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전쟁』이 

언론에 소개되었습니다!



[시사인원문보기]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전쟁
정광민 지음, 산지니 펴냄

“경제전에 대한 인식은 양 체제의 긍정과 부정을 통합적·역사적으로 보게 한다.”

전후 복구 시기인 1953년 김일성의 ‘지상낙원’ 연설은 ‘대남 경제전’ 선언이었다. 북과 남의 경제적 차이를 천당과 지옥만큼 벌어지게 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독주하던 김일성 앞에 박정희가 등장하면서 남북 경제전 시대가 열렸다.
경제전의 제1시기에 김일성은 지상낙원론, 박정희는 실력배양론을 전면에 내세웠다. 두 번째 시기에 접어들자 김일성은 경제국방 병진 노선, 박정희는 국방건설 병진 노선을 들고 나왔다. 그 결과는 남북 모두의 국방국가화였다. 1970년대 들어 남북의 국방국가는 북의 유일체제와 남의 유신체제로 절정에 도달했다. 경제전의 명분은 지상낙원과 복지국가 건설이었으나, 김일성과 박정희가 최대 수혜자였을 뿐이다.


[한겨레원문보기]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전쟁 김일성과 박정희의 시대는 한반도 남북의 전면적인 경제전의 시대였다. 이 경제전은 지금까지도 남북의 체제와 민중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직중인 지은이는 수년의 연구와 조사를 통해 두 인물이 쌓아올린 역사적 구조물을 해부하고 남북이 함께할 비전을 찾는다. 

정광민 지음/산지니·2만5000원.


[연합뉴스원문보기]

▲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전쟁 = 정광민 지음.

해방 이후 한반도는 분단시대를 살아오고 있다. 이 분단시대를 특징짓는 가열한 체제 경쟁은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박정희에 의해 선도됐다. 김일성과 박정희의 시대는 전면적인 경제전의 시대였고, 이는 지금까지도 남북의 체제와 민중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인 저자는 남북경제전사를 다룰 때 가장 큰 문제가 김일성과 박정희를 바라보는 양극단의 분열적 입장과 태도라고 말한다. 지지자들로부터는 숭배의 대상이 되지만, 비판자들로부터는 경멸의 대상이 돼 두 인물에 의해 이뤄진 경제전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남북의 경제전은 애초에 민생개발 경쟁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이후에 전쟁을 위한 국방개발 경쟁으로 변질했다. 김일성과 박정희는 철저히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며 체제경쟁을 이어나갔고, 이 과정에서 남과 북 모두에서 국방개발 총력전체제가 출현했다.

저자는 체제경쟁의 성공과 실패보다는 남북이 살아온 시대를 돌아보고,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지표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의 초판은 2012년에 출간됐으며 이번에 개정판이 나왔다.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난 저자는 1979년 부마항쟁 때 부산대 시위를 주도해 두 번 투옥된 바 있다.

산지니. 414쪽. 2만5천원.


▲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전쟁 = 정광민 지음.

해방 이후 한반도는 분단시대를 살아오고 있다. 이 분단시대를 특징짓는 가열한 체제 경쟁은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박정희에 의해 선도됐다. 김일성과 박정희의 시대는 전면적인 경제전의 시대였고, 이는 지금까지도 남북의 체제와 민중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인 저자는 남북경제전사를 다룰 때 가장 큰 문제가 김일성과 박정희를 바라보는 양극단의 분열적 입장과 태도라고 말한다. 지지자들로부터는 숭배의 대상이 되지만, 비판자들로부터는 경멸의 대상이 돼 두 인물에 의해 이뤄진 경제전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남북의 경제전은 애초에 민생개발 경쟁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이후에 전쟁을 위한 국방개발 경쟁으로 변질했다. 김일성과 박정희는 철저히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며 체제경쟁을 이어나갔고, 이 과정에서 남과 북 모두에서 국방개발 총력전체제가 출현했다.

저자는 체제경쟁의 성공과 실패보다는 남북이 살아온 시대를 돌아보고,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지표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의 초판은 2012년에 출간됐으며 이번에 개정판이 나왔다.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난 저자는 1979년 부마항쟁 때 부산대 시위를 주도해 두 번 투옥된 바 있다.

