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16일, 부산대 학생들의 교내 시위를 시작으로 들불처럼 번졌던 부마민주항쟁이 올해 40주년을 맞았다. 부마항쟁은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더불어 4대 민주항쟁으로 통하지만 상대적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진 못한 사건이었다. 책은 부마항쟁 주역들이 전하는 증언을 모은 작품이다. 관련 기념사업 현안까지 자세하게 적어두었다. 382쪽, 2만원.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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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월 1979 

부마민주항쟁 40주년을 맞아 그 주역들이 모여 증언하고 기록한 책이다. 오랜 세월 끝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부마민주항쟁 40주년에 맞추어 출간됐다. 항쟁을 증언하는 목소리와 함께 부마민주항쟁 기념사업의 현안, 부마민주항쟁의 과거·현재·미래를 꼼꼼히 다룬다. 산지니. 2만원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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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월 1979 - 10점
10·16부마항쟁연구소 엮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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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주의 맛있는 인터뷰]

10·16 부마민주항쟁 주역 정광민 ‘부마연구소’ 이사장

 

“부마항쟁은 한국 민주화운동 원형, 기념관 반드시 지어야”

 

 정광민 10·16부마민주항쟁연구소 이사장이 부산대 안에 설치된 항쟁 표지석 앞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국가기념일 지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이재찬 기자

 

1979년 10월 16일 오전 9시 50분께 부산대 인문사회관(현 제1사범관) 강의실에 21살의 한 청년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강단에 선 이 청년은 화폐금융론 수업을 기다리던 70여 명의 학도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학우 여러분, 이제 우리 투쟁할 때가 왔습니다. 나가서 싸웁시다.”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왔고, 잠시 후(경찰의 공식 시간은 오전 9시 53분) 상대 건물(현 자연과학관) 앞에 정렬했다. 학생들은 대열을 맞춰 구호를 외치며 300여m 떨어진 옛 도서관(현 건설관) 앞까지 행진했다. 학생들은 이날 오후 서면과 남포동 등 시내로 진출했으며 남포동 옛 시청 앞에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합세했다. 이튿날 시위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으며 18일 마산까지 활활 번졌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몰락을 가져온 10·16부마민주항쟁은 그렇게 촉발됐다. 그 불씨를 당긴 이가 정광민(61) 10·16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이다. 부산대 교정과 연구소를 오가며 정 이사장을 만나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1980년 2월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 동교동 자택을 방문한 일행. 왼쪽에서 네 번째가 정 이사장.

 1980년 2월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 동교동 자택을 방문한 일행. 왼쪽에서 네 번째가 정 이사장.

 

-항쟁 40년 만에 10월 16일이 정부 공식기념일로 지정됐는데, 감회는?

“항쟁 당사자로서 너무나 감개무량하다. 그동안 부마항쟁이 홀대 받고 하대 받으며 40년이 지났다. 늦게나마 국가기념일이 된 것은 정말 다행이다. 이제부터라도 그 의미를 제대로 살려 나가야 한다.”

 

-국가기념일 지정이 왜 이렇게 늦어졌다고 생각하나? 

“이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아픈 부분이다. 항쟁 당사자나 피해자들이 주체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사업을 대행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그들이 직접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항쟁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알리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본다. 또 항쟁 이후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낸 광주 5·18이 일어나면서 그 그늘에 가려진 측면이 있다. 부산 정치권의 소극적 자세도 한 원인이다.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으로 지역의 정서가 보수화된 것도 지적할 수 있다.” 

 

-1989년 항쟁 10주년을 맞이하여 부마항쟁 관련자들이 주도적으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를 만든 것으로 아는데, 당신의 책 〈시월의 노래〉에 보면 ‘부마 당자들이 사업 주체가 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온다. 무슨 뜻인가? 

“기념사업회는 1994년 4월 사단법인으로 전환됐고 1997년 1월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로 명칭이 변경되며 ‘부마’가 결락됐다. 명칭 변경을 ‘6·10항쟁’ 주역들이 주도하면서 부마 관련자들 다수가 배제되거나 소외됐다. 부산에 ‘부마’만 있는 게 아니고, 4·19도 있고 6·10도 있는데 구태여 ‘부마기념사업회’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포괄주의가 명분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부산의 고유한 민주화운동 자산이 없어져 버렸다.” 

정 이사장은 〈시월의 노래〉에서 “1994년 이후 기념사업회는 6월항쟁 세력에 의해 사실상 장악되었다. 부산 주류의 부마기념사업회 강탈 사건 혹은 쿠데타, 이것이 명칭 변경의 본질이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특히 부산민주공원도 부마항쟁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됐는데, 6월항쟁 세력들이 장악하면서 역대 관장들은 죄다 부마와 관련이 없는 인사들이 차지했다고도 지적했다.

