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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서점은 문화다,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3. 27.




있어보이는 게 제일 중요해

앞으로 10년 동안 진행될 문명의 흐름을 두 가지 키워드로 점쳐본다면 "대자본화"와 "인터넷"이 아닐까? 과거 10년을 돌아보면 이 두 가지가 빠르게 확산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마련되었고, 강력한 독재자가 나타나 전권을 휘두른다 해도, 이 두 흐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 
대자본은 혼자 운영할 수 있는 구멍가게마저 흡수해버렸다. 이제는 사람들도 동네 빵집보다는 전국적인 브랜드 네임을 가진 빵집을 더 신뢰하고 찾는다. 동네 빵집은 왠지 없어보이고 믿음이 안 간다. TV광고에 나오는 빵집 정도는 가줘야, 내 자신이 좀 있어보이고 구매만족도 크게 느낄 수 있다. 이미 사람들의 인식도 대자본화에 맞춰 변화한 것이다. 미디어에 비쳐져야만 '좋은 것', '신뢰할 만한 것'의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TV에 나오지 않고 주변에 그냥 멀뚱히 서 있는 것에는 눈길도, 가치도 주지 않는 그런 세상이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친구들까지 다 흡수해버렸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도 다들 페이스북이나 트위트하느라 바쁘다. 이럴거면 왜 만났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 얼굴이 인터넷에 떠야 더 있어보이고, 남들도 눈길 한번 더 준다.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라는 책을 읽고 간단한 후기를 남기려는데, 왜 이런 말부터 하느냐 하면, 서점의 운명도 저 빵집과 다르지 않아서이다. 서점도 점점 대자본화되어가거나, 인터넷으로 흡수되거나 둘 중 하나의 길을 가고 있다. 동네에 있는 허름한 서점은 너무 없어보여서 들어가기도 싫고, 할인도 안해준다. 서점 뿐만 아니라 책도 일단 있어보여야 되고, 저자도 있어보여야 되고, 출판사도 있어보여야 된다. 그래야 장사가 된다. 그런 점에서 『뉴옥,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는 있어보인다는 점에서 성공한 케이스다. 



사라지는 것과 트렌디한 것의 적절한 조합

지은이는 자신을 '북원더러(Book Wanderer)'라고 소개하고 있다. 책을 사랑하는 '북러버(Book Lover)'와도 다르고, 값어치 있는 책을 수집하는 '북헌터(Book Hunter)'와도 다른 '북원더러'는 책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부류다. 책을 사지는 않으면서 서점을 어슬렁거고, 존재하지 않는 책을 찾아 헤맨다. 삶의 무수한 의문에 답을 주는 책, 평생을 두고 쓰고 싶었던 소설과 비슷한 책,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킬 책과 우연히 마주치기를 고대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이런 책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런 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북원더링을 멈추지 않을 것이란다.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규정하는 지은이는 뉴욕의 서점을 원더링한다. 뜯어먹을 살점 많은 고기처럼 뉴욕엔 돌아다닐 서점이 가득하다. '뉴욕=세계의 중심'이라는 등식이 부끄럽지 않게 규모도 다양하고, 주제도 천차만별인 서점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이 책의 주된 목적 중 하나가 바로 그러한 뉴욕의 서점들을 소개하는 데 있다. 
하지만 아무리 뉴욕이라고 해도 서점이 사라져가는 흐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지은이는 서점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멜랑꼴리한 분위기를 책의 전반에 깔고서, 서점을 '순례'하고 있다. 앞으로 사라질지도 모를 이 아름다운 서점들과 종이책에 대한 마지막 기록서.

최근  10년간 미국 서점의 절반 정도가 줄어든 거 알아? 책의 죽음은 이미 시작됐어. 다들 눈치 채지 못하는 척할 뿐이지. … 다행히 뉴욕은 아직까지 작은 서점이 살아남아 있어서 북러버들에게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 되어버렸지만,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야.(본문 193쪽)
 
사실 사라지는 것이 한 두개가 아닌 요즘이다. 안타깝게도 그 많은 것 중에서 종이책과 동네서점도 포함되어 있는 것인데, 책을 사랑하는 이로서 사라진 것에 대한 애도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책과 서점 말고도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도는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특징은 사라지는 것을 트렌디한 것과 적절히 조합했다는 데 있다. 보통 사라지는 것은 낡고 먼지가 쌓여 추억 속에 잠기게 된다. 그것은 
애잔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것을 지금 다시 재현하고 싶다는 감정까지는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70년대의 한국 사회를 담은 사진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땐 그랬지, 하면서도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어깨를 으쓱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사라지는 것을 따라가는 길목에서 가장 트렌디한 도시인 뉴욕으로 날아갔다. 사라지는 것이지만 너무도 핫한 아이템이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멋진 동네서점'

