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을 때 가장 먼저 앞서서 걸어 올라가는 이름 없는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을 바로 신으로 저는 생각하고 있고요. 신은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종교는 없지만, [저는] 구원을 찾아라, 믿어라, 이래라 그런 게 과연 신일까? 생각하거든요. 조용히 우리와 같이 쓰러지고, 같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하지만 아무 말 없이 가장 먼저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서 인도하는 인물이 신이 아닐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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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가 번번이 되돌아오는 '제자리'가 

응답의 자리라는 말을 곱씹게 되는 저녁이었습니다.

(앗 응답하라 198...? 하핫)  

편집자로서 『붉출』을 여러 번 읽었지만, 작가님과 평론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새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인물의 이름에 은하계 행성들을 숨겨놓으셨다니!!! 저만 눈치 못 채고 있었던 건 아니겠죠;)


2015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새해 결심을 할 날도 (그리고 작심삼일 할 날도!) 멀지 않지만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응답하고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 따뜻한 12월 되세요!  


Posted by 비회원

김비의 장편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은 160층 초호화 백화점 비상구 계단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다. 위아래로 끝없이 이어진 계단이 소설의 유일한 공간이다. 한 가족과 그들이 갇힌 건물에서 탈출하기 위해 비상계단을 오르내리다 만난 몇몇 사람들이 등장인물의 전부다. 주인공 남수의 과거가 회상으로 채워지긴 하지만 소설 속 현재의 시간은 한나절에 불과하다. 단편이나 중편이라면 모를까 장편소설로서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소재다. 

▲  김비의 장편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표지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두 번 연거푸 읽었다. 박진감 넘치는 내용에 압도되어 한 번. 결말을 보기 위해 쏜살 같이 달려온 인생을 뒤늦게 후회하듯, 상징과 은유와 우화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섬세한 문장 하나하나를 느긋이 즐기면서 다시 한 번. 그렇다고 평온한 마음으로 읽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들이 갇힌 건물 비상계단의 안과 밖이 별반 다르지 않듯이, 작가의 절망적 상상력이 그려낸 소설 속 이야기가 우리네 현실 속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내레이터이기도 한 남수는 개인사업자로 트럭을 매입해 택배 일을 시작했지만 그의 삶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현실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집착을, 그의 몸은 버티지 못했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허리 때문에 침대에 누워 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세금은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거기에 "온전한 삶을 부여받지 못한 채 태어난 아들 환이"는 "그의 삶을 옭아매기 위해 운명이 내던진 결정적인 한 수"였다. 그의 아내도 몸이 성치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수가 그의 가족을 이끌고 초호화 백화점을 찾아간 것은 '마지막'이라는 그의 아내 지애의 간청 때문이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불우한 삶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가족 동반 자살이라고 하는 최후의 결심을 이행하기 전, 근사한 한 순간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백화점 부실공사로 사고가 났고, 비상계단에 갇히게 된 것. 

하지만 남수 일행이 가족 동반 자살이라고 하는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된 것이 딱히 절망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의사로부터 아이가 뇌손상으로 평생 장애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남수는 "이상하게도 담담"했던 것이다. 

아이의 증상이 경도의 근무력증을 반복적으로 앓은 경력이 있는 아내가 복용한 약물에 대한 부작용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는 "그저 문밑으로 던져진 체납고지서를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그런 희망 없음 속에서도 그가 한 일이란 "그저 소독약 냄새가 나는 벽을 힘없이 몇 번 걷어찬 것이 전부"였다. 

그럼 그를 가족 동반 자살이라는 극한 상황까지 내몬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희망'이라는 말이었다. 그는 "신념을 잃지 않으면 무엇이든 다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며 희망을 부추기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에게 희망은 "어떻게든 세상이 돌아가야 하니까, 모두들 제자리를 지키도록 세뇌시키는 속셈"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의 눈앞에서 아래위로 끝도 없이 뻗어 있는 나선형 계단도 누군가 "그에게 쏘아올린 조롱"일 뿐이었다. 