 

정성길 화백의 ‘국제시장 계엄군’. 정성길 화백의 ‘국제시장 계엄군’.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면? 

“박정희 유신체제 18년 동안 이런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초기엔 학생들이 주동이 됐지만 차츰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범시민적인 민주화운동으로 승화됐다. 독재체제의 불합리성뿐만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반발의 결과라는 점에서 부마항쟁은 향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원형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부마가 없었다면 이듬해 5·18도, 1987년 6·10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 이사장은 자신은 정치학자도, 사상가도, 운동권도 아닌 정의가 넘치는 청년 학생이었다면서, 항쟁의 현대적 의미를 찾는다면 민주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의 새로운 과제는 무엇인가에 대해 끝없이 의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문재인정부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나?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부마항쟁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역사적 맥락을 본다면 문 정부가 어쨌든 과거 정부와 다른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관련자로서 높이 평가하고 고맙게 생각한다. 다만 최근의 상황을 보면 좀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어떤 정부라도 확신을 가지지 말고 ‘부마’의 정신을 가지고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지난 40년의 삶은 어떠했나? 

“아, 참, 굴곡이 많았다…. 내가 원해 뛰어든 것이었지만 ‘부마’와 관련됐기 때문에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느 시점에선 벗어나고 싶었지만 굴러가는 수레바퀴에 옷자락이 끼어 바퀴를 따라가야 하는 그런 상황의 연속이었다.” 

정 이사장은 ‘부마’ 주동자라는 이유로 두 번에 걸쳐 수인 생활을 해야 했다. 첫 번째는 1979년 10월 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돼 50일간 복역했으며 이듬해 5·18이 나면서 신군부의 일제검속에 걸려 이듬해 3월 3일까지 다시 복역해야 했다. 두 번의 복역은 주홍글씨로 작용해 그는 평생 신산한 주변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석방 후 생활은 어땠나? 

“1984년 복학해 86년 졸업했다. 그 무렵은 다들 ‘현장’으로 가는 분위기였다. 징역을 두 번 살고 나니 보통의 삶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지역사회문제자료연구실‘에서 〈지역과 노동〉 잡지를 3년간 발행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경제적 재생산이 안 돼 결국 문을 닫았다.” 

그 후 정 이사장은 이흥록 변호사의 조언으로 1994~98년까지 일본 교토대학 석사 과정을 다녔으며, 잠시 귀국해 환경 관련 연구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가 나고야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2005년 귀국했다.

 

부마항쟁연구소 정기총회 모습. 부마항쟁연구소 정기총회 모습.

 

-박사 학위로 취업은 안 됐나? 

“노무현정부 때인 2005년 9월께 국정원 산하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부마’ 전력 때문에 취업이 굉장히 힘들었다. 그런데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 엄청난 사퇴 압박을 받았다. 이를 악물고 1년간 버텼지만 2010년 결국 사표를 썼다. 그 이후 경제적 난민으로 살아야 했다.”

그 뒤 부산으로 내려온 정 이사장은 2017년 부마 관련자들과 함께 부마항쟁연구소를 설립, 국가기념일 지정 등의 운동에 주력해 왔다.

 

-기념관 건립 문제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데. 

“나는 부마항쟁 기념관을 반드시 지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민주공원 안에 특별 전시관을 짓느니, 부산대 안에 기념관이 건립되고 있다느니, 여러 대안들이 나오고 있는데 모두 편의적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마당에 시민적인 기념시설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정 이사장은 관련 조례 제정도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광주 5·18조례, 대구 2·28조례, 대전 3·8조례, 제주 4·3조례 등 각 시도마다 주요 항쟁의 개별 조례가 있는데, 부산만 ‘민주화운동 기념 및 정신계승에 관한 조례’ 안에 ‘부마’ 항목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 신고는 제대로 되고 있나? 

“진상규명위원회가 2014년부터 신고를 접수해 오고 있다. 올해 말까지 300여 명이 관련자로 인정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정부 들어 이전보다 그 숫자가 크게 늘어난 것은 맞지만 항쟁 규모에 비해 여전히 적은 숫자이다. 시효 때문에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관련자들이 거의 패소한 것도 해결 과제이다. ‘부마항쟁법’을 내년까지 1년 더 연장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향후 활동 계획은? 

“부마항쟁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그동안 제대로 보호가 안 돼 비틀어지고 시든 상태이다. 기념일 지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생명이 움트고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야 한다. 관심의 거름과 물을 주어야 한다. 관련자들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 시민들이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시민 교육과 교재 개발도 서둘러야 할 과제다.”