산지니. 414쪽. 2만5000원.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전쟁 - 10점
정광민 지음/산지니


*산지니 출판사에서 직접 구매할 수 있습니다.

(10% 할인, 3권 이상 주문시 택배비 무료)




Posted by 예빈박사

댓글을 달아 주세요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전쟁

분단을 넘어 다시 보는 남북 통치경제학



우리가 살아온 시대를 돌아보고 

남북이 함께하는 비전을 찾다


정광민 지음






분단시대를 넘어, 한반도사의 전체상을 인식하다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전쟁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해방 이후 한반도는 분단시대를 살아오고 있다. 이 분단시대를 특징짓는 가열찬 체제 경쟁은 바로 김일성과 박정희에 의해 선도되었다. 김일성과 박정희의 시대는 전면적인 경제전의 시대였고, 이는 지금까지도 남북의 체제와 민중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2년 출간되었던 동 제목의 책이 일부 개정을 거쳐 새롭게 독자를 만난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에는 남북의 체제론 연구가 드물었으며, 특히 남북의 경제전을 다룬 책으로는 거의 유일했다. 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저자는 수년간의 연구와 자료조사를 통해 두 인물이 쌓아올린 역사적 구조물을 넘어서고자 했다. 8년이 지난 지금, 정치적이며 군사적이었던 지난날의 체제경쟁에서 우리는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남북관계 변화의 꿈틀거림은 보인다. 그러나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시대에, 이 책은 분단을 넘어 남북의 현대사를 돌아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

 



분단시대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필요한

김일성과 박정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접근 방식


남북 경제전사()를 다룰 때 가장 큰 문제는 김일성과 박정희를 바라보는 양극단의 분열적인 입장과 태도이다. 지지자들로부터는 숭배의 대상이 되며, 비판자들로부터는 경멸의 대상이 되는 태도는 두 인물에 의해 이루어진 경제전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저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두 인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정권과 권력자의 입장이 아닌, 남북 민중의 입장에서 분단시대를 통합적·역사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남북의 경제전은 처음에는 민생개발 경쟁에서 출발했지만, 이후에는 전쟁을 위한 국방개발 경쟁으로 흘렀다. 김일성과 박정희는 철저히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며 체제경쟁을 이어나갔고, 이 과정에서 남과 북 모두에서 국방개발 총력전체제가 출현하였다. 저자는 이를 국방국가로 규정한다. 책에서는 남북의 경제전이 총력전적 시스템의 전쟁으로 변모하고, 각각 김일성의 국방국가, 박정희의 국방국가가 출현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현대사의 두 위인’, 김일성과 박정희가 구축한 난해하고도 완강한 역사적 구조물인 총력전체제에 대면할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남북 민중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왜 김일성, 그리고 박정희인가

김일성과 박정희. 한반도 최초의 

전면적인 경제전 시대의 막을 열다

왜 이 책의 제목이 박정희가 아닌, 김일성으로 시작하느냐는 물음에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김일성은 전후복구 면에서나 민생복지, 그리고 군수공업이나 병기생산 등 모든 면에서 선두주자였다. 박정희는 김일성을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박정희가 김일성을 따라잡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삼게 한 원인이 되었다.”

경제전도 김일성에 의해 먼저 시작되었다. 1953년 전후 복구 시기의 김일성의 지상낙원론 연설, 즉 북과 남의 경제적 차이를 천당과 지옥의 차이가 나도록 하자는 선언은 곧 대남 경제전 선언이었다. 이후, 1960년대까지 독주하던 김일성 앞에 박정희가 나타났다. 박정희의 5.16 혁명공약은 김일성에 대한 도전장이었으며, 이때부터 북과 남은 본격적인 경제전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 책의 제1(2장과 3)에서는 경제전의 제1시기에 나타난 김일성의 지상낙원론과 박정희의 실력배양론을 다룬다. 2(4장과 5)에서는 경제전의 제2시기에 북과 남의 국방국가화에 불을 지핀 김일성의 경제국방 병진노선과 박정희의 국방건설 병진노선을 다룬다. 3(6장과 7)에서는 국방국가로서의 북과 남의 유일체제와 유신체제의 성립과정에서 출현한 신국방경제체제를 다룬다.

