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6 부마민주항쟁 주역 정광민 ‘부마연구소’ 이사장
“부마항쟁은 한국 민주화운동 원형, 기념관 반드시 지어야”
1979년 10월 16일 오전 9시 50분께 부산대 인문사회관(현 제1사범관) 강의실에 21살의 한 청년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강단에 선 이 청년은 화폐금융론 수업을 기다리던 70여 명의 학도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학우 여러분, 이제 우리 투쟁할 때가 왔습니다. 나가서 싸웁시다.”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왔고, 잠시 후(경찰의 공식 시간은 오전 9시 53분) 상대 건물(현 자연과학관) 앞에 정렬했다. 학생들은 대열을 맞춰 구호를 외치며 300여m 떨어진 옛 도서관(현 건설관) 앞까지 행진했다. 학생들은 이날 오후 서면과 남포동 등 시내로 진출했으며 남포동 옛 시청 앞에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합세했다. 이튿날 시위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으며 18일 마산까지 활활 번졌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몰락을 가져온 10·16부마민주항쟁은 그렇게 촉발됐다. 그 불씨를 당긴 이가 정광민(61) 10·16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이다. 부산대 교정과 연구소를 오가며 정 이사장을 만나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1980년 2월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 동교동 자택을 방문한 일행. 왼쪽에서 네 번째가 정 이사장.
-항쟁 40년 만에 10월 16일이 정부 공식기념일로 지정됐는데, 감회는?
“항쟁 당사자로서 너무나 감개무량하다. 그동안 부마항쟁이 홀대 받고 하대 받으며 40년이 지났다. 늦게나마 국가기념일이 된 것은 정말 다행이다. 이제부터라도 그 의미를 제대로 살려 나가야 한다.”
-국가기념일 지정이 왜 이렇게 늦어졌다고 생각하나?
“이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아픈 부분이다. 항쟁 당사자나 피해자들이 주체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사업을 대행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그들이 직접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항쟁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알리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본다. 또 항쟁 이후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낸 광주 5·18이 일어나면서 그 그늘에 가려진 측면이 있다. 부산 정치권의 소극적 자세도 한 원인이다.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으로 지역의 정서가 보수화된 것도 지적할 수 있다.”
-1989년 항쟁 10주년을 맞이하여 부마항쟁 관련자들이 주도적으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를 만든 것으로 아는데, 당신의 책 〈시월의 노래〉에 보면 ‘부마 당자들이 사업 주체가 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온다. 무슨 뜻인가?
“기념사업회는 1994년 4월 사단법인으로 전환됐고 1997년 1월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로 명칭이 변경되며 ‘부마’가 결락됐다. 명칭 변경을 ‘6·10항쟁’ 주역들이 주도하면서 부마 관련자들 다수가 배제되거나 소외됐다. 부산에 ‘부마’만 있는 게 아니고, 4·19도 있고 6·10도 있는데 구태여 ‘부마기념사업회’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포괄주의가 명분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부산의 고유한 민주화운동 자산이 없어져 버렸다.”
정 이사장은 〈시월의 노래〉에서 “1994년 이후 기념사업회는 6월항쟁 세력에 의해 사실상 장악되었다. 부산 주류의 부마기념사업회 강탈 사건 혹은 쿠데타, 이것이 명칭 변경의 본질이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특히 부산민주공원도 부마항쟁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됐는데, 6월항쟁 세력들이 장악하면서 역대 관장들은 죄다 부마와 관련이 없는 인사들이 차지했다고도 지적했다.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면?
“박정희 유신체제 18년 동안 이런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초기엔 학생들이 주동이 됐지만 차츰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범시민적인 민주화운동으로 승화됐다. 독재체제의 불합리성뿐만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반발의 결과라는 점에서 부마항쟁은 향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원형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부마가 없었다면 이듬해 5·18도, 1987년 6·10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 이사장은 자신은 정치학자도, 사상가도, 운동권도 아닌 정의가 넘치는 청년 학생이었다면서, 항쟁의 현대적 의미를 찾는다면 민주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의 새로운 과제는 무엇인가에 대해 끝없이 의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문재인정부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나?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부마항쟁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역사적 맥락을 본다면 문 정부가 어쨌든 과거 정부와 다른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관련자로서 높이 평가하고 고맙게 생각한다. 다만 최근의 상황을 보면 좀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어떤 정부라도 확신을 가지지 말고 ‘부마’의 정신을 가지고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지난 40년의 삶은 어떠했나?
“아, 참, 굴곡이 많았다…. 내가 원해 뛰어든 것이었지만 ‘부마’와 관련됐기 때문에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느 시점에선 벗어나고 싶었지만 굴러가는 수레바퀴에 옷자락이 끼어 바퀴를 따라가야 하는 그런 상황의 연속이었다.”
