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닦고 책은 나를 움직인다
신지은(산지니 편집1팀 팀장)
산지니는 부산에 위치한 출판사이다. 낭랑 18세의 청소년기 출판사이지만 아직도 부산에 있는 출판사라고 말하면 “출판사가 부산에 있어요?”라는 놀라움 섞인 질문이 되돌아오곤 한다. 서울중심주의인 한국에서 떡하니 부산에 자리 잡은 만큼 산지니에서는 좀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소소하지만 중요한 움직임들을 그려낸 책을 조명한다. 그리고 편집팀에서는 그런 작은 움직임을 포착하고 윤이 나게 닦아내는 업무를 맡고 있다.
투고 원고를 읽거나 새로운 원고를 받아 들 때면 어쩐지 한 사람의 생이 통째로 나에게 걸어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자의 철학, 지식, 시간, 고민, 그 모든 것이 녹아 있는 하나의 농축액을 몰래 혼자만 맛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편집자로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 중 하나는, 그 농축액을 누구보다 먼저 접하고 혼자 울고 웃으며 원고를 읽을 독자의 마음을 헤아려볼 때이다. 원고에 교정과 편집을 더해 독자에게 더 잘 가닿을 수 있도록 다듬고 의견을 덧붙일 수 있는 건 아마 원고를 먼저 맛보고 가공하는 편집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이 아닐까.
나의 계절을 책임지는 요리
『내일을 생각하는 마크로비오틱 집밥』은 산지니에서 처음으로 도전한 레시피 책이다. 책의 저자인 전혜연 작가님과는 에세이로 인연을 맺었는데, 이후 마크로비오틱 레시피까지 도전하게 되었다. 전혜연 작가님의 다정한 문체와 일상을 읽어나가다 보면 자연히 내 몸을 친절히 대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솟구친다. 작가님의 정갈한 손길을 따라가다 보면 뚝딱뚝딱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만 같다(미나리 리조또와 레몬 소금은 요리에 재능이 없는 나도 만들어낸 요리이니 적극 추천한다).
어쩌면 마크로비오틱이라는 단어가 좀 생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마크로비오틱은 육식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건과 유사하지만, 재료의 대부분을 버리지 않고 먹는다는 것, 계절에 알맞은 재료를 활용한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 껍질, 뿌리, 심… 보통은 휘리릭 도려내고, 숭덩 잘라내는 부분도 특별한 요리로 만든다. 책에는 작가가 어떻게 마크로비오틱을 실천하게 되었는지, 자연과 함께하는 일상, 마크로비오틱에 대한 견해도 녹아 있다.
일상을 보내다 보면 계절을 잊어버리는 때가 많다. 나도 모르는 사이 꽃이 펴 있고, 높아진 기온에 반팔을 꺼내 입는다. 이 책을 편집하는 동안 한동안 바람에 날려 보냈던 계절이 내게도 잠시 머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제 나는 여름이 다가오면 옥수수밥이 떠오르고, 겨울이면 배추전이 당긴다. 매 끼니마다 계절을 떠올리다 보니 자연히 사계를 만끽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계절의 변화를 자각하자 나의 삶은 더 생생해졌다.
혹시 신년에 들어선 1월을 무용하게 보내고 약간의 좌절을 맛보고 있다면, 괜찮다. 마크로비오틱은 새순이 돋기 시작하는 2월을 봄의 시작이라고 본다. 여느 봄보다 조금 이른 시작을 알리는 마크로비오틱의 봄처럼, 따뜻하고 다정한 식탁이 다시 새로운 시작과 계절을 불러올 것이다.
우리는 모두 역사가 된다
『사다 보면 끝이 있겠지요』는 교정지를 보며 눈물을 글썽이게 만들었던 원고이다. 전란의 상황, 일제의 지배, 끝없는 가난. 책에는 그 엄혹한 시대의 나날을 살아냈던 김두리 할머니의 삶이 경북 사투리로 맛깔나게 담겨 있다. 김두리 할머니는 우리 주위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할머니이다. 그러나 자신의 영화 같은 삶을 막힘없이 풀어내는 스토리텔러이기도 하다. 처음 이 책이 투고 원고로 들어왔을 때 오래도록 축적된 할머니의 사투리는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이들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자는 이에 대한 우려를 각주에 담아 보내왔다. 퇴고 및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각주를 덜어내고, 보통 사람의 삶이 역사를 대변할 수 있다는 이해를 더할 저자의 원고를 더하며 시간을 가지고 편집을 진행하였다. 김두리 할머니의 삶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여성신문>에 원고를 연재하고, 2021 서울국제도서전 가을 첫 책에 첫선을 보이는 등 책의 출간을 위한 초석을 다졌다.