 

고 임수생 시인은 시 ‘거대한 불꽃 부마민주항쟁’에서 부마항쟁을 ‘깨꽃혁명’으로 명명했다. 정 이사장은 이를 인용해 〈짓밟힌 깨꽃의 기억〉이란 평설을 쓴 적이 있다. 40년간 신산했던 그의 삶이 국가기념일 지정을 계기로 깨꽃처럼 고소하고 암팡지기를 기원해 본다. 

 

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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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월 1979’ 

 

10·16부마항쟁연구소는 2017년 6월 정광민 이사장 등 ‘부마’ 관련자들이 주축이 돼 설립됐다. 부산대와 동아대 출신 관련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시민, 교수, 인권변호사, 언론계 종사자 등도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부마 관련자 실태조사, 항쟁의 역사적 평가, 시민 교육, 기념관 건립 추진 등이 주된 업무이다.

정 이사장은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공모사업에 선정돼 진행해 온 기념 도서가 곧 출간된다”며 상기됐다. 책 제목은 〈다시 시월 1979〉. 총 3부로 구성됐다. 1부는 ‘그날의 기억과 기록’으로, 사건의 흐름을 다루고 있다. 2부는 ‘회고와 증언’으로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었다. 3부는 ‘부마항쟁과 한국의 민주화’로 기념관 건립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연구소 측은 항쟁 기념일 하루 전인 오는 15일 부산대 10·16기념관에서 도서 출간 기념행사를 연다.

051-966-1016, 010-8570-1016. 

 

 

다시 시월 1979 - 10점
10·16부마항쟁연구소 엮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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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묵 평전

-부산 민주화운동의 거목




중부교회의 최성묵 목사를 집중 조명한 『최성묵 평전』은 그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어두운 시대 속에서 시련과 고초를 겪으며 신념을 지켜온 한 개인의 삶을 되살리고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 안에 위치한 ‘중부교회’는 부산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었던 곳으로 이 교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최성묵 목사를 중심으로 부산지역 유신 독재를 향한 민주화운동이 촉발될 수 있었다. 이처럼 기독교계의 지도자만이 아닌 재야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한 최성묵 목사의 삶을 통해 민중과 함께 호흡하며 사회운동의 길을 실천하는 종교인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저자 차성환은 최성묵 목사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하기 위해 주위 인물들의 다양한 증언과 자료들을 통합하여 평전 속에 집대성하였다.




종교인으로서 현실 참여를 각성하다

6·25 전쟁 당시, 빨치산 대장의 손에 체포되어 총살의 위기에 처한 청년기의 최성묵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신음하면서 만약 살게 된다면 남은 생을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맹세했고,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신학교에 진학하였다. 평범한 교사이자 교회 전도사였던 최성묵을 각성하게 한 사건은 4월 혁명 이후였다. 그간 이승만 정권의 품 안에 있던 한국 기독교계가 4월 혁명 이후 일련의 변화를 겪으면서 사회정의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최 목사 또한 현실참여의 동인을 갖는다. 당시 진보적 기독학생운동을 이어가던 최성묵 목사는 부산의 대학생운동을 지도하던 이들로부터 부산행을 제안받아, 지역운동의 가능성을 품고 가족들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온다. 최 목사의 부산행 이후 대통령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하며 유신체제의 암울한 정치가 시작되었다.



양서협동조합과 부마항쟁
거리는 저항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최성묵은 이날 밤 늦도록 시위대의 함성과 구호 소리를 들으며 전율하기도 하고, 때로는 최루탄 가스에 괴로워하고, 경찰 차량이 뒤집혀져 불타는 광경을 놀라움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최성묵의 가슴은 주체하기 어려운 흥분으로 방망이질 쳤다. 권력의 압제에 짓눌려 있던 민중들이 일어서는 광경을 눈앞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그가 심취해 있던 민중신학이 현실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16일 밤 자정이 넘어 교회로 들어왔다. 잠을 청하기 위해 자리에 누웠지만 좀체로 잠이 오지 않았다. 거리에서 아우성치던 시민들의 함성이 귓가를 맴돌았다. _「부마항쟁의 불꽃이 타오르다」에서

