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1일 토요일, 해운대 달맞이고개에서 열린 <추리문학관 20주년 행사>. 화창한 날씨와 개관 행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저 음습한 톨스토이의 사진이 방문객들을 맞고 있었습니다. 왠만하면 마주보고 싶지 않은 얼굴 덕에,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 했습니다.
는 뻥이고 저 화환들 때문에 한눈에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포스터의 음습한 포스는 화환들을 완벽히 제압하고 있었습니다.
추리문학관,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직접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어찌나 완벽한 타이밍인지, 첫 방문에 20주년 개관행사가 겹치다니요. 무슨 중요한 복선이라도 되는 양, 완벽한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행사가 없었다면 추리문학에 대한 선입관이 여전히 제 머릿속 어딘가에 박혀, 미궁속을 떠돌고 있었을 겁니다. 직접 탐정이 되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문제는 언제나 수수께끼로 남는 법이지요. 추리문학의 매력을 다시 알게 된 행사 속으로 들어가봅시다.
첫 번째 강연입니다. 이상우 작가의 <추리소설과 한국문학>. 추리소설의 계보를 한눈에 알 수 있는 매우 유용한 강연이었습니다. 특히 저처럼 추리소설에 완전히 문외한인 사람에게 안성맞춤이었지요.
재미있는 것은 최초 추리소설인 <정수경전>과 신소설의 최초 추리소설인 <구의산>에서 탐정이 모두 여자라는 점이었습니다. 이 여탐정들은 둘 다 신혼첫날밤에 이루어진 살인사건의 전말은 밝혀냅니다. 아마도 억압적인 사회적 위치에 놓인 탓으로, 직접 탐정이 되어 사건의 본말을 밝혀낼 수밖에 없었던 거겠죠. 그래선지 이 여탐정들의 총명함이 더 도드라져보이기도 합니다.
이후 '정탐소설'이라는 현대추리소설이 등장하지만, 본격장르문학으로 분류하기는 어렵고, 1930년대 방인근과 김내성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본격추리소설시대가 시작됩니다. 방인근은 백 여편의 추리소설을 써냈고 잡지 <조선문단>을 만들어 활동했지만, 이로 인해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쓸쓸한 노후를 보냈다고 합니다. 대표작으로는 『마도의 향불』이 있습니다. 김내성은 "30년대 식민지 대중적 감수성을 새로운 지평으로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출중한 소설가였습니다. '쌍둥이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깨고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라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고, 추리소설에 대한 이론강의를 열렬히 진행하기도 하는 등, 추리소설계보에서 한 획을 긋는 활동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순수문단 측에서는 끝까지 추리소설을 이단시하는 경향을 보여다고 합니다. 대표작으로는 『마인』과 『사상의 은혜』가 있습니다. 김내성 이후로는 이렇다할 작가가 등장하지 않아 공백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후 70년대에 이르러서야 영문학자들이 "왜 우리나라에는 추리소설이 없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미스터리 클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한국문단에서 추리소설이 새롭게 부흥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1974년에 『최후의 증인』으로 데뷔한 김성종 작가의 등장은 '김내성 이후의 작가'로 두각을 나타내며, 노원(전직이 중앙정보부 고위관료였다고 합니다), 현재훈, 이상우 작가와 함께 '현대추리문학 1세대'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추리문학>이라는 계간지 발간, <김내성 추리문학상> 제정 등 추리문학은 그 독자적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이후 1980년대 중반~1990년대가 되면 그야말로 현대적 추리소설이 붐을 이룹니다. 나오기만 하면 기본으로 몇십 만부가 팔렸다고 하니, 이 수치만으로도 당시 얼마나 많은 인기를 누렸는지 짐작이 갑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1983년 <미스터리클럽>이 해체되고 <한국추리작가협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9년 뒤인 1992년, 추리문학관이 그 문을 열게 되지요.
ppt로 설명해주신 덕에, 예전 자료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추리문학은 한국문학에서 '서자'의 위치로 낙인되어 있습니다. 분명한 장르적 경계 때문일까요? 추리소설적 요소를 다분히 가진 작가들도 스스로를 '추리소설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추리문학시장에서 국가별 점유율도, 한국작품은 3.3%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이너적인 위치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은 점점 더 많은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점점 더 중요한 소설적 요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작년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정유정의 『7년의 밤』도 완벽한 추리소설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지요.
『감자』로 잘 알려진 김동인은 추리소설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해석키 어려운 수수께끼의 해결." 사실 문학이란 것이 삶의 수수께끼를 다루는 것입니다. 추리문학은 그러한 수수께끼를 '형식'으로 차용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한 장르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추리소설을 즐겨 읽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언제나 사건이 '해결'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삶의 수수께끼에는 답이 없는데, 추리소설의 수수께끼엔 언제나 답이 있어서, 그 모든 해결과정 자체가 속임수 같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답을 찾는 것이 꼭 필요할 때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삶은 그대로 내버려 두면 점점 미궁에 빠져들기 때문에, 적절한 때에 답을 찾아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각속으로 사라져버립니다. '추리'라는 말을 단지 특정한 장르와 포맷으로 이해하지 말고, 좀더 광범위하게 차용한다면 매우 매력적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하게 됩니다. "추리문학에 대한 선입견을 깨려면 추리문학관으로 가라." 언제나 단서는 '현장'에 있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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