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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일기

[서평] 이웃이 건넨 꾸덕한 낭만,『녹색 침대가 놓인 갤러리』 (이경미 소설집)

by 노지연 2022. 1. 6.

 

이웃이 건넨 꾸덕한 낭만, 『녹색 침대가 놓인 갤러리』 (이경미 소설집)

 

 

2022.01.05. 수요일. 오후 12시 19분.

나는 강물에 멈춰섰다. 떠 있던 배가 미끄러지듯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앞집 여자가 수면 위로 비쳤다. 오늘도 붉은 조팝을 하나 집던 그녀였다. 동시에 건너편의 여자는 남편의 영정에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나 언덕 밑 갤러리에 있으리라 확신했던 여자는 보이지 않았으며, 쉼 없이 달린 허벅지는 뻣뻣해졌다. 불현듯 발바닥에 닿는 퍼즐 조각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지만, 영화관에서 나오던 그녀는 검붉은색 선글라스를 찾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색유리에 튕겨 나온 빛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우리 이웃과의 평범하고도 꾸덕한 낭만이었다.

 

*

 

이경미의 『녹색 침대가 놓인 갤러리』는 7+α 세대의 가정을 디스토피아 속에서 그려낸 작품이다. 소설집은 직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가족을 다루는 7개의 단편소설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주목하고픈 특징은 주요인물과 더불어 그들과 맺어진 인간들에게까지 ‘이웃’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한 가족의 과거를 궁금해하던 상담가 또는 아들을 가진 여자의 어머니.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읽을 ‘당신’과 ‘나’에게도 그 연장선이 맞닿아 있다.

다시 말해 소설 속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다. 반짝이는 강을 가진 숲속 도시의 일상을 들려준다. 그 내용은 다소 그로테스크하고 비현실적이나 가장 현실적인 아이러니를 담아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서평 서두에 쓰인 오후의 일기가 각 단편의 첫 마디임을 진즉 깨달았으리라 본다. 소설집의 세 번째, 여섯 번째 이야기가 이루는 마을로 들어가면 남은 단편 속의 가정이 꾸리는 도시, 헤어나올 수 없는 낭만의 늪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P.S. 작가는 낭만을 잃었고, 당신은 이미 그곳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이웃, 붉은 조팝을 집던 앞집 여자 「누름꽃」

 

그 여자는 매일 같이 꽃을 누르고 짓이긴다. 압화 작가인 탓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는 남편과 아들 하나가 있었다.

부모 잘못 만나 인생 족쳤는데. p.25

물론 아들은 분을 못 이겨 공동 현관의 유리를 깨뜨리는, 세상에 짓눌린 인간이었지만 말이다. 그녀가 자라온 가정환경 또한 지금의 분위기 혹은 그녀의 아들과 다르지는 않았다.

여자는 핀셋으로 일일이 그것들을 겹치지 않게 배열하고 꽃송이와 줄기, 잎도 빼곡히 놓은 뒤 하얀 화지를 덮었다. 그 위에 건조 매트를 놓고 다시 화지를 깔고 꽃들을 다듬어 촘촘하게 분류해 놓기를 반복했다. (…) 작업 때마다 느끼듯이 누르고 눌러온 자신의 가슴과 다를 바 없는 형국이었다. p.31

아들만 고이 대접했던 어머니와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 사이에서 짓이겨진 꽃 한 송이. 그러나 숱한 짓눌림들에도 끝이 있던 것인지. 물론 아직 아들에게 바라던 “엄마” 소리를 들었다는 소식은 없었다. 그러나 짓이기는 삶을 한결 내려놓는 그녀의 모습을 기대해보아도 좋지 않을까, 감히 말해본다.

 

 

두 번째 이웃, 감히 찾지 못한 언덕 아래의 여자 「녹색 침대가 놓인 갤러리」

 

우리는 ‘안’이라는 인간, 나아가 그 사람이 사랑하는 ‘전 화백’을 마주할 차례이다. 화자 ‘나’와 ‘안’의 상담으로 시작되는 이웃의 이야기는

‘그 사람’의 마지막 가는 길은 췌장암으로 험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머니와 나를 팽개쳤을 당시 정말 행복했는지, 그 뒤로도 행복했는지, 그랬다면 그 행복의 가치는 어느 정도인지,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나는 무엇인지. 어머니는 평생 왜 혼자였는지. 밑도 끝도 없는 숱한 질문 앞에서 방황했던 나 자신을 떠올리며 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p.53

불현듯 어린 시절 기억에 지배된 상담가의 회상 회로를 끝으로 완성된다. ‘안’은 그녀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불안해 보인다고 했다. 소설 속 떨어뜨려진 찻잔처럼 누구 하나 평온하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 죽음과 살인 같은 다소 직접적인 어투로 이야기를 함에도, 상담을 맡은 화자 ‘나’를 넘어 눈으로 듣는 당신의 회로 또한 작동시킬 것이다. 

