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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봄맞이 詩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3. 13.




이제 곧 꽃샘추위도 시샘을 거두고, 완연한 봄이 오겠지요.

하지만 지구온난화 때문에 점점 짧아지는 봄은 눈깜짝 할 사이에 지나갈 것이고
앗! 벌써 여름이라니! 하며 사무실에 앉아 울상짓고 있을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훤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름하여, <봄맞이 詩> 
이 시들이 짧은 봄을 길게 만들어줄 겁니다. 얍!! 



좋은 풍경
-정현종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 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서 그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아직 겨울인데, 밤나무는 혼자 봄이 왔습니다. 아, 정말 봄은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 꽃을 한나절에 다 피우게 해줄 '그짓'이 있어야 봄이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짓'이 꼭 그짓인지 아니면 딴짓인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그짓이 있어야 합니다. 안그러면 봄이와도 봄이 온 줄 모르고, 봄이 가도 봄이 간 줄 모를거에요. 


 4월 꽃비
-최영철

야이 후레자식아
점심은 뭘 먹을까
궁리하며 가는데
야이 후레자식아
흐드득 달려온 꽃이
내 면상을 때린다
금방 내팽개치고 온 말
야이 후레자식아
후회하며 가는데
지금 네 눈엔
내가 보이지도 않느냐고
꽃들이 와르르르 무너지며
고래고래 아우성이다
야이 후레자식아
아직 떨어질 때가 아닌 꽃들이
아직 울부짖을 때가 아닌 꽃들이
땅만 보고 걷는 내 뒤통수를 치려고
딴 생각만 하는 등짝을 후려갈기려고
제 몸의 비늘들을 마구 쏘아 보내고 있다
야이 후레자식아
너 가는 데 어딘지 보자고
그렇게 가서
얼마나 잘 되는지 보자고
뒤를 바짝 따라 붙는다
어깨에 자꾸 달라붙는
두 팔 벌려 앞을 가로막는
꽃들아 꽃들아
야이 후레자식들아



올 봄에는 꽃을 두고도 그냥 고개숙이고 지나간다면, "야이 후레자식아" 하는 소리를분명히 들을 겁니다. 이 시를 읽었기 때문리죠.^^ 그러니 꽃이 폈는지 아닌지 주변을 둘러보면서 걸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시의 묘미는 "야이 후레자식아" 라는 말을 꽃이 하기 전에, 
주인공이 먼저 누군가(A군이라고 합시다)에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주인공이 듣는 순간, 주인공은 A군이 되어버립니다. 뿌린대로 거둔 것이죠. ㅎㅎㅎ 
사실 지금 주인공은 엄청 심란한 상태입니다. 보아하니 A군과 다투고 온 모양입니다. 그러니 꽃을 감상할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심란해 죽겠는데 말이죠. 그런데도 꽃은 왜 날 보지 않느냐고 "야이 후레자식아"하며, 욕을 해댑니다. 그래도 주인공이 쳐다보지 않자 "그렇게 가서 얼마나 잘 되는지 보자고" 씩씩거립니다. 결국 주인공은 짜증이 폭발했고, 꽃들을 향해 "야이 후레자식들아" 하고 퍼붓습니다.
이걸 똑같이 주인공과 A군의 관계로 바꿔 생각해보면, 주인공은 다른 일로 정신없는 A군에게 날 좀 봐달라고 생떼를 썼나 봅니다. 욕도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A군의 입장에선, 주인공을 신경쓸 겨를이 어디있겠습니까. 정신없어 죽겠는데 말이죠.
그러니 결국, 마지막 행에서 꽃들을 향해 퍼붓는 "야이 후레자식들아"라는 말은 결국 주인공 자신에게 하는 말이 됩니다. 마구 달려드는 꽃들에 파묻혀, 자신한테 욕해야 하는 주인공은 얼마나 짜증이 났을까요.
하지만 그걸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납니다. 재밌는 시입니다. 욕을 읽는 쾌감도 누릴 수 있고요 ㅎㅎㅎㅎㅎ 



봄꽃
-하종오

화단에 산수유 꽃이 핀
할인마트에 장보러 온
북조선 출신 여자는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나물을 카트에 싣는다

각지에서 실어온 여름철 채소와
가을철 과일이 쌓여 있는 매대엔
주민들이 계속 찾아와서
한 해 내내 먹을 반찬거리를 살핀다

그런 사이 장을 다 보고
쇼핑백 들고 바깥에 나온
북조선 출신 여자는
이때쯤 북조선에선 뭘 먹었던가
생각해 보다가
화단에 핀 산수유 꽃을 본다

아, 이런, 이런,
봄나물이 나기 전에 배고파서
뜯어먹은 꽃이 무엇이었던가



박민규의 단편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도 꽃을 먹는 사람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소년이 보기에, 인간은 '상습적으로 전철을 타고, 상습적으로 일을 하고, 상습적으로 밥을 먹고, 상습적으로 돈을 벌고, 상습적으로 놀고, 상습적으로 남을 괴롭히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상습적으로 착각을 하고, 상습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상습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상습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습적으로 교육을 받고, 상습적으로 또 뭐가 있지, 상습적으로 외롭고, 상습적으로 섹스를 하고, 상습적으로 잠을 잔다.' 그래서 소년은 대부분의 인간을 상습범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상습범에서 벗어나는 인간들이 눈에 보입니다. 그 광경 중에 알몸의 삼십대 남자가 화단에서 꽃을 먹는 것도 있습니다. 지하철 푸시맨으로 일하는 소년은 누군가의 압력으로 튀어나온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는 자신 또한 알몸으로 화단에 앉아 꽃이라도 먹고 싶은 심정이 된다고 고백합니다.
꽃을 먹는 것은 확실히 비상습적인 행동인가 봅니다. 비참한 풍경이고, 실존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인지 북조선 출신 여자는 꽃을 뜯어먹던 것을 자세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꽃을 뜯어먹지 않는 것이 아름다운가? 하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습니다. 할인마트, 비닐하우스, 카트, 매대, 쇼핑백이 아름답지는 않잖아요? 상습적인 섹스는 더더욱 그렇구요. 차라리 비참하긴 해도 꽃을 뜯어먹는 게 좀더 아름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종오 시인의 「봄꽃」은 쉽지 않은 시입니다.

처음엔 봄을 느긋한 마음으로 맞이하려고 했는데, 시를 읽다 보니 봄이 깊어지네요. 여기서 후다닥 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 10점
정현종 지음/열림원


찔러본다 - 10점
최영철 지음/문학과지성사

입국자들 - 10점
하종오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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