정 이사장은 ‘부마’ 주동자라는 이유로 두 번에 걸쳐 수인 생활을 해야 했다. 첫 번째는 1979년 10월 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돼 50일간 복역했으며 이듬해 5·18이 나면서 신군부의 일제검속에 걸려 이듬해 3월 3일까지 다시 복역해야 했다. 두 번의 복역은 주홍글씨로 작용해 그는 평생 신산한 주변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석방 후 생활은 어땠나?
“1984년 복학해 86년 졸업했다. 그 무렵은 다들 ‘현장’으로 가는 분위기였다. 징역을 두 번 살고 나니 보통의 삶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지역사회문제자료연구실‘에서 〈지역과 노동〉 잡지를 3년간 발행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경제적 재생산이 안 돼 결국 문을 닫았다.”
그 후 정 이사장은 이흥록 변호사의 조언으로 1994~98년까지 일본 교토대학 석사 과정을 다녔으며, 잠시 귀국해 환경 관련 연구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가 나고야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2005년 귀국했다.
-박사 학위로 취업은 안 됐나?
“노무현정부 때인 2005년 9월께 국정원 산하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부마’ 전력 때문에 취업이 굉장히 힘들었다. 그런데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 엄청난 사퇴 압박을 받았다. 이를 악물고 1년간 버텼지만 2010년 결국 사표를 썼다. 그 이후 경제적 난민으로 살아야 했다.”
그 뒤 부산으로 내려온 정 이사장은 2017년 부마 관련자들과 함께 부마항쟁연구소를 설립, 국가기념일 지정 등의 운동에 주력해 왔다.
-기념관 건립 문제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데.
“나는 부마항쟁 기념관을 반드시 지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민주공원 안에 특별 전시관을 짓느니, 부산대 안에 기념관이 건립되고 있다느니, 여러 대안들이 나오고 있는데 모두 편의적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마당에 시민적인 기념시설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정 이사장은 관련 조례 제정도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광주 5·18조례, 대구 2·28조례, 대전 3·8조례, 제주 4·3조례 등 각 시도마다 주요 항쟁의 개별 조례가 있는데, 부산만 ‘민주화운동 기념 및 정신계승에 관한 조례’ 안에 ‘부마’ 항목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 신고는 제대로 되고 있나?
“진상규명위원회가 2014년부터 신고를 접수해 오고 있다. 올해 말까지 300여 명이 관련자로 인정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정부 들어 이전보다 그 숫자가 크게 늘어난 것은 맞지만 항쟁 규모에 비해 여전히 적은 숫자이다. 시효 때문에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관련자들이 거의 패소한 것도 해결 과제이다. ‘부마항쟁법’을 내년까지 1년 더 연장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향후 활동 계획은?
“부마항쟁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그동안 제대로 보호가 안 돼 비틀어지고 시든 상태이다. 기념일 지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생명이 움트고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야 한다. 관심의 거름과 물을 주어야 한다. 관련자들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 시민들이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시민 교육과 교재 개발도 서둘러야 할 과제다.”
고 임수생 시인은 시 ‘거대한 불꽃 부마민주항쟁’에서 부마항쟁을 ‘깨꽃혁명’으로 명명했다. 정 이사장은 이를 인용해 〈짓밟힌 깨꽃의 기억〉이란 평설을 쓴 적이 있다. 40년간 신산했던 그의 삶이 국가기념일 지정을 계기로 깨꽃처럼 고소하고 암팡지기를 기원해 본다.
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다시 시월 1979’
10·16부마항쟁연구소는 2017년 6월 정광민 이사장 등 ‘부마’ 관련자들이 주축이 돼 설립됐다. 부산대와 동아대 출신 관련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시민, 교수, 인권변호사, 언론계 종사자 등도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부마 관련자 실태조사, 항쟁의 역사적 평가, 시민 교육, 기념관 건립 추진 등이 주된 업무이다.
정 이사장은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공모사업에 선정돼 진행해 온 기념 도서가 곧 출간된다”며 상기됐다. 책 제목은 〈다시 시월 1979〉. 총 3부로 구성됐다. 1부는 ‘그날의 기억과 기록’으로, 사건의 흐름을 다루고 있다. 2부는 ‘회고와 증언’으로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었다. 3부는 ‘부마항쟁과 한국의 민주화’로 기념관 건립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연구소 측은 항쟁 기념일 하루 전인 오는 15일 부산대 10·16기념관에서 도서 출간 기념행사를 연다.
051-966-1016, 010-8570-1016.
다시 시월 1979 - 10·16부마항쟁연구소 엮음/산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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