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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전성욱 평론가의 문화 읽기

베이징 기행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9. 5.

 

 

세 번째 중국행이었지만 베이징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여행 전날에 있었던 학술대회에서 사회를 맡았다. 여느 때처럼 선후배들과 어울려 늦게까지 술자리를 하고 싶었지만, 다음 날의 여행을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을 접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에 활동한 이른바 전후 작가들 중에서도 장용학을 이중 언어적 관점에서 분석한 한 후배의 발표에 대해서는 토론할 거리가 많았다. 식민지기에 일본어 교육을 받고 해방 이후에 한글로 소설을 창작했던 이른바 전후 세대 작가들의 언어적 심층에 대한 해명은 문학사의 긴요한 과제다. 그러나 언어적 감각의 심층에 접근하는 일은 당시의 교육과 언론 매체들과 같은 언어의 물적 토대에 대한 탐구에서부터 이중 언어적 상황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정치한 분석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사전 조사를 요구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중 언어의 주체가 구성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정교한 서술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이중 언어적 상황의 객관적 분석과 더불어 언어적 무의식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이 동시적으로 요구되는 어려운 연구과제라 할 수 있다. 세계화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지금 새로운 이중언어적 상황과 다중언어적 주체들의 출현이 긴요한 연구의 과제라고 할 때, 그 거시적인 대상과는 달리 연구의 방법에 있어서는 극히 미세한 관점의 수립이 긴급하다. 어쨌든 부산에서 베이징으로 향하는 내 물리적 이동 자체가 이미 이중 언어적인 관계 속으로의 진입이었다. 모국어의 세계 바깥에서 내 주체성은 어떤 변이를 겪게 될 것인가. 여행이란 그렇게 우발적인 경험들에 스스로를 내 놓는 일이므로, 결과를 알 수 없는 시간들 앞에서 우려와 기대로 들뜨는 것은 모든 여행자의 공통된 심사이리라.

 

이번 베이징행도 역시 지난 해 상하이를 함께 다녀온 K와의 동행이었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명분은 제20회 베이징 국제 도서전의 참가였다. 그가 대표로 있는 출판사의 편집주간을 맡고 있는 나는 아시아 부문에 주력해온 이 출판사의 향후 진로에 대한 고뇌로부터 무심할 수 없다. 내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잡지 또한 아시아라는 시좌를 근간으로 지역적 사유를 심화해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 국제 도서전의 참여는 나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유의미한 것이었다. 다만 개강을 목전에 두고 먼 출장을 떠난다는 것이 내내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두 시간 남짓 만에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기온은 선선했고 공기도 그 악명을 무색하게 할 만큼 무척 맑았다. 택시를 타고 도서전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 역시 그 규모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할 만 했다. 그러나 명색이 국제 도서전임에도 암표 장수가 버젓이 활보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행사의 규모와 조응하지 못하는 그 운영의 디테일이 아쉬웠다. 이런 도서전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넓은 행사장의 어디서부터 무엇을 체험해야 하는지를 도통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런 나에게 K는 책은 읽어야 아는 것인데 전시된 것을 눈으로 대강 훑어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럼에도 그 출품된 책의 목록과 표지 디자인 그리고 내부의 편집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흥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 행사장에 들어섰을 때 나는 눈앞에 보이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의 부스를 향해 흥분한 채로 달려가 카달로그를 챙겼다. K는 벌써부터 그렇게 카달로그를 모으다보면 나중엔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 말에 나는 조금 민망해졌지만 팜플렛과 자료들을 챙겨 가방에 넣고는 연신 카메라의 셔트를 눌러댔다.

