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영화의 재미, 그러니까 줄거리나 볼거리에서 그저 얻는 즐거움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다시 능동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해 주는 영화의 존재론적 , 그 놀라운 향락의 희열에 눈 뜨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고다르였다. 말하자면 나는 고다르의 영화를 만나기 이전에 영화를 통해 사유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타르코프스키는 너무 아득했고, 베리만은 너무 현학적으로 느껴졌으며, 무엇보다 나는 영화를 사유의 대상으로까지 생각할 만큼 영화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격렬하리만큼 작위적으로 분방한 고다르의 영화는, 노모스의 극한에 대한 열정으로 언제나 뜨거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정념이 영화에 대한 내 사념의 단초였고, 드디어 그것은 예술의 개념에 대한 내 상투적 관념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처음 본 것은
<내 멋대로 해라>(1959).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로 시작되는 <<이방인>>(1942)의 첫 구절. 카뮈는 정말 과감하게도,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통곡해야 마땅한 사건을 앞에 두고, 오늘과 어제라는 시간 사이에서 대수롭지 않은 듯 허세를 떨었다. 그것은 물론 인간의 감정을 인과적인 상투성으로 규율해온 낡은 관습에 대한 냉소다. 다시 말해 고다르가 처음 만든 영화는, <<이방인>>의 저 도발적인 첫 구절을 영화라는 형식으로 다르게 되풀이한 것이었다. 이후로 나는 <비브르 사 비>, <여자는 여자다>, <사랑과 경멸>, <미치광이 피에로>, <알파빌>,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 <만사형통>에 이르기까지, 낡고 진부한 그 모든 비루한 체제/체계에 대한 고다르의 유쾌한 도발과 전복으로 즐거웠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나는 1930년생의 고다르가 2010년에 만든 <필름 소셜리즘>을 보았다. 예술가의 젊은 영혼은 육신의 노쇠마저도 창작의 새로움으로 전유하게 만든다. 그렇게 고다르는 한결같이 젊은 사람이었다.


자막이 없는 영화라서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것은 차라리 말이 아니라 웅얼거림이었고, 소음이 아니라면 그저 소리였다. 그리고 영화에서 단어는 불완전한 형태의 문자조합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라는 언어의 물질성은 의미의 장벽을 난폭하게 찢어버리고, 어느 새 나에게로 거칠게 난입해 들어왔다. 이 영화에서 언어란 독해의 대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탈존하는 것으로 유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Des Choses(사물들)’와 ‘Des Paroles(언어들)’이라는 챕터의 작명에서 시사된 것이었다. 아무튼 이 영화에서 언어학적 의미의 해독 불가능성은, 영화의 감상을 방해하기는커녕 영화의 해독을 도와주는 것으로까지 여겨졌다.


그의 영화가 자주 그렇듯
<필름 소셜리즘>은 인과성의 합리로 배열되는 서사의 흐름에 무관심하다. 이미지들의 산만한 배치가 이미지들 사이의 충돌을 가져오고, 그 충돌이 만들어내는 불연속의 운동은 세계의 시간을 낯설게 조직한다. 이 영화는 그렇게 들뢰즈가 사유의 충격(noochoc)’이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우리 안에 사유의 가능성을 창조해내고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며 우리의 사유를 진동하게 한다.”(쉬잔 엠 드 라코트, 이지영 옮김, <<들뢰즈: 철학과 영화>>, 열화당, 2004, 72.) 영화로 하여 이처럼 세상을 다르게사유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넘실거리는 바다
, 그 위로 유람하는 호화로운 배. 저 바다의 물은 모든 경계를 출렁임 속에서 지워버린다. 너와 나, 그리고 자본가와 노동자. 그러나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은 엄격한 구별로 유치하다. 그리하여 유람선 안의 사람들을 찍은 영상이 때때로 매우 거칠고 조잡하게 나타날 때, 우리는 고다르의 어떤 적의를 직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명한 적대로 정치적인 것’(칼 슈미트)을 정의할 때, 고다르는 영상의 정지와 흐름, 화면의 선명함과 불투명으로, 혹은 사운드의 지속과 단속 그리고 무음과 소음의 선명한 대비로 정치적인 것을 실현한다. 고다르는 언제나 그렇듯 이 영화에서도 푸른색과 붉은 색을 즐겨 사용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소품들과 인물들의 복장으로 드러나는 그 강렬한 색채의 대비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지지의 표현이 아닐까. 아니면 박애(화이트), 자유(블루), 평등(레드)을 의미하는 프랑스 국기의 상징성을 재현한 것이거나.


육지
, 그러니까 땅위의 삶. 이집트, 팔레스타인, 오뎃사, 나폴리, 바르셀로나. 모두 학살과 전쟁, 폭력의 역사가 흔적으로 남은 장소들이다. 자료화면으로 보여주는 과거와, 다시 돌아와 보여주는 현재의 시간. 언뜻 스쳐지나가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영상,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 인간의 역사는 잔혹한 분별 속에서 약탈과 살육으로 얼룩져 있다. 인물들의 대사와 내레이터의 해설 그리고 인터뷰. 책의 어떤 구절에 대한 인용. 발자크와 라신, 그리고 비극의 원리. 심지어 알랭 바디우까지. 난삽하게 절합되어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유기적인 인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 세계의 비참함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한다. 이념과 자본의 욕망으로 들끓는 폭력의 세기, 그러니까 <필름 소셜리즘>은 그 속악한 세계의 구원을 바라는 한 유럽 좌파 예술가의 고해성사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고 나는 숙연한 마음으로 생각들을 더듬었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에 대한 단상을 남긴다. 구원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그 예술이 촉발시킨 사유의 운동이다.

 

Posted by 전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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