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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취재후기]<왜성, 재발견>후일담

1화-동래읍성의 아픔을 420년만에 발굴하다-부산 동래왜성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4. 22.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1화 :: 동래읍성의 아픔을 420년만에 발굴하다-부산 동래왜성

 


 

 

위의 사진은 무엇일까요?

 

  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동래읍성 유적입니다. 처참했던 1592년 음력 4월15일 동래읍성 전투상황을 그대로 간직한 유적이죠.

 

  이후 경남문화재연구원은 곧바로 발굴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성곽을 따라 땅을 길게 판 해자에선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과 투구, 환도, 창, 화살촉 등 전투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죠.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전쟁의 처참한 흔적이 남아 있는 사람뼈였습니다. 해자 밑바닥에선 남자 59명, 여자 21명, 어린이 1명 등 모두 81명의 뼈가 발굴됐는데요, 이 가운데 8명의 두개골에선 칼에 베이거나, 활이나 총, 둔기 등에 맞은 흔적이 드러났습니다. 이렇듯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끝까지 저항하다 스러져간 조선 백성들의 주검이 동래읍성 해자에 아무렇게나 던져졌습니다.

 

  그렇게 우리 역사에서 잊혀져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조선 백성들이 420여년만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 치열했던 동래읍성 전투 그 이후... 병참선 확보, 통치 목적의 동래왜성

 

 

  왜군은 동래읍성을 함락한 뒤 동래읍성 동헌에서 동쪽으로 700여m 떨어진 구릉 꼭대기에 동래왜성을 쌓았다. 임진강·행주대첩·2차 진주성·울산성 전투 등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굵직굵직한 싸움에 참전했던 킷가와 히로이에(吉川廣家)가 이 왜성을 만들어 머물렀다.

  그는 왜군 장수 중에 가장 많은 3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와서 부산 증산왜성 등을 쌓은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의 사촌이다. 킷가와는 모리 가문의 선봉대를 맡았는데, 자신의 공적을 쌓기 위해 조선인의 코를 베어가는 왜장으로 악명이 높았다. <킷가와 가문 문서>에는 그가 1597년 9월1일부터 같은달 26일까지 전라도 일대에서 조선군의 코 1만4800여개를 베어갔다고 기록돼 있다. 학계는 조선군의 코가 아니라 아녀자와 노약자 등 조선 백성들의 코를 베어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부산 동래구 칠산동에 있는 동래읍성의 동장대. 임진왜란 때 왜군은 이곳에 동래왜성의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

 

  강이나 바다 근처 낮은 구릉에 있는 대부분의 왜성과 달리 동래왜성은 내륙에 깊숙히 들어와 있다. 학계는 왜군이 부산의 국방·행정 중심지였던 동래에 병참선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내륙에 동래왜성을 쌓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왜군은 동래왜성을 쌓으며 1446년(세종 28년) 세워진 옛 동래읍성을 파괴해 석재를 조달했다. 조선은 1731년(영조 7년) 옛 동래읍성의 6배 규모로 새 동래읍성을 건설하며 동래왜성 성벽의 돌을 가져다 사용했다. 왜군은 동래왜성을 쌓으며 옛 동래읍성의 돌을 재활용했고, 조선은 새 동래읍성을 쌓으며 동래왜성의 돌을 또다시 재활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 동래왜성에 석축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동래왜성 2곽 추정 지역을 지나 구릉 꼭대기로 올라가면, 1곽이 나온다.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에 조선후기 동래읍성의 동장대가 세워졌다. 해운대, 기장, 구포 등 부산 외곽으로 가는 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동장대 동쪽 비탈엔 30~40m 길이의 해자가 보인다.

  1979년 동장대 복원공사 당시 이곳에서 조선 기와가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일본에 돌아가 세운 구마모토(熊本) 무기시마(麥島)성 천수각에서 같은 제작틀로 만든 기와가 출토됐다. 동래읍성에서 가져간 것을 본보기로 만든 기와를 일본성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충렬사 경내로 들어가 동래구 칠산동 쪽으로 내려가면, 동래사적공원의 구릉을 타고 길게 늘어서 있는 조선후기 동래읍성 복원 성벽이 보인다. 조선후기 동래읍성의 문 가운데 하나인 ‘인생문’도 저 멀리 보일듯 말듯하다.

  인생문이라는 이름 유래는 임진왜란 당시 인생문 고개를 통해 도망간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기 때문이라는 설과,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에서 죽은 주검들을 성 밖 묘지로 옮기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인생문은 1731년(영조 7년) 새로 만든 조선후기 동래읍성에 딸린 문으로 1592년(선조 25년) 일어난 임진왜란과는 관련이 없다. 임진왜란 때 억울하고 처절했던 조선 백성 사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내용이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 2화에서 계속

 

*본 게시물의 순서와 책의 목차는 상이합니다.

*게시물의 내용은 책 본문의 내용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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