 

 

이번 도서전의 주빈국은 이탈리아였는데 중세의 책 표지를 본뜬 것에서부터 최근의 신간까지 다양한 콜렉션이 전시되어 있었고, 한쪽에선 이탈리아 전통 요리를 소개하는 코너까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2013년 볼로냐 어린이 도서전의 일러스트들을 소개하고 있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이 중세 유럽을 뒤흔들었을 때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전쟁>>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 시대의 문헌이란 대체로 종교와 관련된 것이었고 그 장정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종교에서 인간으로, 화려함에서 수수함으로 종이와 인쇄술의 발달이 문헌의 세속화를 불러왔을 때 유럽은 이미 역사의 한 분기점을 지나고 있었다. 어찌 보면 현대의 출판문화는 저 위대한 세속화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책은 한 편으로 그 세속화를 심화시키는 가운데 다른 한 편으로는 소수의 고급화라는 양극단의 갈래로 나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자책의 부상이 전자의 유력한 증례라면 소량의 인문사회학 서적들이 고가로 출간되어 유통되는 것은 후자의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세속화가 저질화가 아닌 것처럼 책의 소수화가 곧바로 고급화는 아니다. 어쩌면 지금 출판의 화두는 세속적인 것의 저질화를 우려하면서 소수적인 것의 고급화를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 하는 데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과연 구텐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나라답다고 해야 하나, 유럽의 책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것은 독일의 부스에 전시된 것들이었다. 장정이 깔끔하고 책 한권 한권이 공들인 예술품처럼 여겨졌다. 페트 한트케와 마르틴 발저와 같은 익숙한 이름들도 눈에 띠었다. 개성 있는 표지들에 홀려 한참을 둘러보다 프랑스 부스로 발길을 돌렸다. 발자크의 <사라진느>를 주제로 1967-1969년까지 2년에 걸쳐 고등연구원에서 있었던 롤랑 바르트의 세미나를 정리한 책에 눈길이 갔다. 이 책은 번역서들의 무덤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는 한국의 모 출판사에서 <<S/Z>>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기도 하다. 유럽 여러 나라들의 부스가 이처럼 문학과 인문사회 분야의 책들로 다양했다면 일본이나 한국의 부스는 좀 단조로웠다. 일본에서는 업계 1위의 고단샤를 비롯해 여러 부스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주로 실용서나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강한 저작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참여한 출판사들은 대개 어린이책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기독교 서적을 전시하고 있는 홍성사는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도서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북한의 부스였다. 사람들이 거의 오가지 않는 구석말단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그 부스는 초라함을 넘어 진정 비참했다. 구색을 맞추지 못하고 모아놓은 빈약한 전시 내용도 그렇지만, 책의 물성 자체는 마치 식민지기의 3류 인쇄물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조잡한 표지에 조악한 편집의 부끄러움을 숨기려는 듯 독재자를 숭앙하는 거친 구호들이 물색모르고 새겨져 있었다. 고대의 어떤 왕이 저질렀다는 분서와 갱유나, 마찬가지로 책을 모아 불살랐다는 유럽의 한 독재자가 그랬던 것처럼 정신의 탄압은 언제나 책이라는 물리적 실체에 대한 폭력으로 표현되곤 했다. 북한의 부스에서 내가 본 것도 다름 아닌 바로 그 폭력의 잔해였던 것 같다.

 

 

주최국 중국은 다양한 카테고리와 엄청난 규모로 떠오르는 신흥 출판강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자랑하고 있는 듯 했다. 중국 전통의 서적문화를 엿보게 하는 전시에서부터 지역별, 대학별, 분야별로 전시된 출판물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배치가 돋보였다. 그리고 현재 중국출판의 나아가고 있는 향방을 집약하고 있는 듯한 현대화, 대형화, 국제화라는 인상적인 문구가 한쪽 자리에 크게 나붙어 있었다. 현대화나 국제화라는 상투적인 문구보다는 대형화라는 조금은 의외의 그 문구에서 출판을 산업의 차원에서 크게 확장하고 있는 중국의 어떤 진로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넓었기에 오래 걸어야 했고, 그래서 우리는 지치고 허기졌다. 쉬었다 걷기를 되풀이하다가 행사장 한편의 카페로 들어가 주린 배를 채웠다. 이번에도 나는 입맛에 맞지 않는 중국 음식 대신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다. K는 내심 오랜만에 현지의 음식문화를 체험해보고 싶었겠지만, 그도 중국음식에 대한 나의 극렬한 거부반응을 알고 있는 터라 고맙게도 샌드위치에 콜라로 타협해 주었다.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이문화의 체험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교섭과 교통의 실패를 의미한다. 양식을 보편적인 입맛으로 알고, 한국식을 가장 맛있는 것으로 익숙해진 이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음식취향이란 반드시 극복되어야할 내 문화의 아비투스가 아닐까.

