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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전성욱 평론가의 문화 읽기

독서권장의 정치-‘2013 가을 독서문화 축제’ 참관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0. 5.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우길 수밖에 없게 된 데에는, 책 읽는 것이 그렇게 계몽의 대상이 될 만큼 비범한 일처럼 되었기 때문이리라. 국민이 근대적 지식을 다함께 나누어 갖는 무리라고 할 때, 독서국민의 탄생 이래로 국어의 습득과 함께 국어로 된 출판물의 독해는 근대화의 중한 과제여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학교는 독서 인구를 창출하는 근대화의 유력한 기구였다. 그러나 식자층의 확대가 그대로 독서 인구의 양적 확대로 이어질 순 없었고, ‘을 읽는 독서는 단순한 동사적 행위를 넘어 근대국가의 장구한 기획 안에서 중대한 계몽의 대상으로 재편되었다.

 

물론 독서를 근대적 기획의 전부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오래 전부터 글을 읽는 것은 식자층이라 불렸던 엘리트들의 가장 몰두한 일이었다. 조선의 역사에서 최한기(崔漢綺, 1803~1879)와 같은 사람은,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들었던 한역서학서와 태서신서에 이르기까지 가산을 탕진하면서 두루 섭렵해 읽었던 열렬한 독서인이었다. 그가 체계화한 기학(氣學)의 어법을 빌려 말한다면, 글을 읽는 것은 글의 문기(文氣)와 그 글을 쓴 사람의 신기(神氣)가 글을 읽는 사람의 영기(靈氣)를 활동운화(活動運化)케 하는 역동적인 기의 교섭운동이다. 홀로 책을 읽는 고매한 독서의 과정은 조용한 인내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극한 즐김의 시간이며, 책 읽는 사람은 바로 그 시간 속에서 활동운화함으로써 교양과 함께 성숙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적 의미의 독서론이 책읽기를 일종의 자위행위와 비슷한 것으로 간주할 면이 있다면, 그것은 글읽기에서 일어나는 것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에 대하여 하나의 구성적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다.”(김우창, 홀로 책 읽는 사람, <<책, 어떻게 읽을 것인가>>, 412) 그러나 김우창은 그 구성적 가능성에서 독서의 진정한 가치를 찾고 있는데, 책을 읽는 가상적인 구성의 체험이야말로 현실적인 실천의 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독서의 바로 그 구성력은 실재성(reality)에 이르는 잠재성(virtuallity)이다. 최한기의 천지운화(天地運化)가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역시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노동을 위한 충전의 시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는 타인(자본가)을 위한 노동을 멈추고 자기본위의 노동을 위해 책을 읽고 토론하는 혁명적인 준비태세의 시간이다.

 

천고마비의 계절을 핑계 삼아 책을 읽히려는 범국민적 독서운동이란, 그 외피적인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에 연루된 세속적 이해관계로 민망할 때가 있다. 때로는 반정치적으로까지 여겨지는 자유주의적 교양으로서의 독서에 매한 맹목적인 권장이 거슬리고, 그것이 지배계급의 교육 이데올로기와 공모하고 있다는 낌새와 함께 관변적인 연례행사로 동원되고 있다는 데에서는 어떤 공분을 느끼게도 된다. 물론 그 운동의 맥락 안에는 출판산업의 진흥이라는 현실적인 고려도 포함되어 있어 독서권장이란 대단히 복잡한 정치문화적 의미의 난맥상을 이룬다.


 

97일과 8일 이틀 동안 번화한 남포동 거리 일대에선 ‘2013 가을 독서문화 축제가 열렸다. 여하한 사정으로 나는 이틀 동안 두 개의 행사에 직접 참여했다. 첫날의 개회식 행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남포동 거리에서, 관련된 행정기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화려한 초대 공연과 함께 시작되었다. 바로 그 행사의 하이라이트가 초대 작가인 김진명 소설가와의 대화였는데, 내가 그 대화의 상대자이자 진행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의 소설들에서 역사적 팩트는 소설적 공상으로 쉽게 왜곡되고 국제관계학의 복잡한 맥락들은 모종의 음모론으로 극히 단순화된다. 극우 민족주의적 발상을 일종의 음모론으로 풀어내는데 능한 김진명 소설가를 초대 작가로 선정한 주최측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그것은 큰 고뇌를 필요로 할 것도 없이, 대중적 인지도를 고려한 통속적인 섭외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주최측에서는 행사 전에 내가 보낸 질문지가 대중적인 흥미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염려의 뜻을 내비췄다. 아마도 나의 모난 질문들로 대화가 가열되면 행사의 흥행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저 예전에 경험했던 독서토론회 정도로 예상했던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화려한 무대 분위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결과적으로 흥행에는 성공한 무대였으나 독서의 진정한 의미를 추궁하는 성실한 대화였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기보다는 그 취향의 세속적 의미들을 토론하는 시간이 되었어야 했지만, 나는 역시 그런 행사의 창조적인 난동꾼이 되기엔 아직 소심한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첫 날에 비할 때 이튿날의 행사는 참신했다. 오랫동안 부산의 소설 지리학을 탐구했던 조갑상 소설가(경성대 국문학과 교수)부산의 이야기를 걷다는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자리도 전날처럼 야외무대가 아니라 청중들로 꽉 찬 소담한 실내였고, 오랫동안 곁에서 알고 지내온 작가라 편안하고 푸근한 마음으로 정담에 가까운 대화들을 실속 있게 할 수 있었다. 작가는 부산의 동구 수정동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며 20여년을 살았다. 등단작인 <혼자 웃기>와 중편 <은경동 86번지>에는 그 살가운 장소체험의 사랑(토포필리아)이 오롯이 담겨있다. 단편 <누군들 잊히지 못하는 곳이 없으랴>는 그 제목에서부터 잊히지 못하는 곳이라는 장소의 애환이 느껴진다. 특히 1930년대의 실화를 재구성한 이 소설은 부산의 역사 지리를 고증하는 가운데 초량의 남선창고가 철거된 현재의 장소상실(placelessness)에 대한 애틋함을 담았다. 장소의 삶과 소설 쓰기를 주제로, 작가가 겪었던 생생한 체험과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엿볼 수 있었던 귀중한 대화의 시간이었다. 지역에 밀착된 주제, 저자와 독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대화를 매개하는 평론가, 이런 식의 허심탄회한 문학 행사라면 더 자주 열려도 좋을 것 같다.

 

그날 오후에는 보수동의 어떤 헌책방에서 한 일간지의 문학담당 기자로 활동했던 분의 출판기념회를 겸한 행사가 있었다. 나는 잠시 참석을 했다가 번잡한 자리가 힘들어 이내 자리를 떴다. 언론인의 파워가 새삼 느껴질 만큼 셀러브리티들로 가득 찬 자리였다. 이번처럼 연례적인 독서행사에 이틀에 걸쳐 정식으로 참석하긴 처음이다. 사건을 겪어내는 경험 속에서 사고할 수 있는 그런 기회였고, 책을 읽는 행위의 의미와 독서권장의 사회적 운동이 갖는 정치성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책을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을 위한 유능한 도구로 전유하기 위해선, 독서의 교양적 의미를 넘어 그 정치성에 대한 치열한 사유가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느 이른 가을 날, 나는 또 그렇게 어떤 만남들 속에서 결기의 다짐과도 같은 생각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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