"그나마 아이가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고 말을 배워가면서 누군가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했을 때, 남수의 두 손에 자신도 모르는 살의가 가득했다. 주민센터의 사회복지사가 놓고 간 자세 교정용 의자에 구겨진 채 틀어박혀 있는 아이를 보면서, 그는 희망이란 것의 비틀린 몸체를 상상하고 있었다."(15쪽)

"여기 이 문. 이렇게 꼼짝도 않는 이 문! 아무리 걷어차고 발길질해도 꿈쩍 않는 이 문! 바로 이 문 앞에서 서 있는 게 어떤 건지. 그게 어떤 느낌인지 줄 알아? 이런 문 앞에 서서 당당하다고 어깨를 펴는 꼴이... 희망을 잃지 말아야한다고 억지웃음을 웃고 있는 꼴이 얼마나 엿 같은 줄 너 같은 놈이 알기나 하냐고!"(93쪽)

남수가 발설한 '너 같은 놈'은 그날 백화점에 들어왔다가 갇힌 사람 중 한 하나다. 이름은 수현. 그가 백화점에 들어온 이유는 성전환 수술을 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절도를 하기 위해서 건물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 사실은 안 남수는 "기껏 그 따위 인생 망치는 수술이나 하려고 도둑질을 해?"라고 쏘아붙인다. 하지만 수현은 마치 "봄 햇살을 쬐는 것처럼 고즈넉한 눈빛"으로 이렇게 항변한다. 

"그래도 난 아저씨가 부럽지 않아요. 그렇게 간단하게 살 수 있는 삶이라도... 태어나보니 그 어떤 혼란도 없이, 그저 돈 벌면 행복하고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괜찮은 그런 삶이라도, 난 아저씨 인생이 전혀 부럽지 않아요.(...) 누군가에게는 그 따위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거든요."(84쪽) 

남수가 괴변이라고 일축한 수현의 말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깔아놓은 일종의 포석이다. 그 포석의 핵심은 삶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남수가 절망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닌, 자신을 조롱하는 희망에 대한 앙갚음을 도모하기 위해 동반자살을 선택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건물 안이나 밖이나 절망스럽기는 마찬가지라면 지금의 상황을 재해석하는 것도 하나의 구원에 도달하는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남수의 아들 환이가 전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런 소설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가 환이를 통해 이 세계와 독자들에게 내보이는 회심의 카드는 다름 아닌 '다름'이다. 여섯 살 먹은 환이의 손에는 크레파스가 들려져 있다. 

그는 아버지인 남수에게 자주 듣던 말을 떠올려 벽에 '다시'라는 글자를 적게 된다. 처음에는 그것이 탈출구를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남수를 지치게 하는 요인이 되지만 곧 상황은 반전된다. 계단에 오줌을 질질 흘리며 애물단지 노릇을 하던 환이는 일행 중 누구보다도 먼저 계단을 올라가 크레파스로 벽에 글자나 숫자를 쓰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붉은 빛깔의 벽에 매달려 환이는 천천히 글자를 따라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누군가에겐 채 1분도 걸리지 않은 글자들을, 아이는 획을 세고 서로 다른 곳에 획을 교차하며 그리듯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쉽게 한 번에 써내려간 글자라면 쓰는 사람의 습관에 따라 일정한 형태가 있겠지만, 가까스로 손을 움직여 아기가 적고 있는 글자들은 모두가 다 다른 모양이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휘어지고 기울어지면서, 그 선들이 맞닿아 만든 글자들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170쪽)

"희망이나 꿈 같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여섯 살짜리 아이가 행복이나 미래를 가늠하고 있을 리도 없었다. 서로에게 말을 잃은 채 등을 지고 있던 그와 아내 사이에서, 아이는 스케치북 안에 혼자만의 세상을 조용히 그려나가고 있었다. 모두가 달라서, 그래서 아이에겐 더욱 예쁘고 신나는 세계였다."(171쪽)

"정화는 아이의 눈 속을 들여다보다가, 꼭 안아 주었다. 이 좁고 혼란스러운 공간 속에 아이가 만들고 싶은 것이 얼마나 거대한 세계였던 건지. 그녀는 그제야 알 것만 같았다. 모두가 포기해버린 여기 이 공간을, 그 작은 손으로 얼마나 열심히 다시 짓고 있었던 건지. 이미 환이의 눈 속엔 갖가지 생명체로 가득한 또 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234쪽)

정화라는 인물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자다. 그녀는 비정규직이긴 하지만 직장을 얻게 되어 기뻤는데, 그로 인해 기초수급 대상에서 탈락해 오히려 살림이 더 곤궁해진다. 고작 100만 원 남짓한 월급으로 엄마의 병원비며 동생들의 학비며 생활비에 집세까지 마련하다보니 구두 하나 살 돈이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새로 들어간 사무실의 선배언니가 채근하여 구두를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가 비상계단에 갇힌 신세가 된 것이었다. 