 

심양에서 막 베이징에 도착한 이종민 교수가 우리를 데리러 행사장으로 와 주었다. 우리는 함께 예약해둔 숙소가 있는 우다커로 향했다. 우다커는 베이징대와 칭화대가 인접한 곳으로 왕징과 함께 한국 상인들의 진출이 가장 활발한 곳이라고 한다. 나지막한 호텔은 좀 낡았지만 있는 동안 큰 불편 없이 그런대로 지낼 만 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우리는 호텔 앞에 있는 중국음식점으로 가려했지만 다행이도(?) 그곳이 공사중이라 맞은편에 있는 한국식당으로 갔다. 이날 저녁은 인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있는 김병철 교수와 함께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퇴근 시간대라 차가 밀려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김 교수는 나보다 세 살이 위였지만 아직 미혼이었다. 마치 오래 만나온 형처럼 친근한 분이었고 대화는 시종 유쾌했다. 사실 이번 출장의 또 한 가지 목적은 김 교수를 인터뷰어로 같은 대학에 근무하는 쩡꽁청 교수와의 대담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 인터뷰와 번역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전공인 중국의 사회복지 문제에 대해서 깊은 대화들이 오갔고, 앞으로 우리 잡지 및 출판사와 가능한 공동의 작업들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첫날의 저녁은 언제나 그렇듯 어떤 설렘과 흥분 속에서 많은 말들과 함께 과음하게 된다. 빠이주(白酒)를 세 병이나 마셨고 그것도 모자라 자리를 옮겨 양꼬치에 맥주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식당에서 라면에 소주를 마시고 헤어졌다. 대만 자오통대의 천꽝싱 교수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연대와 교류를 기록하는 자리에 이렇게 적었다. “지식, 감정, 믿음, 서로에 대한 이해와 애정은 사실 어느 곳에서든 음주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천꽝싱, <화해의 장벽-2008 동아시아의 비판적 잡지 회의 후기>, <<창작과비평>>, 2008년 가을) 애정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 다음 날 나는 마지막 자리의 시간들을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고 심한 숙취로 종일 쓰라린 속을 부여잡고 괴로워해야 했다.

 

 

