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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의 만남 | 이벤트

일상과 여행 속에서 시가 쓰여지는 방식:: 『입술이 입술에게』 권명해 시인 북토크 후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4. 12. 24.

 

📢 2024년 산지니의 마지막 북토크 ✨

 

 

2024년도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은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계신가요? 산지니는 올해도 꾸준하게 북토크를 개최해 왔는데요, 12월 19일을 끝으로 올해의 마지막 북토크를 완료했답니다! 2024년 산지니 마지막 북토크는『입술이 입술에게』권명해 시인과 함께했습니다 🥰

권명해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입술이 입술에게』는 일상 속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과 사물을 통해 삶의 감각을 다시금 일깨워 슬픔, 불안, 우울 속에서 진실한 자아를 찾아가는 시집입니다. '시'라고 하면 은유적이고 함축적이어서 소설보다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인데요, 이번 북토크에서는 권명해 시인이 일상 속에서 어떻게 시상을 떠올리는지, 어떻게 시를 구체화하는지 등의 이야기를 나누어 시가 우리의 일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구나, 친근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북토크 후기에는 시집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더불어 권명해 시인만의 감수성이 돋보이는 이야기들을 선별하여 들고 왔습니다!

북토크에서 나눴던 권명해 시인의 『입술이 입술에게』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유합니다 😊

 


 

 

편집자   책에 수록된 프로필이 아닌, 스스로 자신을 소개한다면 어떻게 소개하고 싶으신가요?

권명해 시인  제가 등단한 지 15년쯤 되어가는데, 정말 엉겁결에 등단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시인이라고? 죽기 전에 멋진 책 한 권 내보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다 보니 너무 어렵고, 책을 낸다는 용기가 나질 않았어요. 그래서 10년 가까이 책을 안 내고 있었는데, 주변에서 너 진짜 시인이 맞냐고, 진짜 시인이면 책을 내라며 계속 질책했습니다. 그렇게 약간의 반강제성을 띤 첫 시집을 냈는데, 첫 집을 내니 더 빨리 낼 걸 후회가 되었습니다. 더 공부해서 시인다운 시인이 되자고 마음먹었고, 그렇게 3년 만에 2집을 내고, 또 3년 만에 3집을 냈습니다. 열심히 글을 써서 글 잘 쓰는 작가가 되고자 합니다.

 

편집자  전작『콩깍지』, 『어쩌면 같을지도』와 비교했을 때, 이번 3집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주위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권명해 시인  이번 3집을 읽고 이런 글을 보내주신 분이 있습니다. "이번 시집은 지난 두 권의 시집『콩깍지』, 『어쩌면 같을지도』와는 시풍이 사뭇 달랐다. 이전 시집은 신변잡사에 대한 진솔한 고백 같았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생각의 시공간이 지구촌으로 확대된 데다 진솔함 대신 모호함을 주었다. '경계에는 꽃이 핀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경계를 넘나드는 모호함이 있을 때 운명의 깊이는 더하는 법이다"라는 평이었습니다. 다른 분들도 시가 '(전작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좋다'라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어떤 분은 돈이 생기자마자 제 시집을 샀다며, 도대체 입술이 입술에게 어떤 말을 할지 너무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고 말해주어 굉장히 뿌듯하였습니다. 한 100편 정도 되는 시 중에서 누군가가 공감할 수 있고 같이 소통할 수 있는 시를 제 나이만큼 골라서 냈습니다. 그래서 관심 있게 본다면 숨어있는 제 나이를 알 수 있을 겁니다.

 

편집자  전작과 다르다는 반응이 많은데 실제로 작품을 쓰는 데 변화가 있었나요?

권명해 시인  앞서 말했다시피 1집은 거의 반강제적으로 냈고, 2집은 열심히 쓰긴 했지만 내고 보니 공부가 부족하다고 느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자 마음 먹고 어느 선생님에게 어떤 식으로 배워야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저를 아끼는 분께서 어떤 선생님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3집을 내는 것보다 더 큰 꿈을 그 선생님과 함께 꿔도 좋을 만큼 선생님과 코드가 너무 잘 맞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 중입니다.