제2의 도시라지만 너무나 외진 변방과도 같았던 부산에서 최성묵은 우여곡절을 거쳐 YMCA의 총무직을 맡게 된다. 1977년 이후에는 중부교회 목사로서 교회를 민주화운동의 소통 공간으로 만들었는데, 이때 중부교회의 스터디그룹에서 발기한 양서협동조합은 양서를 읽으며 시민의식을 고취시키자는 취지에서 출발하였다. 초기에 정치색을 배제하고 시민들의 교양을 도모하기 위해 출범되었던 양서협동조합은 조합원이 점점 늘면서 세미나와 강연회, 학습모임 등 다양한 활동으로 조직되었다. 유신체제의 억압 속에서 양서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부산지역 학생들이 정치의식에 눈뜨는 등 훗날 이어질 민주화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유신 정권은 양서협동조합을 부마항쟁의 배후로 조작하고자 최성묵을 희생양으로 지목하였는데, 계엄합동수사단의 고문 조작이 이어지는 와중에 발발한 10․26 정변으로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최성묵 목사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6월 민주항쟁 때 최성묵 목사(오른쪽에서 세번째) 모습. 가운데 영정을 들고 있는 사람이 故 노무현 대통령.



십자가를 지고 민주화의 길로, 실천하는 종교인의 모습
유신체제의 붕괴로 민주화가 될 것이라는 기대는 전두환 정권 이후 다시 무너지게 된다. 신군부 세력은 광주학살의 피비린내를 풍기며 철권통치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부산의 경찰과 정보기관은 부마항쟁 당시 부산의 민주화운동 세력을 파악해 그들을 ‘부림사건’이라는 이름하에 하나의 조직으로 묶어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만들고자 했다. 이때 최성묵 목사는 부림사건 구속자 가족에게 기도회 장소를 제공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전두환 정권의 경찰은 수시로 그에게 압박을 가했고 교인들 또한 당국의 압력을 받았다. 부산민주시민협의회 등 여러 활동을 이끌어가면서 군부독재에 맞선 최성묵 목사는 6월 항쟁에서 온몸을 던져 투사의 모범을 보였다. 그가 십자가 행진으로 민주화의 길을 걷는 동안, 대한민국 또한 독재 권력이 굴복함으로써 현재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의미가 퇴색하고 있는 요즈음, 그의 삶은 다시금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돌아보기에 충분하다. 이렇듯 평생에 걸쳐 민중과 민주주의에 헌신했던 최 목사의 삶을 통해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실천하는 종교인’의 모습과 더불어 오늘을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글쓴이 : 차성환

1953년 마산 출생

1973년 부산고등학교 졸업

1989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조경학과 졸업

2009년 8월 부산대학교 일반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 박사학위 취득(학위 논문「참여노동자를 통해서 본 부마항쟁 성격의 재조명」)

2005년∼2007년 부산민주공원 관장

2006년∼현재까지 부산대, 해양대, 부산교대, 동아대, 경성대 등에서 강의

2006년∼현재까지 부마항쟁 및 민주화운동 관련 연구 및 구술 작업

현재 민주주의사회연구소 운영위원, 부산대학교 사회교육연구소 전임연구원

공저 : 『동아시아와 근대의 폭력』, 『1970년대 민중운동연구』, 『양서협동조합운동』, 『유엔기념공원과 부산』, 『작은이들의 벗, 김영수 목사』

저서 :『부마항쟁과 민중』





『최성묵 평전

차성환 지음

인문 | 신국판 | 384쪽 | 20,000원
2014년 3월 21일 출간 | ISBN : 
978-89-6545-243-0 03990

부산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었던 부산 중부교회 고 최성묵 목사(1930∼1992)의 평전이다. 종교인의 자세를 잃지 않으면서도 사회 참여의 길도 외면하지 않은 참 종교인의 삶을 그렸다. 평범한 전도사이자 교사였던 최성묵이 사회현실에 눈을 뜬 계기는 4·19 혁명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품에 안겨 있던 개신교가 4월 혁명 이후 사회정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최성묵도 현실참여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차례



+출판기념회의 모습


한울타리 중창단


한울타리 중창단의 공연으로 평전 출판을 기념했습니다. 책에도 언급되었지만, 최성묵 목사는 장애인 교육 사업 등 사회사업에도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습니다.


책의 저자이신 차성환 선생님


책의 저자이신 차성환 선생님이 그간 평전을 집필하기까지 경과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처음 평전 집필을 결심하시고, 사료나 증언이 부족해 생각보다 집필이 늦어졌다며 묵은 짐을 덜게 된 느낌이라 출간 소회를 말씀하셨습니다.


 

최성묵 평전 - 10점
차성환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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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온수입니까 2014.04.04 09: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 만든다고 고생했어요^^ 그 당시 부산의 민주화투쟁도 알 수 있어 좋았어요.