숙소 앞 한국식당에서 내가 라면으로 쓰린 속을 달랠 때 K와 이 교수는 김치찌개와 순두부를 시켜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게다가 그들은 마치 물을 마시듯 칭다오 맥주를 끊임없이 마시는 것이었다. 물론 도수가 좀 낫기는 했지만 비워지는 그들의 술잔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속이 메스꺼웠다. 특히 이 교수의 주량과 체력은 가히 혀를 내두를 만큼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아마도 누구나 이 교수의 술 마시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애주가란 과연 저런 것이구나,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될 것이다. 그에게 반주와 본격적인 음주의 경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보였고, 누가 말리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끝없이 술을 마시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 음주의 시간이 언제나 즐겁고 흥이 돋는 것은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도 늘 학문과 현실의 현안들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들을 치열하게 떠들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우리들의 그 명정(酩酊)의 시간들은 방탕하지 않은 호탕함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맨 정신의 나는 반주를 거나하게 걸친 이들과 함께 베이징의 명소 천안문 광장으로 갔다. 광장은 모든 인민에게 열린 장소지만 주변의 경비는 삼엄했고 곳곳에 공안들의 모습이 눈에 띠었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3배라고 하는 광장의 규모는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삼엄한 경비와 마찬가지로 광장 한쪽의 대형전광판에서는 국가시책들이 점멸하고 있었고, 하늘 드높이 오성홍기가 위압적으로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천안문 광장하면 누구나 떠올리게 되는 마오쩌둥의 초상, 그것은 이 교수의 말에 따르면 최근에 좀 더 푸근하고 인자한 것으로 교체된 것이라고 했지만 일개 지도자의 사후 군림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마침 보수공사 중인지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초상화의 양 옆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만세세계 인민 대단결 만세라는 글귀가 보였다. 영상기록물로도 본 적이 있지만, 저 천안문의 발코니에서 마오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천안문 사태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동구권의 몰락이 도미노처럼 이어지고 있던 그때 세계사적 격변의 기운은 여기 베이징에서도 움터 올랐고 마침내 대중봉기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봉기는 처참하게 진압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때의 사건들은 발설되어서는 안 되는 불온한 기억으로 봉인되어 있다. 광장과 봉인이라는 역설이 해결되지 않는 한 저 초상화 옆의 글귀들이란 그저 허허로운 구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천안문을 지나면 자금성이 바로 이어진다.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붐비는 고궁을 벗어나 한참을 걸어 왕푸징 거리에 도착했다. 이곳은 전혀 딴 세상이다. 거리엔 외국인 관광객들과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넒은 대로의 양 옆으로는 상점들이 즐비하고 쇼핑을 나온 사람들은 저마다 물건 고르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해결할 요량으로 야시장 분위가 나는 먹거리 골목으로 들어갔다. 전갈이 꼬치로 전시되어 있는가 하면, 각양각색의 음료와 군것질거리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다. 우리는 한 음식점으로 들어가 면요리와 만두를 사 먹었다. 물론 나는 그 음식들의 향과 비주얼에서 전혀 호감을 느낄 수가 없었고, 열대 과일을 갈아 만든 음료를 주문했는데 그것도 역시 한 모금 마시고는 K에게 넘겨버렸다. 안 그래도 속이 좋지 않았던 나는 그 음식들의 냄새 때문에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교수와 K는 두어 병이기는 했지만 놀랍게도 여기서마저 맥주를 반주로 곁들여 마시고 있었다. 시원한 것이 너무 마시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넓은 길로 나와서 노상의 카페를 찾아 둘은 커피를 나는 생수를 주문해 마셨다. 그제야 갈증을 달랠 수 있었는데 그 생수야말로 어떤 문화적 편견과도 무관한 보편 그 자체였다.

 

 

다음 목적지는 다산쯔에 있는 798 문화예술구. 모두들 지쳤는지 택시 안에서는 여느 때와는 달리 아무도 말이 없었다. 1950년대 동독의 기술자들에 의해 지어졌던 군수공장이 이제는 엄청난 수의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지금은 공장의 빈 건물들에 갤러리, 작업실, 디자인 회사, 카페, 레스토랑, 미니 숍들이 들어와 있고 아직도 이곳저곳에선 입주를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거리엔 옛 공장 시절의 철골구조물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공장의 빈 터를 채우고 있는 재미있는 조각들은 공장의 그런 삭막한 풍경과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공장의 벽면들도 그래피티와 장식들로 꾸며져 흥미로운 볼거리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몇몇 갤러리들을 둘러보다가 화장실이 급한 나를 위해 우리는 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자 이 교수는 또 맥주를 주문했다. 날씨도 쾌청했고 거리의 풍경도 호젓했으며 음식점의 젊은이들도 쾌활했다. 모든 것이 유쾌한 그런 오후였다. 그래서인 두 사람은 정말 즐거운 표정으로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마신 맥주가 또 얼마나 될는지. 겨우 속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나도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커피 맛은 일품이었다. 향기가 좋았고 속이 풀리는 듯 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서 이러저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서로를 좀 더 알아갈 수 있는 대화들이었고 서로의 어려움을 조금 더 이해하고 격려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해가 저물어갈 때쯤 해서 우리는 다시 몇몇의 갤러리와 가게들을 둘러보고 저녁식사를 하러 인근의 음식점을 찾았다. 퇴근시간대라 차도가 꽉 막혀서 우리는 그냥 걷기로 했다. 한라산이라는 이름의 한국식당을 찾아갔는데, 입구에는 흥미롭게도 관운장의 상과 함께 제단에 향을 피워놓았다. 이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삼국지의 관우가 중국의 민간신앙에서 재물신으로 재탄생한 것이란다. 우리도 그 앞에서 복을 빌며 발원했다.

