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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성은 치욕의 물증 아닌 전리품이다(한겨레)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7. 29.

역사의 블랙박스 - 왜성 재발견
신동명·최상원·김영동 지음/산지니·1만5000원



우리에겐 두 종류의 외침이 있다. 수, 당, 원, 청 등 북방계가 제1이고, 남방의 일본이 제2다. 특이한 것은 북방계는 관심이 많은 반면, 남방계는 그렇지 않다. ‘그럴 리가?’ 싶지만 실제로 그렇다.

남해안에는 임진왜란, 태평양 전쟁 등 남방계 전쟁 유적이 즐비하지만 대부분이 무관심 속에 버려지거나 훼손되고 있다. 태평양 전쟁을 보자면 일제는 전쟁 막바지에 미군의 한반도 상륙에 대비하여 남해안에 촘촘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부산에서 목포에 이르기까지 상륙 예상 지점마다 관측시설과 포 진지를 만들고 각종 중화기를 배치했다. 해방과 함께 이 시설물은 한결같이 파괴 과정을 거친다. 반일감정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일본 제국주의의 호전성과 만행의 증거인 동시에, 국난을 극복하고 얻은 전리품이며, 노역에 동원된 조선 민중의 피땀이기도 한 까닭이다.

임진왜란도 그렇다. 왜군은 조선에서 7년 동안 전쟁을 벌이면서 남해안 곳곳에 성을 쌓았다. 왜군은 두 달 만에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석권하였으나 전열을 정비한 조선의 민관합동작전에 밀려 남해안에 웅거해 부산, 창원, 거제도 일대에 성을 쌓고 장기전에 돌입했다. 명과의 종전협상이 결렬되자 철군했던 군대를 다시 투입해 기존 남동부의 성을 증개축하고 일부는 서진하여 고성, 사천, 순천 등지에 새로운 성을 쌓았다. 지금까지 파악된 잔존 왜성은 30여곳.

<왜성 재발견>은 국가문화재에서 지방문화재로 격하돼 주목을 받지 못하는 왜성의 실상을 파악해 기록하고 그 의미를 되새긴다. 누가, 언제, 어디에, 어떻게 쌓았고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꼼꼼히 따져 7년에 걸친 조선, 왜, 명 등 3국에 얽힌 역사의 블랙박스를 열어젖힌다. 블랙박스라고 했거니와 조선의 항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단면적인 기술에 그친 임진왜란사를 두 민족의 침략과 항전, 나아가 동북아 판세에 일대 변화를 부른 국제전쟁으로 지평을 넓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책의 바탕은 꼼꼼히 들여다보기. 왜성은 강이나 바다 부근의 요충지에 자리잡은 게 특징. 일본에서 병력과 물자를 조달하기 쉽고 언제든 북상할 수 있으며 여의치 않으면 쉽게 퇴각할 수 있는 곳이다. 주민을 아우르기 위해 비교적 넓은 지역을 홑겹으로 두른 조선의 성곽과 달리 독립한 산과 구릉을 택하여 우두머리가 거주하며 전투를 지휘하는 천수각을 중심으로 두세 겹 성으로써 방어선을 구축했다. 성벽은 60~70도로 완만하여 쉽게 파괴되지 않도록 했다. 그런 탓에 임진왜란 후기 해전에서의 연패와 달리 육상 공성전에서는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다만, 성안에 우물이 없어 장기 농성에서 심각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전후 축성기술은 양국에 영향을 미쳐 수원 화성을 쌓을 때 직벽을 지양했고, 철수한 왜의 장수는 자신의 성 안에 우물을 파고 밖으로 돌출하여 적을 협공할 수 있는 ‘치’를 만들었다. 기현상도 벌어졌다. 왜성은 가까운 조선 성곽의 성돌을 헐어 쓰고, 전후 조선군은 왜성을 뜯어 허물어진 성곽을 보수하는 등 같은 재료가 왕래했다. 때로 왜성은 통째 조선군 주둔지로 재활용되기도 했다.

미답의 왜성을 총정리한 지은이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한겨레 ㅣ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ㅣ 201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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