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영의 「순이 삼촌」(1978)을 읽지 않은 대개의 사람들은 아마도 제목의 그 ‘삼촌’이라는 말을 쉽게 오해하고 될 것이다. 남녀 구분 없이 가까운 이웃을 일컫는 이 말에 대한 뭇 사람들의 오해만큼이나 제주에 대한 나의 이해는 일천하다. 제주에 대한 내 인식의 기초는 국민국가의 논리로 학습된 네이션의 감각에 깊이 연루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제주란 나에게 경험을 초월한 저 아득한 관념의 지평 어딘가에 있다. 화산의 섬 제주가 대한민국의 국토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제주에 대해 지금과는 많이 다른 심상들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제주는 역시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한 것처럼 가 닿기 힘든 심원한 기표다.
이런 저런 독서와 공부로 얼룩진 내 심상의 지리 속에서 제주는 무엇보다 4・3의 장소다. 인식의 이런 편향이란 제주를 ‘삼다도’나 국내 제일의 허니문 관광지로 떠올리는 그 자동화된 환기의 습벽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제주를 역사적 사건의 장소로 환기하는 내 인식의 편향이야말로 어쩌면 더 간교하고 영악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반성적인 회고 속에서도 역시 4・3은 나에게 제주의 그 난존하는 모든 이질성들을 압도하는 주인기표다.
고백하건대 나는 아직 제주에 가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에게 제주는 실감이 아닌 감상이다. 그리고 그 감상이란 아마도 몇몇의 텍스트들이 상호텍스트적인 맥락 속에서 대화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리라. 그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근원적인 것은 현기영의 단편들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억눌러온 슬픔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터져버린 울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순이 삼촌의 죽음에 대한 화자의 이런 주해는 그 울음의 깊이를 가늠케 한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순이 삼촌」은 그렇게 발설되지 못한 그 죽음의 풍문을 세상에 알린 용감한 역작이었다. 이야기꾼으로 더 깊어진 현기영은 「마지막 테우리」(1994)로 4・3의 현재성을 탁월한 구성과 문체로 풀어냈다. 이 단편은 마치 지금의 강정을 예감이라도 한 듯 침범당한 순수에 대하여 이렇게 적어놓았다. “그리하여 초원은 이제 다시 한 번 환란을 맞고 있는 것이었다. 밖에서 솔씨 하나만 날아와도 발 못 붙이게 완강하게 거부하던 초원이 사방에 아스팔트도로로 절단되고, 야초를 걷어내어 그 자리에 골프 잔디가 심겨지고 있었다.”
아직 한국에서 완간조차 되지 못한 김석범의 <<화산도>>는 조총련계라는 이유로 입국이 불허한 작가의 처지에서 40여 년 전 고향의 기억과 자료들을 바탕으로 현지조사 없이 이룩한 대작이다. 물론 작가의 정치적 (무)의식이 작품의 어떤 편향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은 그 자체로 그 작가와 작품을 정신적으로 해금하지 못하는 우리 문화의 열악함을 반증한다. 그렇게 4・3은 여전히 일종의 금기이며 좌우의 이념 대립으로 소란스런 격전의 장소다. 그렇다면 지금 독립영화 <지슬>의 ‘돌풍’이란 무엇을 함의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른바 천만관객을 동원하는 영화들의 ‘흥행’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의 수상이 가져다 준 세속적인 요인마저도 저 작은 규모의 영화가 가져온 돌풍의 의미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억압된 것의 회귀를 말했던 프로이트를 빌리지 않더라도, 억압된 것은 언제나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예상 밖의 그 돌풍이란, 나에게는 억압된 것의 회귀라는 집단적 무의식의 한 증상으로 여겨진다.
<지슬>(2012)은 애도의 영화다. 신위(神位), 신묘(神廟), 음복(飮福), 소지(燒紙)라는 네 개의 챕터(시퀀스)는 이 영화의 구성이 제의적 구조를 차용하고 있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망자의 원혼을 떠나보냄으로써 산 자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제의가 갖는 애도의 기능이다. 영화라는 형식으로 제의를 치르겠다는 연출의 발상은 엄중하지만, 동시에 그 합목적적인 제례의 의식이란 진정한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합적인 틀이다. 작위적인 제례가 일종의 낭만적 허위라면 그 제의의 플롯을 그대로 내러티브로 한 구성은 영화적 진실의 단면들을 훼손할 수 있다. 애초에 애도란 불가능한 것이므로 그 연출의 의도는 이미 무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의 스토리는 저 제의의 구조를 느슨하게 용접함으로써 어떤 미학적 결손을 제어한다. 제작비의 고충과 제작 여건의 불미함은 오히려 연출의 방법을 창신하는 역전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지슬>의 토벌작전을 <태극기 휘날리며>의 전투씬처럼 연출할 수 있었다면 학살은 그저 스펙터클로 전락했을 것이다. 비전문 배우들의 연기는 투박함으로써 오히려 핍진했고, 정적인 미장센의 연극적인 장면들은 수동적인 몰입을 방해함으로써 흥미로운 소외효과를 연출했다. 그것은 마치 피트 왓킨스의 실험적인 영화 <코뮌>(2000)의 흔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적 형식의 이런 성취는 진혼과 애도라는 목적과 창발적으로 불화하는가.
