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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일기

임진왜란에 대한 새로운 시선 -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서평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8. 5.

안녕하세요~. 8월의 시작과 함께 산지니 인턴이 된 미르라고 합니다.

 

 

절친이었던 침대와 잠시 이별하고, 잠과 싸우며 첫 출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님은 저의 옛 절친이었던 책들을 소개시켜주었는데요, 따끈따끈한 신작들 중에 가장 먼저 저에게 악수를 청한 건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였습니다.

 

왜성? 금정산성, 동래읍성은 들어봤지만 왜성은 처음 들어보는데요.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겠죠? 새로운 친구는 답답해하며 자신에 대해 소개합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왜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한국 남해안 일대에 조선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왜군이 그들의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쌓은 일본식 성을 말합니다. 임진왜란은 조선왕조실록 등의 문서에서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유형(有形)한 역사적 증거로서는 왜성이 유일합니다. 하지만 20세기 초, 일제강점기까지 겪으며 왜성은 '왜군이 조선을 침략해 쌓은 민족 치욕의 상징물'로 전락했고, 문화재 가치 등급 또한 격하된 채 방치되고 있습니다.

 

 

 

 

 

 

 

 

역사상에는 기쁨과 슬픔의 역사가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는 개인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며 이러한 사실이 날줄과 씨줄이 되어 현재의 역사가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서 어두운 부분만을 들어내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함꼐해야 하는 것이 과거의 역사이며, 단절의 역사, 망각의 역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희망의 미래는 존재할 수 없다.

 

-추천사 中

 

이에  <한겨레>신문의 신동명, 최상원, 김영동 세 기자분들은 한국 언론 사상 최초로 31개 왜성 전체를 소개하는 시리즈 기사를 2015년 하반기 <한겨레> 지면과 인터넷(http://www.hani.co.kr)에 게재하였습니다.  『왜성 재발견 - 역사의 블랙박스』는 이 기사들을 재정리해 묶은 것으로, 16세기 후반에 일어난 한ㆍ중ㆍ일 국제전쟁인 임진왜란과 이 전쟁 과정에서 탄생한 왜성을 통해 우리 역사의 아픈 과거를 21세기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것입니다.

 

 

우리는 왜성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직접 겪을 수 없는 역사를 증명하는 자료는 기록, 유형ㆍ무형 문화재가 있습니다.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주로 기록물을 통해 그 사실을 증명하지요. 하지만 여기에 유형 문화재인 왜성이 보태진다면 역사적 사실은 더욱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알려질 수 있습니다. 

 

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건설현장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조선시대 동래읍성 주위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 방어시설 '해자(垓字)가 발견된 것이다.

경남문화재연구원은 곧바로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성곽을 따라 땅을 길게 판 해자에선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과 투구, 환도, 창, 화살촉 등 전투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놀라운 것은 전쟁의 처참한 흔적이 남아 있는 사람뼈였다. 해자 밑바닥에선 남자 59명, 여자 21명, 어린이 1명 등 모두 81명의 뼈가 발굴됐다. 이 가운데 8명의 두개골에선 칼에 베이거나, 활이나 총, 둔기 등에 맞은 흔적이 드러났다.

 

-본문 33페이지

 

 

송상현 부사가 격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동래읍성에서 동쪽으로 700여m 떨어진 구릉 꼭대기에는 왜장 깃카와 히로이에가 쌓았던 동래왜성이 있었습니다. 왜군은 동래왜성을 쌓으며 동래읍성을 파괴해 석재를 조달했는데요, 이후 조선은 새 동래읍성을 쌓으며 이 동래왜성의 돌을 또다시 재활용합니다. 현재 동래읍성을 이루고 있는 돌이 들려줄 이야기는 정말 많을 것 같습니다.

 

 

왜성은 조선의 읍성과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조선의 읍성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행적 목적의 성이었습니다. 때문에 마을 중심부를 하나의 성곽으로만 둘러싼 모습입니다. 그에 비해 왜성은 산꼭대기나 산허리를 깎아 가장 높은 곳에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을 세워 주위에 본성곽을 구축하고, 그 아래쪽으로 여러 단계의 성곽을 겹겹이 두른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전쟁이 끝난 뒤 조선과 일본 양 측 모두에게 축성 기법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남한산성ㆍ수원화성 등 전쟁 이후 건설한 성의 성벽 각도는 예전 읍성처럼 수직이 아니라 왜성처럼 비스듬하게 지어집니다. 수직보다 튼튼하며 방어하기에도 좋기 때문이죠. 성벽 모서리 부분도 왜성처럼 돌의 길고 짧은 면을 엇갈리게 쌓아 올리고, 본성 바깥에 외성(外城)을 둘러 방어력을 높였습니다. 방어전략도 읍성 중심 수비체제에서 산성 중심으로 전환했습니다.

 

일본의 성에는 조선 읍성처럼 성벽에 치(稚)와 같은 네모난 모양의 돌출 구조물이 들어섭니다. 성벽의 돌출 구조물은 성벽에 달라붙은 적들을 양쪽에서 협공할 수 있어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구실을 합니다. 또 전쟁 뒤 일본을 지배하게 된 에도막부 시대에 축성된 성 부근엔 행정 관청이 들어섰는데, 이는 수성(守成)과 전투원 보호 목적으로만 건설됐던 이전 성에 백성을 보호하는 행정 목적의 조선 읍성의 특징이 더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조선 중심의, 승전 위주의 역사만이 아닌 당대 일본의 상황을 살펴보고 패전의 아픈 역사까지 함께 다루어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최근 역사학계는 기존의 민족주의, 국수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선의 상황 뿐만 아니라 일본, 명 등 동아시아 전체적인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님께서는 추천사에 "이것(왜성)을 잘 보존하여 과거 역사의 증거물로서 귀감을 삼는 동시에 역사교육의 장소로서 활용하고 이해하는 데 이 책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하리라 믿는다."고 써주셨습니다. 몇 년 전, 고등학교 사회탐구 교과목에 '동아시아사'라는 과목이 추가된 만큼 현 역사교육의 흐름과도 잘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殆)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지요. 그동안 우리는 기(己)에만 집착해왔었는데, 이제는 피(彼)에 대해서도 알아보는 것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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