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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0. 12. 21.

<광주드림>에 『탈학습, 한나 아렌트의 사유방식』 서평이 실렸네요 :)

저도 참 좋아하는 책인데, 두고두고 사랑 받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이 글의 필자이신 동네책방 '숨' 안혜민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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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기

[동네책방]‘‘탈학습, 한나 아렌트의 사유방식’


어쩌면 2020년은 우리 모두의 삶에서 지워진 것 같다. 2020이라는 숫자는 사라지고, 판데믹과 확진자,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의 숫자들이 우리 주변에 항시 도사리고 있다. 12월 추운 겨울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와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올해가 지나도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 내년에는? 내후년에는? 우리는 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기는 한 것일까? 많은 사람이 코로나 시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보다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하여. 혼란의 시기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혼란을 사유하고 고뇌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유하고 고뇌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오래도록 지식인의 영역은 지식인들의 것으로만 여겨져 왔다. 수없이 많은 철학적 맥락을 모두 공부하고, 기억하는 사람들만이 더 앞으로 나아가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이다. 배운 것이 많아야 생각도 할 수 있고, 이런 생각이 있어야 또 다른 배움을 위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은 강의가 되기도, 글이나 책이 되기도, 삶의 형태가 되기도 한다. 전문가의 발언과 어려운 논문 제목들로 우리 ‘일반인’들은 그 형태를 어렴풋이 감지한다.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가 바로 이러한 방식의 사유를 거부했다고 마리 루이제 크노트는 말한다.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기자이자 작가, 번역가인 그는 ‘탈학습, 한나 아렌트의 사유방식’(산지니, 2016)이라는 책에서 아렌트가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도 사유하게 하는 글’을 쓴다고 표현했다. 학습보다는 단어 자체에 숨어있는 다양한 의미를 생각하고, 본문에서 채택된 인용구만을 통해 어렵다고만 느껴지는 과거의 인물들에게 반박할 수 있도록 하는 글을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순서를 심각하게 거스르는 일이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유할 수 있는, ‘어려운’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글은 인간이 어떠한 생각을 전달하는 데에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방식이다. 철학과 정치를 공부한 아렌트는 어떤 연유로 이런 생각에 골몰하게 된 것일까?
한나 아렌트의 이름은 모르더라도 악의 평범성을 아는 사람들은 있을 것이다. 아렌트는 그 유명한 아이히만의 재판을 겪으며 이 개념을 소개했는데, ‘탈학습, 한나 아렌트의 사유방식’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악의 평범성이 아닌, 인간 아이히만을 만난 한나 아렌트의 반응이었다. 아렌트는 상투적이고 일반적인, 지식인 대부분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말들로 자신의 엄청난 범죄사실을 숨기는 아이히만을 만났다. 유대인 대학살을 주도한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동에 어떠한 죄책감이나 부끄러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유대인과 유대국가에 대한 연민을 품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모멸감과 당혹스러움을 어떻게 대처할지 몰랐던 아렌트는 ‘당돌한 반어법’과 ‘웃음’을 사용했다. 아이히만을 진지한 철학적 언어로 비판하지 않고 조롱했으며, 심문 보고서를 읽으며 쉬지 않고 웃었다. 이것은 정석을 따르는 길이 아니었고,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인 방식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아렌트를 비판하였지만, 그것은 도저히 답을 낼 수 없는 상황의 유일한 해결법이었다. 절망스러운 감정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만약 이 세상에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얻는 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끔찍한 권력자의 연설일 것이다. 모든 단어와 문장은 다르게 해석되고 그렇기에 글을 쓰는 것은 단순한 주장의 기록 이상의 의미가 있다. 글은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행위’이다. 독일어를 사용하던 아렌트는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자신의 이야기를 영어권 인사들에게 전하기 위해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야 했다. 자신의 글뿐 아니라 생각 자체를 ‘적절히 번역’하고자 애쓴 것이다. 각 나라의 언어는 달라서 한 가지 의미에 여러 단어가 연결될 때도, 여러 가지 의미에 한 단어가 연결될 때도 있다. 한나 아렌트는 언어를 잘 사용하지 못할 때의 한계가 얼마나 큰지를 잘 알았던 것 같다.
이렇듯 아렌트는 감당할 수 없는, 그렇기에 말할 수 없는 것, 동시에 타인에게 알려야 하는 것에 나날이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감당할 수 없으므로 매번 다르게 표현해도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방식. 언어를 유연하게 사용하게끔 하는 방식. 정치 이론가 아렌트의 사상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고, 이런 표현을 듣고 있자면 이 사람이 쓴 글은 고리타분한 교양서 정도로 느껴지겠지만, 그 반대다. 아렌트는 시문학과 같은 방식의 글을 쓰기로, 시문학의 부분들에 도움을 받아 자신의 말을 글로 옮기기로 했다. 운율이 있는 주장, 독자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는 문장. 물음표. 그것이 한나 아렌트의 ‘탈학습’이자 ‘진정한 자발적 사유’이다.
낯설은 이름이지만 탈학습은 배움, 즉 세상을 습득하는 것 자체를 멈춘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깥의 것을 그저 내 것이라 착각하며 무작정 받아들이지 않고, 잘 쓰인 글에 말 없이 반박하며 토론하며 순간순간을 사유한다는 의미다. 21세기의 우리가 20세기 초중반의 사상가를 지레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않을 수 있는 이유다.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기만을 바라게 되는 요즈음이다. 불완전한 말과 글 사이에서 끝없이 사유하며 12월을 지나보낸다.
문의 062-954-9420.
안혜민 <동네책방 숨>

탈학습, 한나 아렌트의 사유방식 - 10점
마리 루이제 크노트 지음, 배기정.김송인 옮김/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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