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간다. 날이 차가워지고 어두운 시간이 길어지는 기온의 변화가 나의 몸과 마음에도 큰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킨다. 우주의 변화는 이처럼 내 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때는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지고 따라서 마음이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 나는 요즘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심란하다. 이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무엇에라도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할 것만 같다. 나는 때마침 공연 중인 연극 <바보각시>를 관람하는 것으로 마음을 추슬러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본다.
2010년 10월 30일 저녁 7시 30분. 후배들과 저녁을 함께 먹고 거제에 있는 가마골 소극장에서 <바보각시>를 관람했다. <오구>에서부터 비교적 최근의 작품인 <이순신>에 이르기까지 이윤택의 작품들을, 연희단 거리패의 공연을 자주 관람해왔던 나에게 역시 이 작품은 그 낯익음, 어떤 익숙함으로 다가왔다. 전통과 현대를 교섭시키려는 이윤택의 열정은 <바보각시>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맹인 악사의 노래와 하모니카 연주가 서구 전통극의 코러스를 대신한 것이라면 극 전체의 구조는 씻김굿을 본뜬 것이다. 극의 절정부에서 현대인의 악마적 본성을 표현할 때는 전통 연희인 탈춤의 형식을 가져왔다.
이 작품은 전통극의 형식을 현대화하면서 연극이 초연되었던 1993년 당시의 구체적 정황을 담아내려 애쓴다. 이른바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냉전이라는 이념적 대립구도가 해체되기 시작하던 때, 누군가에게 역사는 종말을 고한 것처럼 보였고 이제 세상은 자본의 신천지 속에서 즐거운 한 때를 열어갈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 세상의 그런 변화는 세계의 종말이라는 묵시록(Apocalypse)으로 여겨졌고 이제 삶은 절망으로 기울어갈 것이 분명해 보였다.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만이 남은 듯 보였던 그 때에, <바보각시>는 철지난 이념이나 세속화된 종교 따위가 가짜 희망을 내세우며 판치는 비루한 세태를 냉소하면서 초연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그 냉소는 초연 당시의 감동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이제 그런 식의 냉소는 하나의 상투적 유형이 되어버렸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교섭이라는 발상 역시 지금에 와서는 그리 신선한 무엇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보각시>는 한 시대의 특수성 안에 머물고 만 작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미안하지만 내가 본 <바보각시>에서는 초연 당시의 시대적 조건을 보편으로 비약시킬만한 연극적 에너지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다만 나는 이 연극이 예수의 수난사를 바보각시의 수난사로 재연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인류의 원죄를 자기의 죽음으로 대속함으로써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보여준 예수의 수난사는, 이 연극에서 타락한 현대인들의 속악한 욕망과 더러운 죄악들을 제 몸 안에 잉태해 사산하는 바보각시의 수난사로 다르게 되풀이된다. <오구>의 대단원에서 상여가 나가면서 현세에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것처럼, 죽어서 사산하는 바보각시의 수난은 마지막에 이르러 장례와 함께 인간들의 그 모든 죄악을 씻어간다. 이런 연극적 형식은 몇 달 전 보았던 <창작뮤지컬 이순신>(이윤택 작, 연출; 2010년 6월 11일 저녁 7시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에서도 이어졌던 것 같다. 그 연극의 대단원이 임진왜란이라는 대재앙을 이순신이라는 한 개인의 죽음으로 치환하여 해소하는 씻김굿의 형식이었던 것처럼, 바보각시의 죽음은 이 세상의 모든 폭력과 패악을 대속하고 있는 것이다.
연극의 마지막은 ‘우리 모두 사랑합시다’라는 맹인의 대사로 끝난다. 그러므로 <바보각시>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찬양했던 신약의 복된 소리를 한국적 감수성으로 다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협애함을 깨뜨리고 보편의 사랑이라는 신약의 복음으로 비약할 수 있었던 기독교라는 종교와 이 연극 <바보각시>를 서로 대등하게 맞세울 수 있을까? 예술로 종교를 넘어서고 싶었던 이윤택의 예술가적 열정은 아직 종교의 보편이라는 위대한 경지를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뜨거웠던 것은 아닐까? 내면적 성찰이 사회적인 정의로 이어지거나, 자기에 대한 탐구가 보편적인 것으로 일반화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려운 일을 결국 해내고야 만 사람들을 일컬어 기꺼이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깊어가는 가을, 지금 나의 이 심란한 마음은 개인적인 우울을 넘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위대한 각성의 계기로는, 그러니까 진정한 멜랑콜리에는 미달하는 것이다. <바보각시>를 보고 나는 생각한다. 보편에 이르는 길은 참으로 멀고 아득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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