  올해 저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가와의 인터뷰를 『1980』의 작가 노재열 선생님과 어제(27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준비는 인턴 첫날부터 해서 그다지 긴장을 하지 않고 영광도서로 향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예기치 못한 사건을 만나면서 무너져 내렸죠. 글의 제목인 '1980년의 동화'는 『1980』의 처음 제목이라고 하네요. 작가님의 못다 이룬 꿈을 제가 대신 이뤄 드리기 위해 붙여 봤습니다. 『1980』의 출간과 함께 열린 저자와의 만남(11월 1일)도 영광도서에서 열렸다고 해서 의미가 있겠다 싶었죠. 미리 한국소설 코너에 가서 『1980』의 위치도 확인하고 눈치 것 사진도 찍어 왔습니다. 인터뷰한 장소는 영광도서 3층에 있는 소소하게 책을 읽거나 담소를 나누기 좋은 hygeas(히게아스) 북카페입니다.

 


  노재열 작가님이 도착하시기 전에 좋은 자리를 찾아서 여러 번 이동했지만 2인용 자리밖에 없어서 조금 난감했습니다. 그렇지만 작가님을 가까이서 뵐 좋은 기회였죠. 제가 언제 소설 작가이며 동시에 80년대를 앞장서 체험하신 분을 만날 수 있겠어요. 실속있고 알찬 인터뷰를 기대하며 기본적인 질문으로 어색함을 이겨내려고 노력했습니다.

□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가 듣기로는 15년 전에 벌써 쓰셨고 알고 있었습니다. 원래 문학에도 조예가 있어서 소설을 선택하신 건가요? 여러 질문을 한번에 던졌습니다. 처음부터 욕심을 부리기도 했죠. 

 

 

문학이라는 것이 꼭 문학인이 할 수 있는 거라고 단정 짓지 않고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로 30년을 맞는 부마항쟁을 어떤 형식으로 기록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3년 전에 그때 같이 활동한 분들과 모여 논의를 했죠. 내가 미리 그날의 기록을 남겨 두었기에 총대를 메고 2달간 정리를 해서 만들어진 것이
『1980』이죠.

  또 제가 알기에는 산지니에서 출간된 『나는 시의회로 출근한다』 의 저자인 부산 5대 시의원 김영희 작가님이 노재열 작가님의 부인이셔서 그런 계기로도 책을 내게 되셨다고 합니다.

『1980』은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소설인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에 해당하는 분들이 책을 읽은 후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주요인물: 영철, 정우, 석우, 영호, 번개, 정 군, 숙영 등)
■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실제 사건의 기록물보단 소설로 봐줬으면 합니다. 경험이 없이는 쓰이지 못했을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소설로 재탄생된 인물이라는 시각을 원하는 건 사실입니다. 실명을 쓴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분들은 고인이 되신 분들입니다.  

□ 조금 번외 질문이기도 하고, 제가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습니다. 혹시 그 시절 학생 운동을 열렬히 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으신지요? 20대 동안 3번의 수감 생활을 하셨다면 후회를 했던 적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삶의 변화도 없었고 후회를 생각할 계기와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웃음) 수감 생활 동안 욕이 튀어나오고 살의를 느끼고 기본적인 고민을 많았죠. 
 

그러면서 요즘의 대학생들은 의견을 내세워 투쟁하는 일이 잘 없다고 저의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작가님의 생각은 조금 달랐습니다. 학생들이 사회적 이슈를 가지고 다른 방식으로 운동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시대가 달라진 것이지 본질적인 문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합니다. 다수의 대중이 권리를 내세우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같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상황이 어려워서 문제가 잘 보였지만 지금은 문제가 모호한 것도 사실이라고 하셨습니다. 30년 전에는 군부와 정부에 맞서 싸우는 방식이라면 지금은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항상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 소설의 시간대 구성을 본 사건인 1979년 10월 26일 부마항쟁이 제일 끝에 배치했는데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요?
■ 원래 1~2부에 80년에 일어난 사건을 정리했고, 사실 2부에서 소설은 끝나는 것입니다. 3~4부는 본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야기로 돌아가죠. 80년대 역사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는데 꼭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쓰는 것은 의미가 없고 3~4부에 추가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구상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진행된 구상이죠.

