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2012)는 지금까지 그의 작품들이 대체로 그러했던 것처럼 역시 엄숙한 사유를 요청한다. 죽음 가까이에 닿아 있는 노년의 삶이란 적요한 가운데서도 격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삶은 지속되고 있으나 죽음이 언제 그 일상을 덮쳐올지 모르는 막연한 시간들 속에서 말년의 삶은 불안으로 만연해 있다.
<아무르>의 첫 장면은 충격적이다. 시체의 부패 냄새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조대가 문을 뜯고 들어가자 여자의 시신이 수의를 입고 누워있다. 그리고 영화는 피아노 연주회에 참석한 관객들을 오랫동안 비춘다. 그것은 아마도 이 연주회에 참석한 노부부 조르주와 안느에게 펼쳐질 앞으로의 일들을 예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느의 발병과 그 후에 겪게 되는 인간적 존엄의 훼손을 지켜보아야 하는 조르주의 처지 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지켜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사유를 요구하는 장면인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연주회가 끝나고 부부가 돌아온 집의 현관문이 뜯겨져 있다. 노년의 불행은 이처럼 도둑처럼 찾아오는 것이다. 노부부의 집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 이 영화의 미장센은 대단히 단조롭다. 미장센의 그 폐쇄성은 노년의 삶이 그러한 어쩔 수 없는 어떤 단조로움을 표현한다. 그리고 노년에 맞는 질병은 곧 모든 관계들의 단절을 가져오는 지극히 위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년은 얼마나 외로운 시간인가?
안느의 병세는 위중해지고 그녀 스스로 자기의 존엄을 지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조르주도 조금씩 지쳐간다. 조르주는 어느 날 열려 있던 창문으로 들어온 비둘기 한 마리를 내쫒는다. 발병과 함께 서서히 망가져가는 아내의 모습이란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처럼 반갑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조르주는 결국 결단을 내린다. 그는 자기의 손으로 아내를 죽이고 염습을 한다. 그리고 다시 날아 들어온 비둘기를 이번엔 조심스럽게 품어 안는다. 그리고 그도 아내의 영혼과 함께 집을 나선다. 여기서 조르주의 행동은 윤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안락사와 마찬가지로 존엄을 지키기 위한 죽임은 허용될 수 있는가라는 해묵은 논란을. 그러나 <아무르>는 그 제목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 윤리문제보다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쪽에 더 절실하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우리들에게 사랑이란 ‘지켜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랑스런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물론 행복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의 몸과 마음이 모두 쇠락하여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지극히 힘겹고 고통스런 일이다. 사랑이란 바로 그 아름다움이 무너지는 과정을 껴안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 그러니까 사랑이란 타인의 죽음을 끌어안는 일이다.
아내를 죽이고 절대적인 외로움 속에 홀로 남겨진 조르주는 담담하게 글을 쓴다. 그것은 아마도 죽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였으리라. 무엇인가를 적는다는 것, 대화의 상대를 잃은 외로운 사람은 글쓰기로 그 외로움을 견뎌보려 애쓰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역시 애도의 한 방법이리라. 전후 일본의 문예비평을 대표하는 에토 준이 역시 그러했다. 그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아내와 나>>(국역본으로 <<당신의 손이 아직 따뜻할 때>>)를 썼다. 그러므로 그 글은 한 인간의 애절한 그리움과 절절한 외로움이 빚어낸 것이다. 에토 준은 말기암인 아내에게 끝내 병명을 고지하지 않음으로써 홀로 쓸쓸하게 그녀의 두려운 마음을 위로하려했다. “지금 아내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저렇게 편안히 숨쉬면서 자고 있지 않은가? 사람의 살고 싶다는 의욕과 희구(希求)를 그처럼 쉽게 빼앗아갈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나는 아내에게는 오직 한 사람의 가족이자 남편인데 말이다.”(29쪽) 그들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다만 한 마리의 애완견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에토 준은 아내의 병세가 위중해지는 그 시간들 속에서 일상의 시간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역시 20년간 월평 쓰기를 지속했던 일본 우익문단의 대표적 비평가였던 것이다. 아내를 간병하면서도 <<소세키와 그의 시대>>의 원고 집필에 매달리는 그의 모습은 가히 경이롭다. 하지만 그는 곧 일상의 시간에 대한 욕망을 후회하게 된다.
입원하기 전에 집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그때 아내와 나 사이에 흐르고 있는 시간은 일상적인 시간이 아니었다. 그 시간은 말하자면, 삶과 죽음의 시간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이었다.
일상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저 멀리 창 밖으로 보이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흐름과 함께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이 삶과 죽음의 시간이라는 것은 내가 이렇게 아내의 옆에 있는 한, 그것이 정말로 흐르고 있는지 아닌지 잘 알 수가 없다. 그 시간은 어쩌면 찰랑찰랑 가득 차 정체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흐르고 있는지 정지해 있는지 분명하지 않은 시간 속에 아내와 함께 있다는 것이 무언가 감미로운 경험처럼 여겨진다.
이 시간은 어쩔 수 없는 용무로 병실을 떠난다거나 하면 곧 바로 모래시계 속의 모래처럼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병상 옆에 돌아와 마비되지 않은 아내의 왼손을 꼭 잡고 있노라면 또 다시 산 속 깊은 곳에 있는 호수 같은 고요함이 우리 두 사람 사이를 살며시 채워준다.
우리는 이렇게 하고 있는 동안 한번도 암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도, 죽음을 화제로 삼지도 않았다. 집안 살림의 정리에 관해서도, 거기에 부수되는 법률적인 문제에 관해서도 어느 것 하나 의논하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함께 있었다. 사실, 함께 있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소중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별이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는 가능하면 함께 있고 싶었다. 전문의가 예측한 바, 길어야 일 년이라는 기한은 이미 2개월이 지났다. 이아 같이 아직도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기적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가 특별히 종교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러나 만약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의식(意識)의 종언(終焉)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순간까지 아내를 고독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나라는 사람만이 옆에 있어 주어 어떤 경우에도 혼자가 아니라고 믿어주기를 바라고 싶다.(74-76쪽)
‘아내를 고독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에토 준의 바람이야말로 미카엘 하네케가 <아무르>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사랑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에토 준은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곧바로 중증 감염증이라는 심각한 상태로 수술을 받는다. 수술에 앞서 그는 변호사를 불러 유언장까지 미리 작성해 놓는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그는 일상의 시간에 대한 미련으로 치열하다. “기어서라도 서재에 돌아가 ‘소세키와 그의 시대’를 완성해야만 한다. 여기서 죽고 말면 대학에서 대학원생을 연구 지도하는 일도 못하게 되지 않을까?”(117쪽) 그리고 무사히 수술을 끝내고 회복이 된 뒤에 그는 <<아내와 나>>를 집필한다. “이런 상태로 있으면 미칠 것만 같은 생각, 어찌됐든 무엇인가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123쪽) 그러나 글쓰기로 진짜 삶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 에토 준은 집필을 완료한 바로 그해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말년의 삶이란 무엇일까? 외로움은? 아니, 사랑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서로 사랑하지만 결국 말년은 또 다시 외로움과 대면하게 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년의 사상은 외로움을 고독으로 비약하는 그 질적 전회의 문제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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