이를 통해 저자는 체제경쟁의 성공과 실패보다는 우리가 살아온 시대를 돌아보고, 남북이 함께 만들어가야 할 지표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제전의 최대 수혜자는 김일성과 박정희였다

당초 남북 경제전의 명분은 북에서는 지상낙원, 남에서는 복지국가 건설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후 두 인물은 총력전사상 표출과 국방국가를 향한 질주로 노선을 바꾼다. 그리고 안보위기를 이유로 자신들의 국방사상을 절대화하며 서로의 실상을 알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철저히 차단했고, 이는 국민들의 의식을 분단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김일성과 박정희는 전 사회를 국방국가로 몰아가면서도 여전히 경제건설의 목표는 민생복지에 있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지상낙원과 동방의 복지국가는 없었다. 경제전의 최대의 수혜자는 다름 아닌 김일성과 박정희였다. 김일성은 수령절대주의 체제인 유일체제를 확립하고, 후계 세습체제까지 구축하였으며,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가능케 한 1인 독재체제인 유신체제를 수립하였다. 남북의 권력자는 적대하면서도 서로 야합했던 것이다.




책 속으로

P. 13-14 김일성은 전후복구 면에서나 민생복지, 그리고 군수공업이나 병기생산 모든 면에서 선두주자였다. 안타깝게도 박정희는 시간적인 순차관계로 그를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박정희로 하여금 김일성을 따라잡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삼게 하였다.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전쟁으로 시작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P. 15-16 하지만 남한이 북한에 비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행복한 사회인가라고 묻는다면 NO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남한이 북한에 비해 물질적으로 성장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행복한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남한은 양극화가 진행되고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이다. 북한이 먹을 게 없어서 죽어가는 사회라면 남한은 희망이 없어 죽어가는 사회이다. 북도 남도 병든 국가이다.



 P. 19-20 남북의 경제전을 인식한다는 것은 어느 일방의 부정적인 면만을 또는 긍정적인 면만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경제전의 인식은 분단시대를 분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 민중의 입장에서 양 체제의 긍정과 부정을 통합적·역사적으로 보는 것이다. 남과 북은 한반도의 각기 다르면서도 닮은 얼굴이다. 우리 시대를 안다는 것은 한반도사의 전체상을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반도 현대사의 주요한 일부인 경제전 인식의 의의는 여기에 있다.

 P. 62-63 남북의 지도자는 안보위기를 강조하면서 나라를 전시적인 국방국가로 재편, 전쟁을 위한 경제전에 자국의 국민(인민)을 동원하였지만 그것을 구실로 한편에서 야합하고 다른 한편에서 자신의 절대 권력을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 소개

정광민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791016일 부마항쟁 부산대 시위를 주도한 이래 두 번에 걸쳐 수인(囚人)이 되었다. 부산에서 사회운동에 종사하다가 뒤늦게 공부에 발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대학, 나고야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저서로는 시월의 노래(2019), 역서로는 영국 협동조합의 한 세기(2015) 등이 있다. 현재 사단법인 10·16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목차

 

책머리에 | 개정판을 내면서

 

1장 서론

1. 김일성 vs 박정희인 까닭

2. 본서의 문제인식

3. 경제전쟁을 보는 시각

4. 김일성의 국방국가

5. 박정희의 국방국가

6. 국방국가와 남북관계

7. 본서의 구성

 

1부 지상낙원론 VS 실력배양론

2장 김일성의 대남 경제전 : 지상낙원론과 그 파장

1. 김일성의 대남 경제전-독특한 이중구조

2. 지상낙원론은 대남 경제전 선언

3. 지상낙원의 경제실적: 북한이 남한을 앞서다

4. 지상낙원론의 파장(1): 재일동포 사회에 미친 영향

5. 지상낙원론의 파장(2): 남한사회에 미친 영향

 

3장 박정희의 대북 경제전 : 북한 공산세력을 뒤엎을 수 있는 실력배양을!

1. 박정희의 대북 경제전 선언

2. 실력배양론의 구조

3. 박정희의 급진적 중공업 건설 추진과 실패

4. 베트남전쟁 참전: 미국 전비(戰費) 의존형의 국방·경제 건설 추진

 

2부 경제국방 병진노선 vs 일면국방 일면건설 노선

4장 김일성의 경제국방 병진노선 : 지상낙원에서 국방국가로!