 

 

편집자  선생님 작품의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가 여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여행지들은 장거리 여행지들이 많은데요, 작품의 소재가 된 여행들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 졌는지, 시차를 두고 이루어졌는지, 여행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권명해 시인  2002년에 5명의 시누이들과 계모임으로 가게 된 스위스 융프라우가 제 해외여행의 출발점입니다. 여행 당시 너무 감동적이고 좋아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 남편을 앉혀두고 발을 씻겨주면서 여행 너무 좋았다고, 자주 보내달라고 고마움을 전했어요. 시누이들도 여행 당시 제 행동들이 고마웠다며 칭찬을 많이 해주기도 했고, 흔한 말이지만 우리가 살면 얼마나 오래 살겠냐며 여행 많이 다니자고 약속도 했습니다. 그렇게 제가 총무를 맡고, 돈만 모이면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그때마다 딸아이를 챙겨주며 지원금도 듬뿍 주었어요.

그 후 시누이들이 힘들어서 여행을 못 가게 될 쯤에 친구들과 자유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자유여행을 위해 여행 계획을 짜다 보니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여행에 관심과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여행이 제 인생에 깊이 들어와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편집자  우리는 보통 쉽게 갈 수 있는 여행지를 많이 찾게 되는데, 작가님은 쉽게 가기 힘든 여행지에 많이 가시는 것 같습니다. 여행지를 정하는 기준이 있으신가요?

권명해 시인  저는 경남 창녕에서 나고 자라 자연과 접하는 생활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여행의 첫 번째 기준은 자연경관입니다. 박물관이나 도서관도 가보긴 하지만, 일차적으로 자연이 와닿아야만 여행을 결심하게 되더라고요.

 


 

 

편집자  페루 리마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셨을 텐데, 작중「입술이 입술에게」에서는 리마의 여인들, 특히 소녀에 시선을 두셨습니다. 리마에서 만난 소녀에 대해 이야기 해주세요.

권명해 시인  제 방에는 세계지도가 있습니다. 그 지도 위에 형광 스티커로 다녀온 곳들을 표시해두는데,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때로는 형광 스티커들이 말을 걸어 오기도 하고, 때로는 머리 속에 강하게 남아있는 이야기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자려고 누워있다가도 일어나서 글을 쓰게 되는데, 자꾸만 리마의 눈 큰 소녀가 생각나더군요. 리마에서는 안데스 전통무늬가 새겨진 천으로 알파카를 치장시켜놓고 사진 찍으라며 관광객들에게 호객행위를 합니다. 10대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말이 통하지 않아 몸짓이나 손짓으로 호객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알파카 사진을 찍으면서 가지고 있는 기념품 같은 것을 주었습니다. 그때 '땡큐'라는 간단한 영어도 못하던 아이의 모습이 자꾸만 마음에 남아 자다말고 일어나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왜 그 소녀가 그렇게 오래 마음에 남아있었을까요?) 옛날 우리가 전쟁을 겪을 때만 해도 미군을 만나면 '헬로, 쪼꼬렛 기브미'라는 말을 노래처럼 하곤 했잖아요. 그런데 (리마의) 그 아이는 자신에게 돈과 선물을 주는 사람에게 '땡큐'라는 말 한마디 못하는 게, 삶에 얼마나 허덕이고 있으면 그럴까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불을 끄면 나만의 별이 뜬다
벽에 걸어둔 세계지도
남미의 별이 반짝인다

산허리에 리마를 데리고 선
온몸이 눈동자인 소녀
전통복 차림의 시장 여인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유독 반짝이는 소녀의 별

_「입술이 입술에게」중에서

 

편집자  시집의 제목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생깁니다. 『입술이 입술에게』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요?

권명해 시인  예전 어떤 여행지에서 식당에 간 적이 있는데, 그곳의 종업원이 영어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었어요. 그때 어떤 사람이 "영어보다 한국말이 더 잘 통한다"고 해서 한국말로 이야기하니까 너무 잘 알아듣더군요. 지금껏 입술은 그저 생명을 유지하는 기본 관문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때 입술은 모든 사람을 통하게 해주는 말의 관문이구나, 세계의 모든 사람을 연결해주는 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입술이 입술에게'는 그런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편집자  사람들은 대자연 앞에서 '웅장함' 같은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그런데「모레노 빙하의 울음」이라는 작품에서 작가님은 웅장한 자연 앞에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신 것 같습니다. 그때 무슨 감정을 느끼신 건가요?

권명해 시인 모레노 빙하는 배를 타거나 걸으면서 빙하를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을 걸으면서 빙하를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쩍- 하고 큰 소리가 났어요. 산만 한 빙하 하나가 갈라지며 호수로 넘어지는 소리였습니다. 연달아 두 번째 빙하가 소리를 내며 넘어지는 것을 보는데, 그 소리가 저에겐 울음소리로 들려 저도 모르게 계속 눈물이 나더군요. 우리는 왜 말도 못 하는 쟤를 저렇게 울게 만드냐고, 우리는 뭘 하고 있는 거냐고, 이런 감정을 느꼈습니다.