『1980』에서 작가님이 제일 신경 쓰고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에 대해 물었습니다.
■ 1980년대의 상황을 단순한 기록물로 남기기보다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빌려 남기고 싶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기억의 산물과 상상력이 합쳐져서 만들어져 『1980』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전성욱 선생님의 해설 한 부분을 제시하셨죠.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제5장 「행위」의 제사로 "모든 슬픔은, 말로 옮겨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면, 참을 수 있다" 라는 아이작 디네센의 말을 인용했다. 살아남은 자의 가장 중한 역할이란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을 망각으로부터 지켜 내는 일이다. 그 곤혹스런 기억들 속에서만 우리는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다.                                          『1980』 해설 길 위에서, 311쪽

 
□ 녹산공단 노동 상담소에서 하시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 차기작을 계획하시고 있는지요?
■ 노동 상담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산재사고 상담, 임금 채무 상담, 노동조합 결성 상담 등의 일을 하고 있죠.
  제 생각으로는 이런 경험들을 차기작으로 내도 좋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작가님은 우리가 알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한 곳에 서서 투쟁 중이신 것 같죠. 주인공 정우가 의도한 길을 여전히 겪고 계신 거죠. 차기작은 부마항쟁처럼 시대 일부분을 누구도 나서서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면 글을 쓸 생각이라고 하셨습니다. 차기작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말라는 당부도 하셨습니다.

 


부마항쟁을 소설로 옮긴 건 거의 최초라고 들었습니다. 기존의 기득권 세력이 광주지역만으로 국한 시켜서 역사를 왜곡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행해진 일이기에 나는 부마항쟁을 통해 부산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우리의 빛바랜 투쟁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잘못된 역사적 평가를 바로잡는 일을 소설을 통해 조금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재열 작가 인터뷰 中-

 



 

 

저는 노재열 작가님과의 만남을 통해 사회구성원이 되기에 한없이 부족한 저 자신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대에 몸 받쳐 투쟁하고 목소리를 냈던 노재열 작가님의 빛나는 20대를 『1980』을 통해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소설은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자가의 기억과 만났을 때 얼마나 더 효과적으로 전달 될 수 있는 지 한 번 더 알게 되었죠. 
작가님의 다음 투쟁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투쟁기도 곧 전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빌어 봅니다.

덧, 사진 촬영을 잊은 저를 위해 다시 돌아와 주신 노재열 작가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어제 내내 생각이 나서 부끄러웠던 일화였습니다.

 



1980 - 10점
노재열 지음/산지니

* 노재열 작가님 인터뷰 동영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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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부산에선…노재열 첫 장편소설 '1980' 
 
"정의란 이름으로 자행된 공안당국의 폭력에 의해 이름 없이 잊혀 간 사람들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을 망각으로부터 지켜내는 일이기 때문이죠."

 

노재열(53) 부산 녹산산단 노동상담소 소장은 전두환 군사정권 8년 동안 3차례 구속되며 20대 청춘을 다 보냈다. 당시 부산대 공대를 다녔던 그는 1980년 비상계엄령,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됐다. 1981년 부림사건(대학생, 교사, 직장인 등을 반국가단체 찬양 혐의로 구속해 고문한 사건) 당시 구속돼 2년간 교도소에서 보냈고, 1987년 노태우 대선 후보 반대시위로 구속되기도 했다.

부마항쟁 체험 바탕 생생한 복원
"공안 폭력의 희생자 기록해야죠"

그가 첫 장편소설 '1980'(산지니)을 펴냈다. 소설은 1980년 5월을 전후해 부산의 민주화 투쟁을 조명한다. 시간적 배경은 1979년 10월 부마항쟁부터 1981년 3월까지다. 부마항쟁과 1980년 부산 학생투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소설로 저자의 체험을 토대로 하고 있다. 증언과 기록을 통해 1980년 당시 운동사적 맥락을 문학적으로 복원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이하 생략)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부산일보 김상훈 기자의 기사로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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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가을 없이 겨울이 온 것 같습니다. 오늘은 특히나 기온이 뚝 떨어지고 거기다 바람까지 불어주니 영락없는 겨울이네요. 가을의 낭만도 즐길 겨를 없이 쌀랑한 겨울이 왔지만 춥다고 웅크리고만 있을 수는 없죠. 이번 저자와의 만남에 한번 들러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이번 28회 저자와의 만남은 『1980』의 저자이신 노재열 선생님입니다.

『1980』은 1980년, 부산의 5월을 다룬 장편소설인데요.
전두환 군사정권 8년간 3차례 구속 수감됐던 작가의 자전적 체험을 밑바탕에 깔고 있어 더욱 실감나는 소설이랍니다.

책소개 보기

폭력과 굴종 속에서 고뇌하며 시대의 아픔에 누구보다 진지했던 한 청춘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우리를 다시금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많은 분들과 만나기 위해 이번 저자와의 만남은 영광도서에서 가질 예정입니다.
4층의 자리가 꽉 차길 기대해봅니다.^^

일시: 2011년 11월 1일 저녁 7시
장소: 영광도서문화사랑방(4층)

1980 - 10점
노재열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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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저자 노재열 11일 간담회

1979년 10월 부마항쟁과 이어 펼쳐진 1980년 부산 지역 학생운동을 조명한 소설 '1980'(산지니 펴냄)이 발간됐다.

