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화론과 중국
“구망救亡의 길은 철도를 건설하고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 철도를 건설하고 기기를 사용하려면 서학 격치에 밝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 서학 격치는 우회로가 아니다. 구망을 말한다면 이것을 버리고서는 불가능하다” 중국 사상가 옌푸 <원강> 中
19세기 말의 중국은 격동기였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무기력하게 영국에 패한 중국의 청나라 왕조는 홍콩을 영국에 굴욕적으로 넘겨야만 했고, 중국에는 농민혁명이 발발해 남경에는 태평천국이 건설되는 지경에 이른다. 청의 몰락은 기정사실이었고,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양 기술을 받아들여 군대를 근대화하고, 정치적 중흥을 모색하려는 양무운동을 전개한다. 바로 이 시기에 중국 청년들의 상당수가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옌푸도 그중 하나였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두각을 나타냈던 옌푸는 선정학당에서 영어를 배운 후 해군 항해사로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영국 왕립 그리니치 해군대학에서 유학을 마친 옌푸는 중국 해군을 교육하는 일에 매진했지만, 청나라는 여전히 복고적 전통에 집착하는 관료 조직에 의해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옌푸는 허약한 중국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결심으로 언론가의 길을 택한다.
당시 옌푸가 쓴 글의 제목들만 봐도, 그가 얼마나 중국이 강력한 국가가 되기를 갈망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강함이란 무엇인가>, <세계 변화의 빠름을 논함> 등의 글을 연이어 발표하며, 그가 영국 유학 중에 접했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저작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옌푸는 스펜서의 사상을 통해 중국의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계획하려 했지만, 스펜서의 저작물은 너무 많고 방대했다. 그런 옌푸에게 다가온 책이 바로 다윈의 불독으로 유명한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라는 저술이었다. 옌푸가 <천연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이 책은 중국에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사회진화론은 당시 망국의 길을 향해 가던 중국사회의 생존윤리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천연론>에서 헉슬리는 생물학적 진화론이 인간사회의 윤리적 규범에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즉 당시 스펜서에 의해 널리 유명해진 적자생존이라는 진화의 법칙이 과연 인간사회의 윤리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를 검토했으며, 실제로 이 책의 결론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헉슬리 스스로가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당대에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과학자이자 교육자였으며, 지적으로도 스펜서보다 훨씬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옌푸가 번역한 <천연론>은 그 책이 중국사회에 사회진화론을 전파시킨 결론이 역사적 아이러니임을 보여준다. 즉, 헉슬리의 스펜서에 대한 비판서가, 중국에서는 사회진화론이 유행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훗날 이 책을 읽고 중국 최고의 지식인으로 성장하는 후스는 <천연론>을 읽은 당시 학생들이 그 책의 내용보다는 국제정치에서 냉혹하게 작동하는 적자생존이라는 현실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천연론>이 중국에 번역되고 소개되는 과정은 그 자체가 중국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서양의 과학기술과 학문이 중국 근대로 편입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즉 20세기 초반 중국은 당시 중국이 처해 있던 위기적 환경의 맥락 속에서 모든 서구적이고 이질적인 사상을 변용해 받아들였다.
과학은 어떻게 중국의 근대를 직조했는가
”‘과학구국科學救國’ 사상은 근대시기 중국의 구국 사조 가운데 하나이다. 과학구국 사상은 아편전쟁 시기에 발생해서 양무운동洋務運動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신해혁명辛亥革命을 거친 후 5.4 신문화운동을 기점으로 확실한 하나의 과학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현대 중국 과학 정책과 사상의 면모를 살펴보더라도 그 근간에 ‘과학구국’의 이념이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한성구
1919년 5.4 신문화운동의 구호는 과학과 민주였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중국에 과학이 소개된 것은 아니었다. 분명 서학이라 불리는 형태로 명청(明淸) 시기에 서구 근대과학이 중국에 소개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학문을 그다지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양무운동으로 서양의 천문학, 기상학, 역학, 화학, 수학, 생물학, 지질학, 지리학, 광학 등의 저술들이 번역됐지만, 보수파들의 반대로 양무운동은 중체서용 정도의 선에서 서구과학을 소개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기예의 관점에서만 서구과학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던 양무운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변법파의 역할 덕분이었다. 변법파는 도구로서만 과학을 받아들이던 과거 지식인들의 한계를 넘어, 서양 과학을 사상으로 받아들였다. 변법파에 의해 일종의 보편적 가치체계로까지 지위가 상승한 과학은 강유위, 양계초 등의 사상가들에 의해 중국의 전통 관념을 비판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일종의 사회개혁사상으로 변모하게 된다.