울음이 얼어버렸다

최후의 적막

언젠가 사라질

몸의 일부

호수로 통곡한다

만년설의
속앓이 내려놓는 거친

긴 시간
끌어안고 지낸

퇴적
고뇌의 온몸이 조각난다

_「모레노 빙하의 울음」

 

편집자  「아르헨티나에서의 탱고」라는 작품은 '춤을 인생이라 말하자'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탱고라고 하면 정열의 춤, 유혹의 춤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기 마련인데, 어떤 부분에서 춤이 인생이라고 느끼신 건가요?

권명해 시인  탱고는 이민자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 힘든 생활을 이겨내는 것에서 발전한 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탱고를 추지만 사실은 슬픈 춤이라고 말할 수 있겠더군요. 여자가 뒤로 넘어가는 걸 남자가 받아주지 않으면 여자가 다치고, 여자가 잘못 움직이면 남자가 다치기 때문에 탱고는 두 남녀의 몸이 같이 호흡해야만 합니다. 살다보면 비슷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죠. 호흡이 맞으면 춤(인생)이 멋있게 성공하지만 호흡이 맞지 않으면 춤(인생)이 엉망이 되니까, 그런 부분에서 춤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춤을 인생이라 말하자

손을 잡고 엉켜 있는 오브제

(...)

파트너를 따라가면서
가슴을 보여 주는 시간

돌아야 할 때
무너질 뻔한 현기증

호흡이 거칠어지면
흩어짐에 대한 준비

인생이다

_「아르헨티나에서의 탱고」중에서

 

편집자  「오카와치야마」는 비교적 가까운 여행지인 일본에서의 경험을 옮긴 시입니다. 오카와치야마의 도자기 마을엔 조선 무명 도공의 묘가 있다는데, 장소에 대한 소개와 그곳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시를 쓰게 되었는지 들려주세요.

권명해 시인  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사업단에서 주최한 해양교류역사탐방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오카와치야마의 이마리에 있는 도자기마을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일본이 400년 전 에도시대 때부터 우리 조선 도공들을 데려가, 제가 봤을 땐 빼앗은 것 같으니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조선 도공의 기술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당시 조선 도공들은 한 집안의 가장이거나 젊은 사람이었을 텐데, 그 사람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가져가 이름도 없는 무명 비석으로 한쪽 구석에 놓아둔 것을 보고 일본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를 다시금 느끼게 되었습니다.

깊은 산속 큰 바위 병풍 아래
누군가의 생이 흔들리고 있다

갇혀버린 시간
질긴 삶을 굽었을 그들

(...)

사기장 비석
조선무명도공의 묘

흐르는 세월의 형상
비요의 땅에서 멈추었다

_「오카와치야마」중에서

 

편집자  지금껏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지만, 시집이 여행에 대한 이야기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내 혈관에 커피가 흐른다라는 시는 마치 저를 묘사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너무 공감이 갔습니다. 주로 언제 어떤 커피를 마시는 지 알려주세요.

권명해 시인  흔히들 하는 말로 브런치로 아침식사를 할 때 커피를 마십니다. 케냐나 에티오피아에서 가져온 원두를 엄하게 선별해서 핸드드립이나 거금을 들여 산 커피 기계로 내려 마시는데요, 그렇게 내린 커피를 아침에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는 걸 느끼곤 합니다. 그런데 커피를 안 마신 날이면 자꾸 실수를 하거나 뭔가를 잘못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그런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쉴 곳 없는 넉넉한 힘
잊히지 않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모닝커피가 없으면 그저 말린 고기에 불과하다

(...)

정열의 키스

꽃이 피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중독!

_「내 혈관에 커피가 흐른다」중에서
 

 


 

 

편집자   「수건을 삶다가」,「늙은 개의 시선」,「야간산행」과 같은 시를 보면 일상 속에서도 시의 소재를 잘 얻으시는 것 같습니다, 주로 어디에서 소재를 찾으시나요?