1. 김일성, 7개년계획에서 이밥에 고기국, 비단옷과 기와집을 공약

2. 경제국방 병진노선의 채택

3. 급진적 국방국가화-전시적 유일체제의 확립

4. 국방경제의 재편

5. 지상낙원론의 궤도 수정

6. 궤도 수정의 배경

 

5장 박정희의 일면국방 일면건설 노선 : 국방국가로 가는 길

1. 국정지표의 수정: 일면국방 일면건설

2. 북을 압도하는 힘의 우위를!

3. 총력전적 국방체제와 정신동원 그리고 정치

4. 4대핵공장 건설 추진

5. 4대핵공장 실패의 영향

 

3부 유일체제의 신국방경제체제 vs 유신체제의 신국방경제체제

6장 김일성의 유일체제와 신국방경제체제

1. 유일체제란 무엇인가?

2. 유일체제와 대남 경제전의 논리

3. 국방경제의 재편(1)-2경제위원회의 설립

4. 국방경제의 재편(2)-당경제체제의 출범

5. 신국방경제체제의 구조와 성격

 

7장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신국방경제체제

1. 유신체제란 무엇인가?

2. 유신체제와 국방국가

3. 유신체제와 대북경제전

4. 국방경제의 재편(1): 박정희의 국방경제 직할체제

5. 국방경제의 재편(2): 국방·개발체제의 정비

6. 신국방경제체제의 구조와 성격

 

8장 결론

1. 경제전의 최대의 수혜자는 김일성과 박정희

2. 남북의 군산학복합체: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

3. 경제성장을 결여한 보편적 복지 vs 경제성장 우선의 잔여적·선별적 복지

4. 힘의 압도적 우위라는 환상

5. 탈국방국가의 길

 

| /그림 목차 | 참고문헌 | 찾아보기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전쟁

분단을 넘어 다시 보는 남북 통치경제학


정광민 지음 | 414쪽 | 152*225 | 978-89-6545-654-4 (03300) 

| 25,000원 | 2020년 4월 13일 출간  

김일성과 박정희에 의해 선도된 분단시대의 가열찬 체제 경쟁을 남북 통치경제학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두 인물이 펼친 전면적인 경제전의 시대는 지금까지도 남북의 체제와 민중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시대에, 이 책은 분단을 넘어 남북의 현대사를 돌아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전쟁 - 10점
정광민 지음/산지니


Posted by 에디터날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윤현주의 맛있는 인터뷰]

10·16 부마민주항쟁 주역 정광민 ‘부마연구소’ 이사장

 

“부마항쟁은 한국 민주화운동 원형, 기념관 반드시 지어야”

 

 정광민 10·16부마민주항쟁연구소 이사장이 부산대 안에 설치된 항쟁 표지석 앞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국가기념일 지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이재찬 기자

 

1979년 10월 16일 오전 9시 50분께 부산대 인문사회관(현 제1사범관) 강의실에 21살의 한 청년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강단에 선 이 청년은 화폐금융론 수업을 기다리던 70여 명의 학도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학우 여러분, 이제 우리 투쟁할 때가 왔습니다. 나가서 싸웁시다.”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왔고, 잠시 후(경찰의 공식 시간은 오전 9시 53분) 상대 건물(현 자연과학관) 앞에 정렬했다. 학생들은 대열을 맞춰 구호를 외치며 300여m 떨어진 옛 도서관(현 건설관) 앞까지 행진했다. 학생들은 이날 오후 서면과 남포동 등 시내로 진출했으며 남포동 옛 시청 앞에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합세했다. 이튿날 시위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으며 18일 마산까지 활활 번졌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몰락을 가져온 10·16부마민주항쟁은 그렇게 촉발됐다. 그 불씨를 당긴 이가 정광민(61) 10·16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이다. 부산대 교정과 연구소를 오가며 정 이사장을 만나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1980년 2월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 동교동 자택을 방문한 일행. 왼쪽에서 네 번째가 정 이사장.

 1980년 2월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 동교동 자택을 방문한 일행. 왼쪽에서 네 번째가 정 이사장.