책이 출간되고 난 후, 구술 기록자이자 김두리 할머니의 손자인 최규화 작가님은 할머니가 위인이시냐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생애를 고스란히 담아 책으로 내는 행위가 나라에 업적을 세운 위인들만이 할 수 있는 대단한 일처럼 여겨졌던 것일까. 그러나 한 사람의 생은 하나의 역사이기도 하다. 비록 위인은 아닐지라도 할머니의 삶에는 역사의 굴곡을 몸 하나로 고스란히 담아낸 흔적과 기억이 남아 있다. 처음 원고를 읽었을 때 다른 동료들에게 들키지 않게 눈물을 훔쳐야 했다.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해야만 했던 결혼, 나 때문에 동생이 북한군에 끌려갔을지 모른다는 공포, 가난으로 자식을 잃은 슬픔 등. 혹독한 시대를 넘겨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그녀가, 그럼에도 ‘살다 보면 끝이 있겠지’ 하고 말하며 자신의 삶을 버텨냈다는 사실이 위안을 주었다. 그런 사람이 김두리 할머니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나의 삶도 하나의 역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바스라지고 뭉뚱그려진 인구들을 사람으로 돌리기 위한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수백, 수천만의 역사이자 생애로 기억되어야 한다. 특출난 한 사람의 위인과 영웅만을 기억하기에도 바쁜 시대이지만, 시대를 버티고 살아낸 김두리 할머니의 삶과 역사처럼.
나는 가네코 후미코
독립운동가 박열의 아내로 알려진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수기가 처음 한국어로 출판된 것은 2012년이었다. 그리고 2022년 그의 옥중수기는 새 옷을 입게 된다. 『나는 나』가 처음 출간되었던 2012년, 일본인 아나키스트의 수기에 대한 관심은 현저히 떨어졌고 그의 수기는 그대로 창고로 들어가 한동안 볕을 보지 못했다. 창고에 빛이 들기 시작한 것은 2017년 영화 <박열>이 개봉하고 난 이후였다.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던 독립운동가 박열과 함께 그와 동고동락했던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렇게 쌓여 있던 재고를 소진하고 재쇄에 들어갔다. 영화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고 몇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3월 1일을 전후로 야금야금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출판사에서는 계속해서 『나는 나』에 대한 리커버 의견이 나왔다. 영화 <박열>에서 전부 보여줄 수 없었던 가네코 후미코의 삶에 대한 철학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까닭이었다.
『나는 나』의 원제는 『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이다. 번역하고 출간하는 과정에서 제목을 바꾸었는데 가네코 후미코가 가진 ‘나’에 대한 철학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친구가 아닌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기억되기를 원했던 가네코 후미코. 그런 그가 박열의 아내로서만 기억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리커버에서는 가네코 후미코의 얼굴을 대담하게 그려 넣었다. 아름답게 미화된 이미지나 박열의 아내로만 기억되지 않도록 더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을 봐주었으면 한다.
책의 물성을 사랑하지만 가끔은 책의 물성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문서 파일이나 교정지로는 전해지지 않는 책의 무게가 생생하게 밀려들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을 준비하지만 왠지 최종 확인을 하는 그 순간만으로 모든 게 결정될 것만 같다. 혹시 무심코 놓친 어느 한 부분이 독자의 신뢰감을 무너뜨려 좋은 원고에 대한 평가를 흩트릴까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책이 주는 영향력을 믿기로 한다. 내가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여 만든 책이 다소의 틈새가 있을지언정, 결국 나와 작가, 독자의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조각이 되어 알맞게 들어가리라 믿는다. 책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책에 담겨진 소소하고 작은 움직임이 한 사람의 작은 세계를 열어주는 계기는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내가 만나고 영향을 받았던 모든 책들처럼. 그렇기에 내가 내린 판단에 대해 가끔은 의심스럽지만, 눈앞에 마주한 원고를 빛낼 수 있도록 오늘도 정성스레 원고를 닦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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