유신 변법운동을 거치며 과학이 중국의 전통을 혁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직조할 사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5.4운동 시기가 되면 과학은 중국을 계몽시킬 유일한 수단으로 여겨지게 된다. 5.4 신문화 운동의 기치는 반봉건, 반전통이었고, 계몽을 위한 방법으로 선택된 과학은 급진파와 보수파, 전통 사대부와 현대적 지식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 긍정하는 합치된 견해였다. 당시 과학은 새로운 중국을 직조할 유일한 방법론이자 이론이었고, 이런 분위기는 과현논쟁을 거치며 과학을 거의 종교의 지위에까지 이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과현논쟁에서 과학의 편에 섰던 지식인들은 대부분 급진주의자들이었으며, 과학이 인생관이 된다는데 아무런 저항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1920년대의 중국에서 과학은 어떻게 보면 근대과학이 탄생한 유럽에서는 이미 그 흔적이 희미해진, 강력한 계몽사상으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던 셈이다.
신문화운동의 기세가 아무리 대단했어도, 중국이 서양 제국주의에 밀려 퇴보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와중에 과학은 여러 구국사상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과학 구국은 마르크시즘과 경쟁하는 사조 중 하나로 인식됐다. 과학이 구국사상으로 자리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들은 대부분 유학생들이었고,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유학을 하던 리스쩡 등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과학은 도구가 아니라 과학적 방법, 과학 정신, 그리고 정신의 본질로까지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들과 당시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과학구국사상은 당시 중국 젊은이들에게는 일상적 구호가 됐고, 다양한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에 의해 1920년대 중국은 과학으로 전통을 뒤집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는 열망에 빠져들게 됐다.
훗날 중국공산당의 초대 지도자가 되는 천두슈 또한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펴내며 진보적 지식인들과 함께 과학구국사상을 전파하는데 매진했었다. 천두슈에게 과학은 단순히 자연의 비밀을 발견하는 방법론을 넘어, 세계관과 인생관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이념이었다. 천두슈는 과학과 민주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는 무기라고 생각했다. 천두슈와 같은 지식인들의 사고방식을 과학만능주의라고 비판한 장군매같은 철학자가 있었지만, 1920년대 중국에서 과학주의는 이들을 누르고 승리를 거뒀으며, 이후 과학적 유물론을 기초로 하는 마르크스주의가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는 사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중국사회의 기저에 스며든 사상으로서의 과학
혁명의 열기가 무르익어가던 1930년대와 40년대에, 중국사회를 주도한 이념은 분명 마르크스주의였다. 과학은 마르크스주의가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표면적으로 과학을 하나의 이념이나 사상으로 내세우는 학파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과학은 중국의 혁명 시기 수면 아래로 내려가 조용히 혁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아 보였다.
최근 중국과 미국이 새로운 냉전체제를 만들어가는 기저에는 과학기술에 대한 양국의 치열한 경쟁이 숨어 있다. 불과 지난 20여 년 동안, 중국은 상당 부분 미국의 기술력을 따라잡았고, 안면인식이나 5G 기술 등에서는 이미 미국을 뛰어넘은 것으로 평가된다. 시진핑 주석은 취임 전부터 과학기술에 대한 무차별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천인계획을 넘어 만인계획을 통해 해외의 우수한 과학기술인력을 모조리 중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중국의 과학기술정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과학기술인들이 주체적으로 이를 이끌어나간다는 점이다. 혁명이 종결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 같았던 사상으로서의 과학은 1970~80년대 다시 중국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며 사회를 주도하는 이념으로서의 과학이 중국에 건재함을 과시하곤 했다.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사상으로서의 지위를 한번 획득했던 과학은, 여전히 현대중국을 이끌어가는 심장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마오쩌둥은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높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식 탐구자이자 사상가이자 철학자로서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섭렵하는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마오의 독서생활>이라는 책에는 그가 조지프 톰슨의 <과학대강>, 막스 플랑크의 <과학은 어디로 가는가>, 아서 에딩턴의 <물리세계의 본질> 등을 읽었다고 쓰여 있다. 1940년 혁명근거지에서 자연과학연구회가 결성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연과학은 인류가 자유를 쟁취하는데 필요한 무기의 하나이다. 사람들은 자연계에서 자유를 얻기 위하여 자연과학으로 자연을 이해하며, 자연을 극복하고 자연을 개조하여 자연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물론 과학에 대한 마오쩌둥의 생각은, 과학으로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것을 파괴하고, 철저히 중국을 구국하는데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한 국가의 지도자가 조지프 톰슨과 막스 플랑크의 책을 읽으며 새로운 국가의 형태를 구상했다는 건 한국의 대통령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큰 차이임에 분명하다. 20세기 초 동아시아에는 사회진화론의 바람이 똑같이 불었고, 조선에도 과학은 분명히 큰 변화의 동력으로 다가왔었다. 도대체 중국에선 사상의 위치를 점유했던 과학이, 왜 조선과 대한제국에선 그렇지 못했었는지를 이해하는 작업은 한국사회에서 과학의 지위와 역할을 이해하고 이를 직조하는데 아주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이로운넷=김우재 박사
천두슈 사상선집 - 천두슈 지음, 심혜영 옮김/산지니 |
진화와 윤리 - 토마스 헉슬리 지음, 이종민 옮김/산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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