 

-항쟁 40년 만에 10월 16일이 정부 공식기념일로 지정됐는데, 감회는?

“항쟁 당사자로서 너무나 감개무량하다. 그동안 부마항쟁이 홀대 받고 하대 받으며 40년이 지났다. 늦게나마 국가기념일이 된 것은 정말 다행이다. 이제부터라도 그 의미를 제대로 살려 나가야 한다.”

 

-국가기념일 지정이 왜 이렇게 늦어졌다고 생각하나? 

“이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아픈 부분이다. 항쟁 당사자나 피해자들이 주체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사업을 대행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그들이 직접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항쟁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알리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본다. 또 항쟁 이후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낸 광주 5·18이 일어나면서 그 그늘에 가려진 측면이 있다. 부산 정치권의 소극적 자세도 한 원인이다.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으로 지역의 정서가 보수화된 것도 지적할 수 있다.” 

 

-1989년 항쟁 10주년을 맞이하여 부마항쟁 관련자들이 주도적으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를 만든 것으로 아는데, 당신의 책 〈시월의 노래〉에 보면 ‘부마 당자들이 사업 주체가 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온다. 무슨 뜻인가? 

“기념사업회는 1994년 4월 사단법인으로 전환됐고 1997년 1월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로 명칭이 변경되며 ‘부마’가 결락됐다. 명칭 변경을 ‘6·10항쟁’ 주역들이 주도하면서 부마 관련자들 다수가 배제되거나 소외됐다. 부산에 ‘부마’만 있는 게 아니고, 4·19도 있고 6·10도 있는데 구태여 ‘부마기념사업회’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포괄주의가 명분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부산의 고유한 민주화운동 자산이 없어져 버렸다.” 

정 이사장은 〈시월의 노래〉에서 “1994년 이후 기념사업회는 6월항쟁 세력에 의해 사실상 장악되었다. 부산 주류의 부마기념사업회 강탈 사건 혹은 쿠데타, 이것이 명칭 변경의 본질이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특히 부산민주공원도 부마항쟁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됐는데, 6월항쟁 세력들이 장악하면서 역대 관장들은 죄다 부마와 관련이 없는 인사들이 차지했다고도 지적했다.

 

정성길 화백의 ‘국제시장 계엄군’. 정성길 화백의 ‘국제시장 계엄군’.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면? 

“박정희 유신체제 18년 동안 이런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초기엔 학생들이 주동이 됐지만 차츰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범시민적인 민주화운동으로 승화됐다. 독재체제의 불합리성뿐만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반발의 결과라는 점에서 부마항쟁은 향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원형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부마가 없었다면 이듬해 5·18도, 1987년 6·10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 이사장은 자신은 정치학자도, 사상가도, 운동권도 아닌 정의가 넘치는 청년 학생이었다면서, 항쟁의 현대적 의미를 찾는다면 민주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의 새로운 과제는 무엇인가에 대해 끝없이 의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문재인정부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나?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부마항쟁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역사적 맥락을 본다면 문 정부가 어쨌든 과거 정부와 다른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관련자로서 높이 평가하고 고맙게 생각한다. 다만 최근의 상황을 보면 좀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어떤 정부라도 확신을 가지지 말고 ‘부마’의 정신을 가지고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지난 40년의 삶은 어떠했나? 

“아, 참, 굴곡이 많았다…. 내가 원해 뛰어든 것이었지만 ‘부마’와 관련됐기 때문에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느 시점에선 벗어나고 싶었지만 굴러가는 수레바퀴에 옷자락이 끼어 바퀴를 따라가야 하는 그런 상황의 연속이었다.” 

정 이사장은 ‘부마’ 주동자라는 이유로 두 번에 걸쳐 수인 생활을 해야 했다. 첫 번째는 1979년 10월 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돼 50일간 복역했으며 이듬해 5·18이 나면서 신군부의 일제검속에 걸려 이듬해 3월 3일까지 다시 복역해야 했다. 두 번의 복역은 주홍글씨로 작용해 그는 평생 신산한 주변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석방 후 생활은 어땠나? 

