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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일기

[서평] 청년들에게 들려주는 한국 진보정치사_『전태일에서 노회찬까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0. 5. 26.

청년들에게 들려주는 한국 진보정치사

전태일에서 노회찬까지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전태일


지금으로부터 50년전, 그러니까 '시다'들이 하루에 16시간을 일하고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아야 했던 시절, 그러고도 한 달에 딱 이틀을 쉴 수 있었던 시절,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 외치며 스스로의 몸을 태웠던 사람이 있다. 이제는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이 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이야기다.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11개 출판사가 기획한 출판 프로젝트 <너는 나다>. 산지니에서 펴낸 『전태일에서 노회찬까지』는 진보정치인이자 시사만평가인 이창우 작가가 진보주의적 관점으로 한국의 현대정치사를 조망해낸 책이다. 


"청년들에게 들려주는 한국 진보정치사"라는 부제에 걸맞게, 책은 현 시대의 20대 독자를 청자로 두고 가상의 청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접한 후, 그 이전과 같은 삶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고 말한다. 전태일의 분신은 '앎과 함의 일치'라는 실존적 고민을 깊숙이 심으며, 당대 젊은이들에게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키는 계기였다.

'앎과 함의 일치'는 노동운동의 판을 뒤바꿨다. 70년대 활동가들이 외부에서 지원하는 방식으로 운동을 펼쳤다면, 전태일 분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80년대 활동가들은 아예 현장으로 들어가 '존재를 이전'하며 노동자를 직접 조직하는, 이른바 '학출'의 방식으로 활동했다. 

이제는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정의당의 심상정 의원 또한 이 '위장취업' 첫 세대로, 85년 구로동맹파업을 이끌며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초석을 닦았다. 




박정희체제는 노동자를 힘써 일하라는 의미의 '근로자'로 고쳐 부르고, 농촌에서 허리가 휘게 일하는 농민은 '농군'이라는 전체주의적 군사용어로 연병장에 도열시키듯 동원했고, 그 자식인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또 '산업전사'라고 불렀으며 공장에는 '회사 일을 내 일처럼, 근로자를 가족처럼'이라는 표어를 붙여 가부장주의적 자본주의체제로 노동을 통제했지. 

p.19



산업화 시대, 국가는 가부장주의적 유교논리를 사회 전체로 확장시켜 국가주의를 견고히 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국민 개인의 권리보다 조국의 근대화를 우선했기에, 기업의 생산력 향상 앞에서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은 얼마든지 등한시 되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노동자―특히 여공은 이중적으로 다뤄졌다. 필요할 때는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하는 '산업전사'로 명명하여 무성화시킴으로써 높은 노동 강도를 방치했지만, 다시 '여성의 노동'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어 저임금을 합리화했다.(이는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재단사로 일할 수 있었던 남성과 '시다' 여성의 처우는 크게 달랐다) 여성의 임금은 생계보조적인 임금이며, 여성의 노동력은 남성의 그것보다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유교적 관념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내게 처음 강렬히 각인되었던 '노동운동'은, 다큐멘터리 <밥꽃양>으로 접하게 된 현차노조 여성노동자들의 모습이다. 그동안 노동운동은 빨간 띠를 이마에 질끈 동여맨 아저씨들의 이미지로만 재현되었기에, 여성노동자들이 궐기하는 풍경이 내겐 너무 충격적이고 낯설게만 보였다. 하지만 사실, 내가 몰랐을뿐이지 한국의 노동운동은 동일방직투쟁 등 섬유업에 종사하던 여성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태동했다
『전태일에서 노회찬까지』를 읽으며, (여성에서 남성으로의)노동운동 주체 변화는 구로동맹파업에서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일어났겠구나 하는 짐작을 해본다. 나는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이 지나치게 가까이 닿아있었던 것에 비판적이기 때문에 (민주화담론에 기초한 노동사 해석은 노동운동을 무모순의 '신화'로 만든다) 저자의 관점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물흐르듯 이어진 서술을 따라가다보면 "왜 이렇게 됐을까"에 대한 의문이 풀리게 된다. 




책은 전태일 분신으로 시작된 이야기를 박정희 유신정권, 광주항쟁, 전두환 신군부 출현, 전노협 건설 등으로 이어가며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줄기에 정확하게 도착한다. 교과서로 알음알음 접했던 굵직한 사건들을 한 줄기에 올려놓고, <노동의 정치>라는 명료한 관점으로 역사를 재편한다.  

2부부터는 민주노동당 창당 등 진보정당 이야기를 중심으로 조금 더 세밀한 한국 현대정치사를 들려주는데, 이 부분이 흥미롭다. 87년 체제, 비례대표 제도변천사, 정치스타 노무현의 등장, 결선투표제,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철회, 전략투표와 소신투표의 딜레마, 노무현 정권의 이라크 파병문제, 이석기 내란음모와 통진당 해산, 가깝게는 세월호와 박근혜 탄핵, 그리고 노회찬의 죽음까지 ... 뉴스를 보며 궁금했던 용어와 사건의 배경들이 연결되어 펼쳐진다. 


심상정은 진보정당이 '진보적이지만 정치적이지 못하면 정당으로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때 정치적이란 말은 자신의 신념을 고백하는 것을 넘어 결과물을 성과있게 만들어 내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는 막스베버가 말한 '신념윤리'를 바탕으로 하되, '책임윤리'를 자각한 정치인의 자질이었다. 


정치는 선한 의도가 아니라 결과에 책임을 지는 일이라고 한다. 전태일 50주기, 얼마전 광주에서는 청년 노동자가 파쇄기에 몸이 빨려들어가 사망했다. 정의당은 '혁신위원회'를 발족하고 87년생 장혜영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진보정당과 진보정치의 역사는 또 어떻게 흘러갈까. "정의당이 문제 제기 정당이 아니라 문제 해결 정당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혁재 세종시당위원장의 말에는 뼈가 있다.





전태일에서 노회찬까지 - 10점
이창우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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