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의 지층에서 5월은 무엇보다 광주에 대한 기억으로 들끓는 시간입니다. 물론 그 역사적인 5월도 유족을 비롯한 피해 가족들에게는 상처로 얼룩진 가족사의 어떤 질곡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컨대 강풀의 카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 <26>의 서사가 역시 그 가족들의 원한을 복수라는 형식으로 해원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요즈음의 한국소설은 늘 그래왔지만 특히 가족에 예민합니다. 당대의 주류적 서사들이 가족에 어떤 집착을 보인다는 것은 우리사회에 대한 일종의 증후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월을 맞는 저에게도 가족이란 진정으로 곤란한 아포리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며칠 전엔 어버이 날을 맞아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뵙고 왔습니다. 애틋함 가득한 시간이었음에도, 나의 그 방문이란 아마도 간교한 도덕적 책임의 소산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부도덕한 방문의 일정을 마치고 밤늦게 저는 아내와 함께 심야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갔습니다. 마음의 부담을 훌훌 떨치고 어떤 해방감이라도 누리려는 듯이 말이지요. 우리가 본 것은 천명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고령화 가족>이었습니다. 영화는 이 난세에 그래도 가족이란 거의 유일한 희망이 아닌가, 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건 마치 영화에서 몇 차례 반복적으로 비춰준 낡은 맨션의 담벼락에 홀로 허허롭게 핀 민들레꽃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은유는 너무 진부해서 그냥 무시할만한 것이었지요. 영화의 내러티브는 방향을 잃고 위태로웠지만, 그 위태로움 자체가 바로 가족이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가진 작위성의 파탄을 예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억지스런 결말의 행복을 보고 아마 누구라도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탈냉전 이후의 일상은 거대한 역사의 서사들을 무용하게 만들어왔습니다. 할리우드의 액션 영화들마저도 실은 냉전에 대한 알레고리로 분분했습니다만, 이제 서사화되는 것은 그런 역사가 아니라 미세한 욕망들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의 한 가운데 가족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족이란 저 냉전 시대의 몰락 이후 인류가 기대고 있는 거의 유일한 낙원의 유토피아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핍은 채움의 욕동을 일깨우고 동물과 속물로 분기된 주체들은 그 결핍의 보충을 위해 집착 속에서 분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주체들은 진정성의 상실로 더 공허할 따름입니다.

 

다음 날은 마침 일요일이라 아침부터 또 영화를 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전규환 감독의 <불륜의 시대>는 여유와는 좀 거리가 먼 심각한 영화였습니다. 존 카사베츠의 <얼굴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 주제의식은, 교차편집이라든가 롱숏의 앵글로 잡은 이국적인 풍경의 미장센에 대한 감상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영화 속의 부부는 서로 말하고 듣지만 그건 얼굴의 진정한 마주함이 아니기에 대화라 할 수 없는, 그저 응답 없는 독백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서로가 어긋나는 가운데 그들은 외도로 각자의 비밀스런 관계에 몰두합니다. 그리고 끝내 탈로날 수밖에 없는 그 비밀은 일종의 단죄처럼 폭로되고 맙니다. 그리고 아내는 마치 처형이라도 당하듯 살해당하지요. 이 영화에서 가족은 이처럼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한 결사체입니다.

 

영화에서 사람들의 일상으로 분주한 바라니시의 풍경은 남루하지만 그래도 어떤 열기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사랑과 강도와 테러가 혼재한 그곳에서 일상은 폭력 속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영화의 여운은 오래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책을 하고 돌아와 어떤 이끌림처럼 같은 감독의 <댄스 타운>이라는 영화를 찾아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른바 탈북자의 이야기였음에도 역시 그 서사 안에는 가족의 해체라는 모티프가 내장되어 있었습니다. 탈냉전 이후에도 여전히 분단이라는 역사적 조건은 한반도의 민중들에게 가족 해체의 폭력으로 엄존합니다. 물론 이 영화에는 북한의 전체주의에 못지않은 남한 사회의 배타성과 속물성에 대한 비판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저는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탈북과 망명이 전체주의적 국가로부터의 도망이라고 할 때, 그 도주의 선을 가로막고 버티어 선 또 다른 괴물이 가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전체주의적 국가 역시도 사실은 가족 유사성의 체제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결코 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시대에 가족으로부터 망명하지 않는 주체는 결코 자유로운 삶에 이를 수 없다는 엄혹한 인식에 이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가족주의의 공격성과 배타성 너머에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사유들이 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족주의 이후의 가족에 대한 사유는 곧 새로운 연합에의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봅니다. 결사항전하다 스러져간 5월의 그 공동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론으로 일반화될 수 없는 그 정체에 대한 탐문들이 저를 사로잡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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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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