“1984년 복학해 86년 졸업했다. 그 무렵은 다들 ‘현장’으로 가는 분위기였다. 징역을 두 번 살고 나니 보통의 삶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지역사회문제자료연구실‘에서 〈지역과 노동〉 잡지를 3년간 발행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경제적 재생산이 안 돼 결국 문을 닫았다.” 

그 후 정 이사장은 이흥록 변호사의 조언으로 1994~98년까지 일본 교토대학 석사 과정을 다녔으며, 잠시 귀국해 환경 관련 연구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가 나고야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2005년 귀국했다.

 

부마항쟁연구소 정기총회 모습. 부마항쟁연구소 정기총회 모습.

 

-박사 학위로 취업은 안 됐나? 

“노무현정부 때인 2005년 9월께 국정원 산하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부마’ 전력 때문에 취업이 굉장히 힘들었다. 그런데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 엄청난 사퇴 압박을 받았다. 이를 악물고 1년간 버텼지만 2010년 결국 사표를 썼다. 그 이후 경제적 난민으로 살아야 했다.”

그 뒤 부산으로 내려온 정 이사장은 2017년 부마 관련자들과 함께 부마항쟁연구소를 설립, 국가기념일 지정 등의 운동에 주력해 왔다.

 

-기념관 건립 문제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데. 

“나는 부마항쟁 기념관을 반드시 지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민주공원 안에 특별 전시관을 짓느니, 부산대 안에 기념관이 건립되고 있다느니, 여러 대안들이 나오고 있는데 모두 편의적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마당에 시민적인 기념시설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정 이사장은 관련 조례 제정도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광주 5·18조례, 대구 2·28조례, 대전 3·8조례, 제주 4·3조례 등 각 시도마다 주요 항쟁의 개별 조례가 있는데, 부산만 ‘민주화운동 기념 및 정신계승에 관한 조례’ 안에 ‘부마’ 항목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 신고는 제대로 되고 있나? 

“진상규명위원회가 2014년부터 신고를 접수해 오고 있다. 올해 말까지 300여 명이 관련자로 인정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정부 들어 이전보다 그 숫자가 크게 늘어난 것은 맞지만 항쟁 규모에 비해 여전히 적은 숫자이다. 시효 때문에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관련자들이 거의 패소한 것도 해결 과제이다. ‘부마항쟁법’을 내년까지 1년 더 연장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향후 활동 계획은? 

“부마항쟁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그동안 제대로 보호가 안 돼 비틀어지고 시든 상태이다. 기념일 지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생명이 움트고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야 한다. 관심의 거름과 물을 주어야 한다. 관련자들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 시민들이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시민 교육과 교재 개발도 서둘러야 할 과제다.”

 

고 임수생 시인은 시 ‘거대한 불꽃 부마민주항쟁’에서 부마항쟁을 ‘깨꽃혁명’으로 명명했다. 정 이사장은 이를 인용해 〈짓밟힌 깨꽃의 기억〉이란 평설을 쓴 적이 있다. 40년간 신산했던 그의 삶이 국가기념일 지정을 계기로 깨꽃처럼 고소하고 암팡지기를 기원해 본다. 

 

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기사 바로 보기


 

‘다시 시월 1979’ 

 

10·16부마항쟁연구소는 2017년 6월 정광민 이사장 등 ‘부마’ 관련자들이 주축이 돼 설립됐다. 부산대와 동아대 출신 관련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시민, 교수, 인권변호사, 언론계 종사자 등도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부마 관련자 실태조사, 항쟁의 역사적 평가, 시민 교육, 기념관 건립 추진 등이 주된 업무이다.

정 이사장은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공모사업에 선정돼 진행해 온 기념 도서가 곧 출간된다”며 상기됐다. 책 제목은 〈다시 시월 1979〉. 총 3부로 구성됐다. 1부는 ‘그날의 기억과 기록’으로, 사건의 흐름을 다루고 있다. 2부는 ‘회고와 증언’으로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었다. 3부는 ‘부마항쟁과 한국의 민주화’로 기념관 건립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연구소 측은 항쟁 기념일 하루 전인 오는 15일 부산대 10·16기념관에서 도서 출간 기념행사를 연다.

051-966-1016, 010-8570-1016. 

 

 

다시 시월 1979 - 10점
10·16부마항쟁연구소 엮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