소설 말미에 정화와 수현은 지옥을 방불케 하는 건물 속 갇힌 상황 속에서 서로의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죽음을 눈앞에 두었거나, 이미 죽음 이후를 살고 있는지도 모를 공간에서 그동안 수현을 괴롭힌 성 정체성의 문제는 별 의미가 없게 된다. 그런 사실을 은연중에 알게 된 일행 중 한 사람이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래. 마음껏 잘 살아. 여기에서 돈이 의미가 있겠니, 그깟 몽뚱이가 의미가 있겠지? 그렇다고 먹고사는 일이 의미가 있니? 가정을 꾸리고 새끼 낳고 잘 사는 그런 미래가 의미가 있겠니? 그저 이 징그러운 계단을 같이 오르내려줄 사람이면 되겠지. 흔들리지 않고, 서로에게 의지해 서로를 토닥이면서 살아."(232쪽)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작가 김비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라고 소개하고 있다. 나는 그녀가 쓴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를 읽은 적이 있다. 하여, 나는 그녀가 사용하는 '불안'이나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함축하는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절망이라는 단어는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조금은 부럽기도 하다. 그녀가 나보다는 훨씬 진실에 더 가까운 지점에 서 있을 것 같아서다. 물론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한다면 줄행랑을 치고 말겠지만 말이다. 소설이 끝나고 곧바로 작가의 말이 이어진다.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될 만한 작가의 경험담이 먼저 소개되고, 뒤이어 그녀는 이렇게 술회한다.  

"잠깐이었지만, 그때 그 두려움은 이상하게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일상은 맴을 돌 듯 매일매일이 닮아 있었고, 타인이 만들어놓은 세계 속에서 나는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얄팍한 희망의 말들을 위안으로 삼고 있을 뿐, 내 두려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남몰래 숨을 골랐던 것도 여러 번이었다.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부끄러운 것일까. 희망을 꿈꾸지 못하는 내게 미래로 나갈 자격은 없는 걸까? 이 이야기는 그런 비관에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결국 앞으로 발을 내딛는, 삶을 향해 꿈틀거리는 이상한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264쪽)

철없는 낭만자주의자인 나의 오독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입에서 발음된 '이상한 절망'이라는 말이 전혀 칙칙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이 획일적이고 천박한 세상에서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재건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진실하고 고유한 그녀만의 품격이 느껴진다.  작가 김비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지는 이유다.


안준철 | 오마이뉴스 | 201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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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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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징적 요소로 스토리 구성

김비 소설가가 최근 펴낸 새 장편소설 '붉은등, 닫힌문, 출구없음'(산지니 출간)은 매우 인상 깊은 전개를 보여준다. 특히 도입부는 읽는 이를 압도한다. 한 번 쥔 책을 여간해선 놓을 수 없을 만큼 이야기가 긴박하고 빡빡하다.

밀리고 밀려 사회의 벼랑 끝에 온 주인공 남수 가족의 상황, 그들 각자의 아픔, 끔찍한 결심에 이르게 된 절박한 처지까지 단번에 드러낸다.

남수는 "LED 패널 공장, 자동차 부품 프레스 공장, 금고를 만드는 회사를 거쳐 택배 일까지 왔는데도" 삶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택배를 하다 허리를 다치고, 빚을 내 구매한 트럭은 고장 나고, 빚을 돌려 막으려고 제2금융권에서 빌린 돈이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 아내 지애는 무기력하고, 어린 외아들 환이는 장애가 있다.

   

이곳은 갓 지은 160층짜리 초호화 건물, 화려한 백화점이 있고 첨단 상업시설이 즐비한 곳이다. '극단적 선택'을 하기로 남수가 마음 먹자 아내 지애는 "마지막으로 좋은 곳 한 번"이라고 통사정한다. 그 통에 남수 가족은 160층 건물의 쇼핑센터에 온다.

그런데 남수 가족은 그만 빨간색 출입통제선 넘어 제한구역에 들어서고 여기에 완전히 갇혀버린다. "문도 다 닫혀 있고…층수가 없어. 몇 층인지 적혀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숫자가 보이질 않아." 호화찬란하던 빌딩은 이들 부부에게 순식간에 절망과 고통뿐인 공간이 된다. 애초에 '죽을 결심'까지 하고 왔던 남수의 머리에 이때 처음 떠오른 생각은 '억울하다'이다.