권명해 시인  어디에서든 찾는 것 같습니다. 수건을 삶다 뚜껑을 열었을 때 세균들이 불쑥 이빨을 드러내며 '네가 감히 나를!' 하며 대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고, 길을 걸어가다가도 나무와 식물을 보며 일반적이지 않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베란다의 창문을 열고 키우고 있는 다육이에게 인사를 건네는데요, 어떤 날은 식물들이 찡그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웃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늦게까지 안 자고 있으면 식물들이 밖에서 뭐라 뭐라 말을 걸거나, 바람이 창문을 두들기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럴 때마다 저도 모르게 글을 쓰게 됩니다. (그렇게 영감이 떠오르면 바로바로 작업을 하시는 편인가요?) 주로 항상 주변에 있는 핸드폰 메모장을 이용하고, 집 구석구석에 펜을 두고는 무언가 생각났을 때 신문지든 어디든 다 적어놓습니다. 그렇게 적은 것들을 노트북에 정리해 두고 다듬곤 합니다.

불온한 향기
물 묻은 저녁이다

망가진 냄새
혀를 내밀고 기어다닌다

구린내 나는 혓바닥
마침표도 없는 슬픔이 운다

_「수건을 삶다가」중에서

 

 

편집자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쓸 때 자칫하면 여행기나 감상기로 비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시'라는 작품으로 만들 때 특히 고려하는 부분이 있으실까요?

권명해 시인  특별히 인칭이나 명칭을 쓰지 않도록 하고 있어요. 한번은 이런 적이 있습니다. 여행지에서 빙하가 녹은 호수를 걷고 있었는데, 호숫물이 굉장히 차가울 텐데 누군가가 호수에서 목욕하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그쪽으로 걸어가 보니 어떤 남자가 알몸으로 정말 목욕을 하고 있었고, 우리가 다가가니 나무다리 밑에 숨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빙하 호수에서 목욕을 하는 게) 저 사람의 버킷리스트였을 텐데 우리가 방해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를 쓸 때 누구인지, 어디인지 특정하지 못하게 인명이나 지역명을 세밀하게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호수 가운데 뻗어 있는 나무다리를 걸어갔다
그는 다리 밑으로 몸을 숨긴다

머플러를 날리며

발가벗은
물속의 그를 보고
자리를 피했다

그의 몇 번째인지 모를 버킷리스트에
중력의 법칙이 사라졌다

_「알몸 - 와카티푸 호수에서」

 

편집자  북토크에서 여러 편의 작품을 언급했는데, 그것 외에 꼭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 있으실까요?

권명해 시인  「책갈피」라는 작품입니다. 제가 부산시인협회 사무국장을 할 때 코로나에 두 번 걸린 적이 있는데, 두 번째 걸렸을 땐 과장을 조금 보태서 정말 죽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2주 만에 출근을 하게 되어 사무실의 문을 여니, 시들해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행운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행운목에게 '내가 아파서 네가 걱정을 한 거냐, 아니면 너도 코로나에 걸린 거냐" 하고 말을 걸었는데, 자기 생각엔 나 때문에 자기가 코로나에 걸렸고, 내가 치료를 안 해줘서 자기는 화났다고 대답하는 것 같이 느껴져 정성껏 행운목을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행운목만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에 있는 수많은 책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응원과 함께 내가 잘하나 못하나 관심 있게 봐주고 있는 것이 마치 책갈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무실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힘을 주고 있다고 느껴지더군요. 그런 방식으로 아픈 걸 잘 이겨낼 수 있었고, 위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넘긴다

잠들지 않는 부력

찾아가는 손끝의 촉감
미로에 갇힌다

갈라진 햇살 사이
문장의 무게를 견딘다

주저하던 시간
덜컹거리던

균열의 힘으로
이어지고 있는 페이지를 지탱하고 있다

_「책갈피」

 

편집자  앞으로 또 계획하고 있는 여행지가 있으신가요?

권명해 시인  오래전부터 쿠바랑 캐나다에 가려고 계획했었는데, 미국에서 쿠바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해 쿠바에 갔던 사람은 다시 미국이나 캐나다에 입국하기 어려워져서 쿠바 여행을 미루고 있고, 캐나다는 달러가 너무 많이 올라서 미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봄에는 비교적 쉽게 갈 수 있는 베트남 샤파에, 하반기에는 인도에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인도는 여행자의 끝판왕 아닌가요?) 인도를 가보진 못했습니다. 제가 냄새에 대한 비위가 약해서, 아프리카와 인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두려워서 시작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함께 갈 동료가 생겨 지금 세 명이서 작당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인도에서의 작품이 기대가 됩니다) 저는 여행을 꽤 길게 하는 편인데, 한 곳에서 집중해서 여행 시를 써보는 게 어떻겠냐는 조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인도에서 그런 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편집자  주로 어느 시간에 어느 장소에서 시를 쓰는지, 컴퓨터를 선호하는지 아니면 수기로 쓰는 것을 선호하는지, 평소에 시를 쓰는 일상이 궁금합니다.