책을 집필한 노재열(53) 부산 녹산공단 노동상담소장은 11일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간담회를 갖고 "당시 사건과 관련해서는 보고서 형태로 설명할 수 없는 사라져간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가 있다"며 "묻힌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려면 소설 말고는 방법이 없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노재열 소장이 직접 소설을 쓴 것은 그가 당시 부산 지역 민주항쟁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두환 정권 치하에서 세차례 구속 수감돼 8년을 교도소에서 보냈고 오랫동안 수배를 받으며 20대 청춘을 보냈으며 1981년 부림사건 때도 주역으로 활약했다.

노 소장은 "소설은 1979년 10월 부마항쟁부터 1981년 3월까지 기간만 집중해서 다루고 있다"며 "부림사건 등 그 뒤의 사건을 다루려면 또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광주 지역에만 국한된 투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5·18은 광주뿐만 아니라 부산, 대구 등 전국에서 이뤄진 투쟁이었지만 광주 위주로 의미가 축소됐다"며 "또 아직까지 깊이 있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으며 5·18 민주화 투쟁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실질적 보상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더 관심을 둬줬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소설은 주인공 대학생 정우를 내세워 당시 사건을 살펴본다. 정우는 5·18 때 계엄군에게 붙잡혀 고문당하기도 하는 등 동료와 함께 민주화 투쟁을 벌이며 대중의 힘을 자각해 나간다.

소설은 노 소장의 체험을 풍부하게 담은 덕분에 고문 등에 대한 묘사가 치밀하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생생하다.


<연합뉴스> 김영현 기자 기사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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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과 1980년 부산의 학생투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장편소설 『1980』


1980년 부산의 학생투쟁을 다룬 최초의 장편소설 『1980』 출간

부마항쟁과 1980년 부산의 학생운동을 본격적으로 다룬 장편소설 『1980』이 그 운동의 당사자였던 저자에 의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1980』은 제목 그대로 1980년 5월을 전후한 1년여 동안에 한정된 이야기로 1980년을 전후한 격랑의 시간에 대한 소묘이자 폭력과 굴종 속에서 고뇌하는 한 청춘의 여정에 대한 기록을 소설로 풀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한 시대의 질곡을 담은 역사소설이자 표랑하는 청춘의 시간을 그린 성장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5·18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저자 노재열은 전두환군사정권 8년 동안 3차례 구속 수감되며 20대 청춘을 다 보낸 이력의 소유자이다. 누구보다 그 시대를 뼛속 깊이 체험했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1979년 10월 부마항쟁으로 인한 도피생활을 시작으로 1980년 계엄포고령위반, 1981년 국가보안법 구속(일명 부림사건), 1987년 노태우 반대시위 구속 등으로 20대 청춘을 도피, 구속, 수감의 생활로 다 보내었다. 저자의 체험에 바탕을 둔 이 소설은 그 시대의 아픔에 누구보다 깊이 발을 담근 한 청춘의 눈으로 바라본 시대에 대한 기록이자 고뇌하는 청춘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은 1980년 5월이 5·18의 광주라는 한 지역에 국한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1980』의 성취는 5·18을 부마항쟁과 그 이후 전국적인 학생운동의 흐름 속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는 1980년 당시의 운동사적 맥락을 그 핵심적인 당사자에 의해 문학적으로 복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증언과 기록의 차원에서도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시대의 아픔에 고뇌하는 청춘의 이야기

1980년 오월의 봄은 처참하였다. 평온한 미래의 시간을 꿈꾸고 사랑에 몸 달았던 평범한 젊은이들은 자주통일, 독재타도와 같은 대의 앞에서 절망하고 분노하고 증오하면서 결국은 부끄러워해야만 했다. 당연한 욕망을 타락한 탐욕으로 추궁받아야 했던 그 시절은 지금이라면 믿기 힘든 암흑의 시간이었다. 이제 폭도라 불리던 사람들은 민주화의 주역이 되었고 통곡의 그날은 국가의 기념일이 되었다. 유인물 한 장을 쓰기 위해서도 목숨을 걸어야 했던 공포의 시대였다. 세속적 욕망들을 포기하면서까지 민주화라는 대의를 위해 자기를 기꺼이 희생하며 1980년대를 보낸 그들 청춘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와 시대정신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구체성과 사실성이 생생하게 묘사

