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작품이란 무엇일까? 어쩌다보니 심사라는 걸 하게 되었고, 그 심사라는 ‘사건’ 속에서 나는 ‘좋은 작품’은 무엇인가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물음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어느 강연에서 ‘비평은 비교다’라고 했던 김윤식 선생의 말씀을 기억한다.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상대적이다. 그러니까 비평은 절대적인 척도로 환원될 수 없으며, 가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읽은 작품들 간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비평이 올바른 해석의 감수성으로 단련되기 위해서는, 읽고 또 읽어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의 지평을 넓혀야만 한다. 그것은 결국 치열한 감상의 수련을 통해 해석의 주체로서 ‘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좋은 작품은 그렇게 좋은 사람만이 비로소 어렵게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비평가는 작가나 작품에 좋고 나쁨을 따져 묻기 전에,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공부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좋은 작품을 만나기 위해서 또 얼마나 더 많은 탐독의 수련을 거쳐야만 할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미한 나는 강동수의 <<금발의 제니>>에서 좋은 어떤 면을 본다. 일곱 편의 단편을 묶은 이 소설집이 나를 매혹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 소박하면서 단아한 문장이었다. 과잉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애써 멋 부리지 않고 담담하게 표현할 줄 아는 절제의 그 자의식에 공감했다. 비우면 채워지는데 채우려다 망치는 것은 덧없는 열정 때문이다. 열정이 지나쳐 탐욕으로 가득한 문장에 매혹을 느끼는 것은 역시 그것을 읽는 자의 헛된 자의식, 예의 그 탐욕 때문이다. 그런 탐욕에 물든 헛된 자의식은 화려한 기교에 끌리는 만큼 소박한 표현의 미덕에는 둔감하다. 그러나 소박함의 아름다움이란 과잉과 결여를 넘어선 여하한 경지에서나 겨우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집의 문장들이 주는 소박함 역시 단순함이나 평범함이 아니라 오히려 비범함의 결과다.
하지만 언제나 완벽함이란 천상의 몫인가 보다. 지상의 우리 인간에게서 천의무봉은 일종의 규제적 이념일까? 문장이라는 살결과 함께 구성(plot)이라는 골격으로 소설의 신체는 이루어진다. <<금발의 제니>>는 보드라운 살결의 문장들로 사람을 매혹시키지만, 그 속사정은 좀 더 단단해져야 할 것 같다. 치명적인 것은 대개의 단편들이 과거의 어떤 인연으로부터 이야기를 전개하는 일종의 유형화된 서사전략이다. 그것은 자칫 상투적이라는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수도원 부근>, <7번 국도>, <호반에서 만나다>, <금발의 제니>는 모두 옛사랑의 기억이 현재를 규정한다. 사랑의 기억은 아니지만, <태풍> 역시 폭력적인 옛 기억의 트라우마를 이야기한다. 과거의 기억에 구속되어 있는 현재는 미래의 시간으로 달아날 수 없는, 그러니까 길이 막혀버린 막다른 골목과 같다. 현재는 미래로 개방되지 못한 채 과거의 규정 속에서 폐쇄적으로 고착된다. 이처럼 답답한 서사의 구성은 사건의 복잡성과 특이성들을 정형화된 이야기의 틀 속에서 질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틀을 벗어날 때 강동수의 소설은 아연 활기를 띤다. 지역 문단의 비루한 행태를 신랄한 풍자로 그리고 있는 <청조문학회 일본 방문기>가 그렇고, 폭력과 열등감으로 얼룩진 참담한 비극 <아를르의 여인>이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현재의 활력을 무력화시키는 그 옛날의 기억들은 강동수의 소설에서 결정적인 급소다. 급소란 가장 위험한 곳이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부위다. 그래서 나는 그 위험한 장소가 어떤 불온한 도발 속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부각될 수 있기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당신들과 함께, 그렇게 우리는 좋은 관계 속에서 좋은 작품으로 이어져 좋은 사람으로 되어 갈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문학의 유의미함이란, 관계를 만들어 우리를 이어주는 그 '공감'의 기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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