권명해 시인  제 책상에는 항상 노트북, 컴퓨터, 이면지 이렇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닥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글을 적는데요, 여유가 있으면 컴퓨터를 사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면지에 씁니다. 주로 핸드폰 메모장을 이용하곤 합니다.

 

편집자  최근에 읽고 있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평소에 좋아하는 작가는 있으신가요?

권명해 시인  지금 모두가 한강 작가에 관심이 많듯이 저도 한강에 관심이 많습니다. 지금은『바람이 분다 가라』를 읽고 있습니다. 화가 서인주의 목숨을 둘러싼 진실을 탐구하는 이야기인데, 서인주의 친구 이정희와 미술평론가 강석원이 각각 인주의 죽음에 대해 자살인가 타살인가를 추리하며 삶의 고통과 생명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책입니다. 서인주과 강석원의 관계, 이정희가 강석원의 책을 막으려는 이유, 각 인물의 감정적 변화가 어떻게 묘사되었나를 생각하며 읽고 있는데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강은 어휘력이 강하면서 때로는 부드럽고, 독자가 계속 글을 읽도록 끌어당깁니다. 그래서 요즘은 한강에 깊이 빠져있어요.

 

편집자  앞에서 우연히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고 하셨는데, 시인이 된 계기를 들려주세요.

권명해 시인  15년 전쯤,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 적이 있습니다. 이사 간 동네에는 아는 사람도 없어서 도서관에 가보았는데, 그곳에서 자원봉사자를 구하고 있어 사서로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하루는 도서관에서 시 창작 교실이 열려 봉사자들이 부족한 인원을 대신해 참석해야 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연히, 아무 생각없이 시를 써보게 되었고, 쓰다 보니 등단 이야기가 오가고 그랬습니다. 남편도 글 쓰는 게 나에게 맞아 보인다며 응원해 주어 그렇게 시인이 되습니다. (말 그대로 정말 우연히 시인이 되셨네요. 시인의 삶은 어떠신가요?) 조금은 책임감을 느끼고, 타인의 시선이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시인은 다 알고 다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시인은 머리에 뿔이 두 개가 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시인도 사람인데 실수할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고, 그렇게 이해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편집자  책과 여행 이외에 몰두하고 있는 대상이 있으신가요?

권명해 시인  예전에 마추픽추에 갔을 때,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누군가가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부르는 '엘 콘도르 파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귀에 익은 노래인데도 그 노랫소리가 너무나도 애절해서 가슴을 파고들더군요. 저도 여행을 좋아하니까, 여행 다니면서 들고 다닐 수 있는 악기를 배우고 싶어졌고, 그래서 지금 오카리나를 배우고 있습니다. 

 

편집자  우리는 필요와 쓸모가 있어야 가치를 가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용만을 추구하는 시대임에도 우리에게 시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시가 시인에게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권명해 시인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속에 있는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그 이야기가 부풀려져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남들이 모두 나와 같을 것이라 생각하곤 하지만,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이 많아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곤 하죠. 하지만 상처, 그리움, 아픔, 고민 같은 것들을 시에게 이야기할 때는 함축하기도, 숨기기도 해서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아도 됩니다. 내 이야기라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척해도 됩니다. 저는 그런식으로 시에게 많이 의지를 했고 아픈 일들이 있을 때 마음의 치유를 받을 수 있었어요. 그렇게 시는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친구이자 동반자이자 의사가 되어 주었습니다. 

 

편집자  앞으로도 계속 시집을 출간하실 텐데, 특별히 쓰고 싶은 작품이 있으신가요?

권명해 시인  여행 시도 깊이 있게 쓰고 싶고, 시뿐만 아니라 여행 글을 쓰는 여행 작가도 되고 싶습니다.

 


 

북토크 내용이 더 궁금하시다면 산지니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입술이 입술에게

권명해 지음 | 14,000원 | 2024.07.05 | 144쪽 | 125*210
ISBN : 979-11-6861-309-6 03810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도서 구매 링크

 

입술이 입술에게 | 권명해 - 교보문고

입술이 입술에게 | 일상을 감각하며 존재의 조건을 인식하다『문예시대』로 등단한 권명해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입술이 입술에게』가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는 사물과 풍경을 민활하게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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