소설은 연대기적 시간의 흐름 즉 역사적 사건의 선후가 아닌 방황하는 청춘의 시간으로 이야기의 시간을 풀어나간다. 소설은 정우(주인공)가 수감된 15P 영창의 폭력적인 일상으로 시작된다.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과 박정희 저격 사망으로부터 시작된 비상계엄은 1980년 5월 17일을 기점으로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이 같은 정국 속에서 부산 양정의 15P 헌병대는 계엄군에 의해 붙잡혀 들어온 수감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수감된 정우는 부산지구 계엄합동수사단이 설치된 망미동의 삼일공사를 오가며 견디기 힘든 고문으로 취조당하고 있었다. 저자의 체험에 기반을 둔 감방의 구조라든가 내부의 자체 규율, 고문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그 체험의 구체성과 사실성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물고문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꽁꽁 묶어야 해. (중략)
무릎 안쪽으로 끼인 경찰봉 때문에 다리 안쪽 근육이 밀리며 온몸의 하중을 받아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지. 거기다가 경찰봉 양끝을 책상 사이에 걸쳐 놓고 매달린 사람을 그네처럼 흔들거나 빙빙 돌리면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러는 중에 통닭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은 머리가 거꾸로 서면서 하늘로 향해 입과 코가 벌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얼굴에 젖은 수건을 덮어씌우고 물을 부으면 항우장사라고 해도 버티기가 힘들어.
젖은 물수건 때문에 공기가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물을 부으면 ‘꺽꺽’거리며 숨을 들이마시듯이 그 물은 고스란히 목구멍 기도로 들어가지. 그 고통은 죽음 그 자체야. 숨을 쉬지 못한다는 것만 해도 죽을 고통인데 거기다가 공기 대신 물을 들이마시게 되면 급기야 폐가 난도질당하는 느낌이 들면서 토하게 되지. 차라리 토하면서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살아나는 방법이 되는 거야. -67~68p

소설은 이야기 속 시간으로는 가장 앞선 1979년 10월 16일을 이 소설의 결말로써 제시하며 이야기의 시간을 극적으로 배분한다. 절망과 도피, 저항과 극복이라는 뜨거운 정념의 시간들을 사유와 성찰의 시간으로 엮으며 고난의 순례를 서사화한다.

불온한 역사에서 배우는 성찰의 시간

세상의 모든 청춘은 저마다의 사연으로 자기만의 알 속에서 부화를 기다린다. 불온한 역사는 미숙한 청춘을 고행 속에서 성숙하게 만든다. 정우는 책으로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고행의 길에서 배운다. 대학을 나와 적당히 먹고살 수 있던 특권의 시절에는 이념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보장된 미래 따위는 없고, 다만 그들은 고용과 실업 사이에서 비정규직의 불안한 삶을 살아갈 따름이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의 기술이 공생에 대한 진지한 사유를 압도할 때 예민한 청춘의 감성은 타락한다. 여전히 가혹한 시련 속에서 우리들의 청춘은 오늘도 아프게 앓는 중이다. 여기 시대의 아픔에 누구보다 진지했던 한 청춘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저자 : 노재열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부산에서 대학을 나온 후 30년 넘게 부산시민으로 착하게 살고자 애쓰고 있는 사람이다. 전두환군사정권 8년 동안 3차례 구속 수감되며 20대 청춘을 다 보내었다. 감옥을 들락거리며 노동운동에 매달리다 세월을 뒤돌아 볼 틈도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잠시 잊혔던 옛일을 떠올리며 글들을 모아 본 것이 책으로 만들어졌다. 이 글은 그의 첫 소설책이다. 현재는 부산 강서구 녹산공단에서 노동 상담소 소장 일을 하고 있고 부인과 딸을 곁에 두고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다.

목차

1부  죽은 자의 울음소리
15P 영창/망미동 삼일공사/5·19 성전(聖戰) 포고문/감시의 눈빛/조사가 끝나다/휴식/깊은 밤 울음소리/B 하사의 침묵/죽은 자와 산 자

2부  살아남은 자
이감/삼청교육/감방의 고민/동지들을 만나다/12제자의 예수/정 군이 꾸는 꿈/영호의 면회/살아남은 자

3부  도망자 2
도망을 시작하다/기차에서 잠을 자다/지리산/다시, 부산으로/정씨 아저씨와 정우

4부  도망자 1, 이야기의 끝이자 시작
10월의 함성/가두시위/유신독재의 종말/새로운 준비, 5월의 핏빛 함성으로

해설  전성욱(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작가 약력

1980 - 10점
노재열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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