남수는 아내 지애와 다투고 서로 아픈 곳을 건드려 가면서도 "그 누구도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일직선의 미로"인 이곳을 아래위로 뛰어다니며 살길을 찾아 나선다. 이 모습을 김비 작가는 밀도 높고 능숙하게 그린다.

자신들만 갇힌 줄 알았던 이곳에서 남수 가족은 다른 조난자를 만나기 시작한다. 이들에게서 소문과 정보를 듣게 되고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자본의 힘을 과시하는 이 빌딩은 서둘러 짓느라 아직 미완성이라는 점. 치명적인 결함을 무시한 탓에 빌딩은 이미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는 점. 바깥엔 '열쇠를 쥔 사람'이 있지만 선뜻 갇힌 자들을 구하지 않는다는 점도 알게 된다.

이 장편소설은 상징적인 요소가 선명하고 많아 보인다. 특히, 남수 가족이 처한 상황을 상징으로 읽으면 '여기가 몇 층인지도 모르며, 끝없이 올라가도 닿을 수 없고, 끝없이 내려가도 찾을 수 없는' 숨가쁘고 아득하고 희망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지극히 미세한 모습으로 절묘한 몸짓의 희망이 꼬물대는 모습은 만날 수 있다. 절망을 만날지 희망을 찾을지는 독자 몫이다.

경남 양산에 살면서 부산에서도 꾸준히 활동하는 김비 작가는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하면서 등단해 소설과 에세이를 펴냈고,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 제작 과정에 참여했다. 그는 트랜스젠더 작가로 잘 알려졌다.


조봉권 | 국제신문 | 2015-11-16

원문읽기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160층에 이르는 초호화 백화점, 매장에서 철문을 열면 들어서는 비상계단에 한 가족이 갇혔다. 아무리 내려가고 또 올라가도 계단은 끝이 없고 문은 열리지 않는 이곳에서, 동반자살을 결심했던 가족은 어떤 선택을 할까.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을 쓴 김비씨(44)는 서른에 여자가 된 트랜스젠더 소설가다. 김씨는 위태로운 삶에 관한 이야기나 트랜스젠더로서 자신의 삶에 관한 소설과 에세이를 꾸준히 써왔다. 이 책은 김씨의 4번째 장편소설이다.

여섯 살 아들을 둔 부부, 동반자살을 결심한 가족은 마지막 추억을 위해 백화점 레스토랑을 찾았다가 건물 비상계단에 갇힌다. 비상계단에 들어선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수와 지애 부부, 아들 환은 160층 중 몇 층으로 이곳에 들어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택배기사로 일하다 허리가 망가진 남수, 근무력증을 앓아 매사 무기력한 아내 지애, 뇌 손상을 가지고 태어난 여섯 살 아들 환. 살 이유가 없어 죽으려던 이들이지만 붉은 비상등 빛을 받은 계단만이 위아래로 끝없이 이어지고, 어느 층의 문도 꿈쩍하지 않는 이곳에 갇혀서야 꼭 살겠다는 의지가 찾아온다. 그것은 철문 밖 삶에의 의지나 희망이 아니라, 실패만 했던 인생에서 적어도 죽음만큼은 내 손으로 끝내겠다는 욕망이다. 자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절망의 바닥에서, 남수는 세상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열리지 않는 문이 끝이라고 믿지 않기에 일어선다.

남수는 달동네에서 자랐다. 술에 취해 주먹을 휘두르던 아버지는 길에서 죽었고 어머니는 일찍 도망쳤다.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으로,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히 살면 보상받으리라 믿었지만 삶은 제자리였다. 아내 지애는 언제나 이불 속에 누워 등돌리고만 있었고, 아들 환은 희망이 아니라 쇠사슬이었다. “철컹거리며 무겁게 그를 짓눌러, 마침내 외마디를 듣고야 말겠다는 신의 겁박이었다.” 마지막엔 택배기사로 매일 수백 개의 계단을 올랐지만 남은 건 병과 빚뿐이었다.