 

 7개의 단편소설 중 2가지를 만난 지금, 이경미의 소설집은 어떤 분위기를 취하고 있는가. 혐오와 증오 나아가 폭력과 죽음까지 확장된 가족의 서사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진정한 이웃인가, 라는 의문에 도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녹색 침대가 놓인 갤러리」 中

 

*

 

결혼 삼년차에 접어든 어느 날, 남편이 욕실에 가 있는 사이 진동했던 휴대전화 창엔 ‘당신, 지금 와줄 수 있어?’ 문자가 떠 있었다. 나란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p.82

빈소 그리고 버스사고로 시작되는 환상의 숲. 남편과 아내 혹은 어머니라는 지위에서 ‘나’는 무엇인지, ‘누군가의 무엇’이 되고 점차 퇴색되는 개인을 들려준다. 그럼에도 처참했던 사고현장에서 달싹이는 입술을 발견한 세 번째 이웃, 망자도 위 흰 원피스의 그녀 「나를 보내는 숲」

 

 

다시는 미란을 볼 일 없으리라고 마음을 다독여가며 달린 끝에 맞은 새벽. 적막한 거리에서 불현듯 떠오른 소리를 곱씹다가 발길을 되돌렸다. 한때 헛짚고 달린 길도 반환점은 있어야지. p.137

형식은 매일 달린다. 허벅지가 저려와도 인생을 달렸다. 그러다 마주한 아내의 현실은 자신의 의심이 점차 확신으로 뒤바뀔 때쯤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돌렸던 발걸음은 그가 정한 인생의 반환점이라고 한다. 우리의 현실과 가장 흡사한 곳에서 살아가는 네 번째 이웃, 환상을 우회하던 마라토너 「마라톤은 즐거워」

 

 

자신에게 손과 발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수가 내민 것이 보다 인격적인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156

“맞고 싶니?” 지나의 이야기를 듣고는 누군가에게 물어보아라. 답은 쉽게 예상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처한 가족의 울타리는 ‘폭력’이라는 재료로 유지되어왔다. 지나를 살리기 위해, 오롯이 위해야 하는 행위는 그녀를 그저 때리는 것. 다섯 번째 이웃, “때려주세요. 살고 싶어요.” 「빗속을, 지나는」

 

 

이외에도 빨간 지붕의 동생이라는 트라우마에서 허덕대는 여섯 번째 이웃, 기억 속 강변을 떠도는 여자 「그 밤에 강물이 반짝인 이유는」

압화 작가인 여자가 아들의 관계성을 들려주었다면 이곳의 해주는 딸을 포함한 가족, 그리고 추억 속 그 사람 제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지막 이웃, 휘발된 세월 속 그녀「퍼즐」

 

*

 

작가의 말, 「나를 보내는 숲」 中

우리 이웃의 낭만은 밝지 않았다. 오히려 늪에 빠진 이끼처럼 진하고 꾸덕했다. 작가는 스스로 낭만을 잃은 지 오래라고 했다. 그렇기에 내가 말하고픈 것이자 모두가 바라던 꾸덕한 낭만은, 늪의 이끼처럼 벗어날 생각조차 없는, 부조리한 현실에 유혹되어 회피와 책임 전가를 바라는 일이었다. 즉, 애초에 정해져 버린 가족과 죽음의 경계에서 허덕이는 현실 그 자체를 의미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사는가. 혹은 어떤 현실을 바라는가. 『녹색 침대가 놓인 갤러리』의 3번째 단편소설, 「나를 보내는 숲」의 화자는 이렇게 말했다.

 

삶은 단순했고 성성한 감정에 매일 충실했다. p.91-92

 

"깊은 생각 없는 삶을 살자."

- "단조로운 삶이 무슨 재미가 있는가."

그러나 이웃들이 보여준 우리의 현실은 어쩌면 단조로운 사랑의 형태로 건져 올려지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의견과 동일하게 우리의 삶에서 더 이상의 낭만은 없다고 본다. 잠깐씩 찾아오는 운과 유희 그리고 현실을 극복하는 수준에 따라 ‘낭만이라는 착각’이 찾아온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벗어날 방법은 없는가. 착각을 현실로 바꿔보자는 시도, 꽤나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웃들의 이야기처럼 현실은 생각보다 더 깊고 진한 늪에 빠져있었다. 이경미가 꾸린 『녹색 침대가 놓인 갤러리』가 들려준 오늘의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현실 반영 소설이라고 보는 바이다.

오늘도 살아내 보자. 단조로운 사랑을 시작해보자. 물러나지 못할 곳에서 죽기보단 덜어내 보자. 벗어날 수 없다면 인생을 묻고 답하기나 해보자.

내가 먼저 묻겠다. 당신이 사는 낭만의 질감은 어떤지 괜히 궁금해졌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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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침대가 놓인 갤러리

섬뜩한 가족의 서사로 가족 공동체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는 이경미의 첫 번째 소설집. 저자는 현대 가족 공동체가 만들어낸 모순과 그 속에 내재한 갈등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녀가 표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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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

  • BlogIcon euk 2022.01.06 12:29 신고

    서평 서두의 일기가 넘 좋네요! 필자님의 독특한 아이디어 짱입니다👍 각 단편의 첫마디로 하나의 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네요ㅎㅎ
    답글

  • BlogIcon 제나wpsk 2022.01.06 14:16 신고

    서평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소설 속 인물들이 우리의 이웃이라는 말에 공감이 가네요!
    답글

    • 씨익웃기 2022.01.20 00:53

      멋진 서두에 깊은 사유로 풀어내신 내용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