 

 

베이징에서의 삼일 째 날도 역시 숙소 앞의 한국식당에서 시작되었다. 이제는 주인아저씨도 제법 친근한 느낌이 들었고, 김치찌개를 시켰더니 계란찜과 짬뽕탕까지 서비스로 내 온다. 역시나 이 교수와 K는 맥주를 물처럼 마시고 있었고, 주인아저씨는 그런 우리를 보며 중국 종업원들은 아침부터 이렇게 맥주를 물마시듯 하는 걸 보면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농을 던진다. 과연 해장술이란 논리 따위를 넘어서는 엄청난 역설의 문화가 아닌가.

 

아침을 먹고 우리가 향한 곳은 숙소 가까이에 있는 베이징대학교였다. 중국의 여느 대학들이 그렇듯이 캠퍼스의 규모는 압도적으로 컸고, 유서 깊은 학교인 만큼 오래되어 낡은 건물들이 꽤 있었다. 공원처럼 잘 꾸며진 교정과 큰 호수를 산책하며 담소를 나누던 중에, 20여 년 전 이 교수가 이 대학에 유학을 왔을 때의 심란했던 심경을 토로한다. 그 때만 하더라도 아직은 열악했던 시설과 삭막한 학교 분위기에 그는 쉽게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 막 학문의 초입에 들어선 그에겐 무엇보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견디기 힘든 고뇌를 안겼던 모양이다. 탄탄대로의 공부가 어디 있겠는가. 공부는 끝이 없고 그 공부 길의 고뇌도 끝이 없다. 지금 이들과 낯선 대학의 캠퍼스를 거닐고 있는 나는 무엇을 더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할까. 갑작스런 두려움이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 공부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세속의 인정에 이전투구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 대한 혐오 속에서도 나 역시 별다를 것 없다는 열패감이 끈질기게 나를 괴롭혀왔다. 그렇게 산란한 망상들에 사로잡힐 무렵 오래 걸었던 다리가 무거워졌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베이징에서 나는 내 정신의 스승 루쉰의 흔적을 만나고 싶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아쉬움 속에서 베이징의 마지막 날 저녁은 깊어갔다.

 

 

 

나에게 여행은 책상머리를 벗어나 익숙한 삶의 패턴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경험이다. 낯선 풍토와 당황스런 상황 속에 놓일 때 나는 리트머스에 떨어진 시약처럼 숨겨왔던 것들을 속절없이 드러내 놓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자백하게 만드는 추궁이다. 모국어의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소통하지 못하는 고립감에 고독했어야 했지만 내 곁엔 언제나 모국의 벗들이 함께 있었다. 입맛의 취향과 같은 생존에 밀접한 이문화적 경험 속에서 놀라고 당혹스러워야 했지만 나는 그 당혹스러움에 손사래만 쳤을 뿐이다. 베이징에서 내가 경험한 것은 무엇인가. 내 완악한 습속의 버팅김은 낯선 것들과의 교섭을 방해했고, 논리적인 것으로 환수되지 않는 것들을 내 익숙한 감각에 억지로 우겨넣음으로써 주체의 동일성을 보존하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이번 여행에서 나는 지극히 수동적이었던 것 같다. 술로도 말로도 나는 제대로 대작하지 못했고, 무방비 상태에서 대취하고 만 첫날을 빼고는 그저 술잔을 따르고 그들의 말을 고분하게 들었을 따름이다. 더 마시고 싶었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피로했고 사실은 너무 우울했다. 나는 모국어의 세계로부터 이미 너무 시달려왔고 그래서 매우 지쳐 있었다. 학위논문을 쓰고 다시 내 공부를 돌아볼 틈도 없이 주어지는 대로 응하고 흘러가는 대로 휩쓸렸다. 그리고 다시 그 지긋지긋한 생활의 반복을 앞두고 떠나는 여행은 설렘보다는 사실 부담스런 것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그 여행은 병이 낫기 직전의 고열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베이징에서의 며칠 동안 나는 제대로 앓고 돌아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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