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2화 ::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었다?! -부산 기장 죽성리·임랑포 왜성

 


 

 

“멀리 기차소리를 바람결에 들으며, 어쩌다 동해 파도가 돌각담 밑을 찰싹대는 갯마을.”

 

  난계 오영수(1909~1979)의 단편소설 <갯마을> 첫머리에서 이렇게 묘사한, 소설의 실제 배경이 된 마을은 부산 기장군 일광면 학리 또는 이을포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마을들과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이웃한 곳에 각각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와 장안읍 임랑포 마을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도시문명과는 거리를 둔 한적하고 외진, 그래서 더욱 평화로운 해안 포구죠.

 

  420여년 이런 마을에도 임진왜란의 광풍은 그냥 비켜가지 않았습니다. 1592년 음력 4월 보름 부산 동래읍성을 함락한 왜군은 세 길로 나눠 북상하면서 이튿날 동쪽으로 기장을 거쳐 울산, 경주 등을 가차 없이 짓밟고 올라갔죠. 이후 왜군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반격에다 조선 수군의 해상로 봉쇄 및 의병 봉기 등에 따른 배후 보급로 차단으로 수세에 몰리자 이듬해 4월부터 한강 이남으로 물러나 동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장기전에 들어갔습니다. 이즈음 이곳 죽성리와 임랑포 마을에도 왜성을 남기게 됩니다.

 

■ 무명 조선 도공의 넋을 기리다

 

무명도공추모비(송중환 소름요 대표 제공) 

 

  죽성리 왜성 인근 서답골 또는 세답골이라 불리는 골짜기 한켠에 ‘소름요’라는 도자기 공방이 있다. 공방에서 해안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가마터 쪽으로 가면 ‘무명도공추모비’라고 새긴 비석이 서있다. 송중환 소름요 대표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던 조선 도공과 사기장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2004년 5월 사비를 들여 세운 것이다. 송 대표는 이후 지역의 관심 있는 이들을 모아 조선사기장연구회를 만들고, 회원들과 함께 해마다 이 비석 앞에 차와 꽃을 올리는 추모제를 열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6세기부터 일본에선 차 마시는 풍습과 다도가 유행했다. 당시 100여년 동안 지속됐던 일본 전국시대의 내전을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휘하에 복속시킨 영주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고 영토 확장의 야욕을 실현하려 조선을 침략한 전쟁을 일으킨 와중에도 나고야 진중에서 자주 다회를 열어 즐겼다고 한다. 이에 조선에 파병된 영주와 장수들은 조선 각지에서 수많은 도공과 사기장들을 경쟁적으로 붙잡아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도자기 파편

 

 

  황구 기장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에 따르면 기장지역은 오래 전부터 도자기 생산에 필요한 장인과 흙, 물, 가마 등 조건을 모두 갖춘 대표적인 생산지라고 한다. 황 소장은 “2000년대 초 기장군 장안읍 임랑포 바닷가에서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깨진 조각을 200여점 가량 수습한 적이 있다. 아마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도공들을 납치해가면서 도자기들도 함께 약탈해가다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사기장과 도공 등 포로들을 일본에 끌고간 왜군 영주와 장수들은 이들을 주로 자신의 고향에 강제이주시켜 평생 도자기를 구우며 살도록 했는데, 관련 기록이 주요 영주 집안에서 내려오는 가문서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죽성리 왜성과 임랑포 왜성을 쌓고 주둔했던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와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는 모두 왜란 중 사기장과 도공들을 숱하게 붙잡아 끌고간 것으로 악명이 높다.

 

  7년 왜란 기간 동안 도공과 사기장 같은 장인 외에도 수많은 조선 민간인이 일본에 끌려갔다. 정확한 집계는 불가능하나 일본 쪽 연구자들은 5만~6만명, 한국 쪽에선 10만~20만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나가사키를 통해 포르투갈 노예상인들에게 팔려간 민간인까지 치면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 읍성·진성의 돌을 뽑아 왜성을 쌓다

 

두모포 진성

 

  “진중의 왜인들이 바야흐로 축성 공사를 일으켜 나무를 끌어오고 돌을 실어나르는 왜인이 도로를 메웠으며 옛 (기장)현의 성에서 돌을 반수 이상이나 뽑아내고 또 근처의 암석을 채취해 끊임없이 실어날랐다.”

 

  <선조실록>은 1595년 12월 죽성리 왜성 상황과 관련해 이런 기록도 남겼다. 왜군들이 죽성리 왜성을 증축하면서 조선 읍성과 수군 진성의 돌을 마구 뽑아다 썼던 것이다.

 

  성벽은 주로 화강암을 써서 70도 정도 경사지게 비스듬히 쌓았는데, 외성 일부 구간에서 수직으로 축조된 성벽이 드러나 이곳이 애초 조선 수군의 두모포 진성 남쪽 구간인 것으로 확인됐다. 왜군들이 조선의 진성 일부 구간을 편입시켜 왜성을 축조한 사례다. 왜성과 우리 고유 성곽의 차이를 비교해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전체적으로 죽성리 왜성은 청강천(신천천)의 자연지형과 해자를 통해 북서쪽의 외곽 방어망을 철저히 하면서 동쪽으로 죽성만 포구를 감싸안은 형태의 해안 요새로 보인다. 또 기존 조선 수군의 거점을 십분 활용하면서도 그 거점을 파괴하는 이중효과까지 노렸다.

 

  부산 복천박물관은 2002년 도로개설 구간에 포함된 죽성리 왜성 본성 북쪽의 외성 일부분을 발굴조사했다. 여기서 띠 모양의 성곽터(4개)에 ‘스리바치’라는 일본 전국시대 조리기구와 상감청자·백자·도자 파편 등이 출토됐다.

 

■고리원전 이주단지에서 확인된 왜성 유적

 

 ▲ 임랑포 왜성

 

  2001년 중앙문화재연구원은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일대 고리원전 주민 이주단지 예정터에서 발굴조사를 벌여 왜성 성곽터(3개)와 건물을 세우고 구덩이를 파냈던 흔적 등을 기와·도자기 파편 등의 유물과 함께 확인했다. 이 곳은 인근에 있는 고리원전의 추가 건설에 따라 장안읍 효암리 주민 50여가구가 집단 이주한 곳인데, 이주단지 터 조성 전 사전 지표조사에서 왜성 터 유구가 확인돼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임랑포 왜성 외곽부의 성터가 드러난 것이다.

 

  이주단지에 있던 외곽부 성은 고도가 높지 않고 임랑포 앞바다와 접해 있으나 해안 쪽으로 전망이 좋고 비교적 급경사를 이뤄 방어에도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금은 철도와 도로 건설, 이주단지 조성 등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고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이 왜성은 규모는 비교적 작지만 성곽과 해자, 왜성의 본 모습을 알 수 있는 여러 시설물의 기초가 아직 잘 남아 있는 편이다. 하지만 본성 일대조차 문화재나 공원구역 지정 등 어떤 보호장치도 없이 방치돼, 대부분이 잡목과 수풀 더미에 묻히고 주변의 무분별한 개발로 훼손되고 있어 전문가가 아니면 알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더 이상 훼손을 막아 왜성 축성사를 이해하는 학술자료로서는 물론 아픈 민족사의 현장이라는 가치로 볼 때도 보존의 필요성은 충분해 보인다.

 

>> 3화에서 계속

 

*본 게시물의 순서와 책의 목차는 상이합니다.

*게시물의 내용은 책 본문의 내용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