<지슬>은 4・3을 순결한 여성에 대한 겁간으로 유비한다. 토벌군에게 겁탈당하는 순덕이 직접적이라면 오름의 곡선을 여성의 나신과 오버랩하는 장면은 좀 더 은유적이다. 토벌군의 일원이면서 가마솥에 김 상사를 삶아 죽임으로써 ‘신화적 폭력’을 청산하는 ‘신적 폭력’의 상징성을 암시하는 정길은 사실 여자다. 이 같은 원형 상징적 표현은 전래하는 제주의 할망(대지모신) 신화를 의도적인 재현한 것이다. 폭력의 재현을 젠더 정치학의 차원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외지인과 섬사람, 가해자와 희생자의 위상은 분법의 논리로 선명해진다. 죽은 어미가 남긴 아이의 울음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도 해원과 상생의 표상으로써 모성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죽임의 폭력에 대한 살림의 상징성으로 드러나는 지슬(감자)이라는 사물로 집중된다. 끝내 마을을 버리지 못했던 어머니가 지슬을 남기고 죽임을 당하자 마을을 찾았던 아들은 다시 산으로 돌아가 그 지슬을 마을 사람들에게 먹인다.
제주 무속본풀이의 여신들은 육지의 여신들과는 유사하면서도 나름의 독자적 개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다산과 풍요의 원형으로서 여신의 의미는 보편적이다. 생명의 살림에 닿아있는 여신의 모성적 상징성은 <지슬>에서 4・3이라는 특이성의 사건을 보편적인 차원에서 해소시킨다. 신위에서 소지에 이르는 유교적 제의의 구도 안에서 과연 이런 여신적 주술이란 논쟁적이라 할만하다. 애도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위해서는 그 불가능한 애도의 제의를 집전하는 사제가 요구되며 <지슬>은 그것을 전래하는 샤머니즘의 여신으로 충족했다. 불가능한 것의 재현은 역설적으로 그 불가능함의 진솔한 고백이라는 아포리아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지슬>은 애도와 제의라는 정합적 내러티브와 함께 여신의 상징성으로 그 아포리아에 맞선 작품이다.
<지슬>이 제의적인 영화인 것처럼 <비념>(2012)은 역시 주술적인 다큐멘터리다. 비념이란 비나리고, 그러니까 그것은 곧 민초의 소망이 담긴 소규모의 굿이다. 첫 장면에서 보여준 종이 가면을 쓴 사람들은 귀신이며, 카메라는 마치 그 귀신들의 시선처럼 지금 이 망령의 세계를 배회한다. 4・3의 희생자들을 대변이라도 하듯 카메라는 학살이 있었던 장소들을 찾아가 이리저리 비춘다. 영화는 4・3 당시의 기록 영화를 거꾸로 되감는 장면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비가역성을 표현한다. 역사는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들은 역사의 그 흔한 오류들을 속절없이 되풀이 하곤 한다. <비념>이 유념하는 것은 바로 그 어리석은 반복에 관한 것이다. 4・3을 강정과 병치함으로써 오류의 역사를 되풀이 하는 한국의 현대사는 일종의 질문이 된다. 기억은 망각되기도 전에 벌써 또 다른 기억으로 대체된다. 그리하여 하나의 기억은 다시 또 다른 기억에 잠식당한다. 강정이란 역시 땅의 훼손이다.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사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구럼비 바위를 폭파하는 국가의 법집행은 빨갱이들을 축출하고 대한민국을 건국하기 위해 치렀던 4・3이라는 폭력적 제의의 사후적 반복이다.
<비념>은 조용하지만 격렬한 영화다. 결혼한 지 겨우 이태 만에 강상희 할머니는 남편을 잃었다. 역사적 수난의 시간은 유독 여성에게 가혹하다. 난리를 피해 오사카로 이주한 여성들의 목소리도 그 가혹한 시간을 담담하게 증언한다. 서울과 제주의 거리, 지구와 달의 거리는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급하게 가까워졌지만 4・3에 이르는 우리들의 역사적 회고의 거리는 멀고 또 멀다. 영화는 그 ‘거리’의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 영상과 사운드를 기교적으로 운용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한 필사적인 발화의 실험인 것이다. <비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쉬이 말해지지 않으므로 영화는 내내 조용하다. 그러나 그 말 없음 속에는 말하고자 하는, 그리고 말해야만 하는 의지의 긴장이 팽팽하기에 그 조용함은 대단히 격렬하다.
<지슬>이 과거로 돌아가 원혼의 넋을 달래려 한다면 <비념>은 그 원혼을 현재로 불러와 산 자들의 망각을 고통스럽게 추궁한다. <지슬>이 역사의 폭력을 대모신의 순결에 대한 훼손과 회복의 서사로 말하고 있다면 <지슬>은 여성들의 몸과 기억에 각인된 현재적 상처를 어루만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4월의 3일은 왔고 앞으로도 4・3은 반복될 것이다. <지슬>이 지난 시간을 위로했다면 <비념>은 깊은 여운으로 지금의 우리들을 추궁했다. 4・3의 그 시간들처럼 <지슬>과 <비념>은 잊혀진 사건이 되겠지만 다시 또 다른 발설들이 이어질 것이다. 그 발설들의 반복을 통해 우리는 올레길을 걸으며 제주의 비경(秘境) 속에서 비경(悲境)을 발견하고는 새삼 놀라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제주를 제대로 걷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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