출구를 찾으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던 중, 남수네는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지반이 침하되면서 건물이 기우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재난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한순간에 비상계단에 갇혔다고 했다. 가슴이 달린 스무 살 청년 수현, 비정규직인 20대 여성 정화, 명예퇴직 압박에 시달리는 50대 명식, ‘일류대학 교수님 사모’지만 행복하지 못한 해숙 등 모두 사고가 아니라도 죽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비상계단은 끝이 없고, 현실의 고층 빌딩인 줄 알았던 공간의 정체는 갈수록 불분명해진다. 아무리 내려가고 올라가고, 층을 똑바로 세어도 계단은 이어진다. 가끔 철문 밖에서 비웃음을 들었다거나 구조대의 신호를 들었다는 사람들이 나오지만 다 불확실하다. 남수 일행이 출구가 없다고 확신할 때마다, 구조대의 방송이 나오거나 공중통로가 있다는 희망 어린 소문이 전해진다. 그러면 잔인해도 희망이라고, 사람들은 다시 움직이지만 매번 기대는 좌절된다. 반복되는 계단과 희망과 절망 사이, 독자도 긴장에 동참하도록 소설은 풀려 나간다. 

비상계단 밖에서도 출구를 찾지 못하는 이 시대의 자화상과 재난의 메아리가 비치는 이야기다.



김여란 | 경향신문 | 2015-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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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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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동반자살을 결심한 가족, 비상계단에 갇히다

“희망이라고 다 옳은 게 아냐. 어떤 희망은 후련한 절망만도 못해.” (98쪽)

노력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희망이 간절한 시대지만, 어느새 희망은 ‘고문’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어두운 현실을 견디는 데 이야기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고통스러운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편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의 방식은 정면 돌파다. 이 소설은 우리를 둘러싼 암흑으로 몸을 던져, 희망이 아닌 다른 언어로 삶을 비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인 김비 작가는 장편소설 『빠스정류장』,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 등을 통해 꾸준히 위태로운 삶 속에서 반짝이는 힘에 주목해 왔다. 신작『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은, 가난의 쳇바퀴를 도는 데 지쳐 동반자살을 택하지만, 자살이라는 출구조차 막혔음을 깨닫는 한 가족의 ‘후련한 절망’에서 시작한다.



삶을 향해 꿈틀거리는 이상한 절망

우리의 현실을 빼닮은 비상계단과 등장인물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주인공 남수는 달동네에서 자랐고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가장이다. 택배기사로 매일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비관으로 가득 찬 그는 무기력에 빠진 아내 지애, 그리고 뇌 손상을 가지고 태어난 여섯 살 아들 환이와 동반자살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마지막 만찬을 위해 들른 160층 초호화 백화점 건물의 비상계단에 갇혀버리고 만다.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고, 위아래로 끝없이 이어진 계단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자살시도마저 실패로 끝나나 싶지만, 남수는 오히려 꼭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느낀다. 생에 대한 그의 의지는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 아니라, 절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커멓게 끈적거리기만 했던 생각의 늪 속에서, 남수는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남루하기만 했던 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떠올랐다. (…) 기필코 여기에서 탈출하는 것. 그리하여 나를 억압했던 생을 농락하며, 망설임 없이 내 손으로 내 삶의 마지막을 선택하는 것. (18쪽)

남수 가족 외에도 계단에 갇힌 이들은 여럿이다. 비정규직으로 취직하면서 기초수급대상에서 탈락한 20대 여성 가장 정화, 명예퇴직 압박에 시달리는 명식, ‘일류대학 교수님 사모’이지만 남모를 아픔을 가진 해숙 등,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우리와 비슷하거나 우리가 일상에서 스쳐지나갔을 법한 사람들이다.

남수와 이들 일행은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좌절하지만, 더 위쪽에 있는 공중통로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계단을 오른다. 그러다 아래에서 구조가 진행되고 있으니 내려오라는 구조대의 방송 소리를 듣게 된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은 오히려 지진처럼 사방을 뒤흔드는 진동과 불길이다.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여러 재난들의 메아리이다.



“비상등이었다. 그런데, 붉은 색이었다”

한 편의 영화처럼, 강렬한 이미지와 빠른 전개를 갖춘 소설

비상계단이라는 한정된 장소 내에서 장편을 풀어가는 것은 난관이 될 수 있으나, 작가는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과 남수 가족 이외의 인물들을 적절히 등장시켜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한다. 문이 열릴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남수 일행이 버렸을 때 공중통로의 가능성이 제시되고, 새로운 인물들이 제시하는 비상계단에 대한 정보는 서스펜스를 끌어올린다.