이 책에 소개된 뉴욕의 서점들은 한 번쯤 들러 시간을 보내보고 싶은 공간이다. 몇 개의 대형서점을 제외하곤, 모두 소규모의 아담한 서점들이다. 그리고 각 서점마다 뚜렷한 테마를 가지고 있어, 흥미를 가진 분야에 따라 입맛에 맞는 서점을 찾아볼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지식을 단단한 형태로 지닌 책, 그리고 그러한 책을 빽빽이 꽂아놓고 있는 서점. 서점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생각들이 포개어져 압축되어 있는 곳이다. 새로운 생각과 사건이 씨앗처럼 심겨져 있는 곳이다. 언제든 걸어서 갈 수 있는 멋진 동네서점! 이런 동네에 산다면 자연스럽게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서점이 뉴욕에 생기기 시작한 역사는 근 100년 가까이 된다. 물론 가장 전성기였던 시기는 40~50년대였다고 하지만, 세계의 제국이 이루어낸 빛나는 문명은 아직까지 꺼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내 주변에 이러한 서점이 실제로 존재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집에 꽂혀있던 대부분의 책은 '방문판매'로 구입한 것들이었다. 서점에 갈 필요도 없이 알아서 외판원이 찾아와 길고 긴 설득 끝에 부모님의 지갑을 열게 만들었고, 그나마 그 덕분에 어릴 때 책이란 걸 접해볼 수 있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책을 팔았던 출판사 외판원이 없었더라면, 서점이 활발하게 생겼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산업의 역군으로 바빴던 당시 서민들이 서점까지 여유롭게 걸어다닐 팔자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있던 동네 서점은 참고서와 교재 위주였거나, 잘 나가는 전집류와 베스트셀러 소설 위주였다. 서점을 돌아다니며 문화의 향취를 느끼기 시작한 건, 오히려 대형 서점들이 생겨나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대형 서점들은 동네 서점을 잡아먹기 시작했지만, 뉴욕과 달리 한국에선 그 덕분에 '문화'의 공간이 생겼다.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넓은 서점을 돌아다니며 사지도 않을 책을 마음껏 둘러볼 수 있게 되었고, 한 귀퉁이에 위치한 까페에서 달콤한 커피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대자본 덕분에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뉴욕 서점 순례를 읽다보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잔함보다는, 가져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 생기게 된다. 물론 저자는 그러한 질투심을 내보이지 않지만 감쪽같이 숨긴 것일 수도 있고, 정말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뉴욕의 서점과 같은 문화적 풍요로움은 우리에게 있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로서는 사라져가는 것을 애도하기보다는, 그것을 갖고 싶고, 가져야 한다는 바람을 갖게 된다.


이 책은 독특하게도 책날개가 두 번 접혀있는데, 이유는 날개 안쪽에 숨어 있다. 덕분에 책이 더 견고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여행기도, 에세이도, 소설도 아닌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여행기도, 에세이도, 소설도 아닌 장르를 파괴하는 형식을 가졌다는 데 있다. 저자는 서점 취재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뉴욕에 떨어졌지만, 소설을 쓰고자 하는 열망도 품고 있다. 하지만 소설은 잘 써지지 않는다. 그러다 The Mysterious Bookshop 에서 할머니 점원이 해준 말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차라리, 그냥 둘러보았던 서점에 대해서 써보는 건 어때요? 때로는 소설보다 논픽션이 더 픽션 같으니까. … 소설로 어설프게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좋으니까요. 뉴욕의 서점에 대한 책이 나온 지도 10년은 넘었으니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업일지도 모르겠네요.(본문84쪽)

그래서 저자는 과감하게 여행기에 가상 인물을 등장시킨다. 이를 통해 저자는 <<도서관을 태우다>>라는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 소설을 쓰는 인물이 되고, 종이책과 서점과 도서관이 사라지게 되는 미래를 현재로 계속 소환해내는 효과도 거두게 된다. 50여 개의 서점을 일률적으로 소개하다보면 지루할 수도 있는데, 이런 장치를 통해서 흥미롭게 계속 읽어나가게 되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있어야 있어보인다

저자는 부산의 문화잡지 <보일라>의 편집장을 지낸 경력을 갖고 있다. <보일라>는 부산에서 일어나는 문화 행사와 지역 소식, 각종 리뷰와 광고가 혼합된 문화정보지이다. 나도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부산에도 이런 게 있다니? 생각하며 흥미롭게 봤었다. 돈을 벌어들이기는 커녕 돈을 거리에 뿌리는 이상한 비지니스였지만. 그래서 그만큼 즐겁고 재밌는 일이었다는 걸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저자가 왜 자신을 북원더러라고 하는지도 곧바로 이해가 간다. 
있는 사람이 있어 보이는 건 정말 중요하다. 있는 사람이 없어 보이면 사회적으로 큰 불행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없는 사람이 있어보이는 건 사회적으로 큰 낭패가 된다. 이 저자가 정말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직접 만나보질 않아서 확신할 수 없지만, 풍요로움 속에서 싹트는 문화를 즐기고 그것을 즐기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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