색과 이미지가 중요한 상징으로 쓰이기 때문에 소설은 한편의 영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붉은 빛으로 계단 안 모든 것을 물들이는 비상등이 파란 바다색으로 바뀌면서 이야기의 반전이 시작된다. 또한, 소설 속 인물들이 각자 어떻게 이 계단에 갇히게 되었는지 털어놓으면서 모두가 붉은 띠로 가로막힌 문을 통해 이곳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정확히 몇 층에서 비상계단으로 들어왔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의 기본 설정에 대한 의문들과 이에 대한 힌트가 곳곳에 배치되어 재미를 더한다.




트랜스젠더 여성 작가가 쓴 소수자 문학

몸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 돋보여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저자 김비 작가는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 데에도 참여한 바가 있다.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약자, 여성 등 마이너리티의 삶에 꾸준히 주목하면서 김비 작가는 작품 속에 소수자로 살아오며 쌓은 통찰을 담아왔다. 이 소설에서는 희망에 대한 관점뿐만 아니라, ‘몸’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특별히 눈에 띈다.

공중통로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주요인물 ‘수현’은 성전환 수술비용을 마련하려는 스무 살 트랜스젠더 남성이다. 성별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남수는 그를 괴물 취급한다. “인생 망치는 수술이나 하려고” 한다며 남수가 그를 비난하자, 수현은 ‘아저씨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만 나는 나를 믿는다’며 이렇게 말한다.

난 아저씨가 부럽지 않아요. 그렇게 간단하게 살 수 있는 삶이라도… 태어나보니 그 어떤 혼란도 없이, 그저 돈 벌면 행복하고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괜찮은 그런 삶이라도 (…) 아저씨한테는 그게 전부인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거든요. (85쪽)

한편, 남수의 아들 ‘환’이는 기형적인 팔다리를 가진 아이다. 남수는 한때 환이의 탄생에서 희망을 보았지만, 환이는 남수가 동반자살을 결심하게 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지애 또한 환이가 “족쇄” 같은 몸에 갇혀 살고 있다며 마음 아파한다. 하지만 환이는 오히려 “나… 안 이상한데? (…) 나, 지금처럼 예쁜… 내가 좋은데?”라고 말하며 웃는다.

‘비정상’의 몸을 가지고 있는 수현과 환은, ‘비정상’의 몸이란 본질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상’을 만들어내고 유지하기 위해 부여한 의미 때문에 만들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삶과 죽음을 가로질러

암흑 속으로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디딘다

절망의 바닥에 가닿은 상황에서, 남수를 일으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불신’이다. 남수는 열리지 않는 문이 끝을 의미한다는 것을 의심하고, 그가 딛고 선 현실을 비관하며 삶을 꿈꾼다. 소설의 말미에서, 그의 아내 지애는 “당신이 나를 믿지 않든 (…) 지금 우린 당신이 필요해”라고 말한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서로가 필요하다는 고백, 그곳에 이 이야기의 핵심이 있다.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부끄러운 것일까. 희망을 꿈꾸지 못하는 내게 미래로 나아갈 자격은 없는 걸까.” 김비 작가는 이런 질문에서부터 이 소설의 집필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찬란한 희망이 아니라, 어두움과 위험이 깃든 희망을 이야기하는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지금 암흑 속으로 발걸음을 디디려는, 디뎌야만 하는 독자라면, ‘우리는 같은 곳에 있다’ 말하며 내민 이 손을 기꺼이 잡아도 좋을 것이다. 


지은이: 김비

1971년 남과 북의 경계 위, 삶과 죽음의 경계 위,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경계 위에서 태어났다. 2000년 서른 살의 나이에 ‘여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012년 세계문학웹진 『국경없는문학』www.wordswithoutborders.org의 세계 퀴어문학을 소개하는 자리에 단편소설 「입술나무」의 영어판을 게재하였고,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를 출간했다. 부끄러운 기억 같은 책 몇 권을 썼으며,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 데 함께했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지음 | 문학 | 국판 268쪽 | 13,000원 

| 2015년 10월 20일 | 978-89-6545-319-2 03810


동반자살을 결심한 가족, 비상계단에 갇히다. 
희망이 '고문'이 된 시대, 이 장편소설은 우리를 둘러싼 암흑으로 몸을 던져 희망이 아닌 '후련한 절망'에서 첫발을 내딛는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인 김비 작가의 네 번째 장편소설. 



차례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표지 일러스트와 캘리그라피,

그리고 본문 내 각 장의 제목에 쓰인 캘리그라피는 모두 김비 작가의 작품입니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