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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겪은 농촌 현실, 날것 그대로 썼어요”:: <인저리타임>에서 『내 사랑은 그래』 구자순 시인을 인터뷰 했습니다.

by jh5169455 2026. 6. 9.

연암 박지원의 공작관문고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명과 코골이(비한)로 글쓰기를 비유한 이야기인데요. 글쓰기란 남들은 모르고 나만 아는 이명과, 나만 모르고 남들은 아는 코골이와 같아서 언제나 경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2021년 『장소시학』 제1회 신인상 수상으로 문학사회 활동을 시작한 구자순 시인의 인터뷰가 <인저리타임>에 실렸습니다. 입 밖으로 잘 꺼내지 않던 단어를 꼭 말로 해본다는 시인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쓴다고 합니다. 한 발짝 떨어져 관찰하고, 장면에 맞는 말을 찾고, 소리를 다시 밖으로 꺼낸다는 시인의 말에서 이명과 코골이를 경계하는 모습을 봅니다. 인터뷰를 통해 구자순 시인이 전하는 상상력에 독자 여러분이 함께 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인저리타임이 만난 사람】《내 사랑은 그래》 펴낸 구자순 시인 "몸으로 겪은 농촌 현실, 날것 그대로 썼어요"

 

남강 유역 농촌 여성의 고통을 자기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시로 승화시킨 구자순 시인

[프롤로그]

구자순 시인의 첫 시집 《내 사랑은 그래》는 오늘날 우리 문단에서 참으로 보기 드문 귀한 기록이었다. 시인은 지금 농촌 여성들이 마주한 가파르고 고된 삶의 현장을 어설픈 관념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대신 남강 유역인 경남 의령 지역의 생생한 토박이말과 가락을 빌려 날것 그대로 증언하고 복원해 냈다. 기자는 시집이 나온 지난해 12월부터 시인의 귀한 목소리를 기록해야 한다는 기분 좋은 의무감 또는 부채감을 안고 있던 터였다.

봄볕이 따갑던 지난달 28일 오후 경남 창원시 창원도청 인근의 한 커피숍에서 구자순 시인과 마주 앉았다. 시집을 묶어내기까지 시인이 통과해 온 비린 일상과, 그 가혹한 고통을 문학으로 이겨낸 세월의 더깨들이 남강 물줄기처럼 유장하게 흘러나왔다.

 

[요약]

모진 삶을 직면해 일궈낸 ‘고통의 시학’
농촌 여성의 삶을 토박이말로 증언한 구자순 시인의 첫 시집 《내 사랑은 그래》

남강 유역의 진주와 경남 의령 성당마을. 시집 《내 사랑은 그래》에는 이 지역의 정서와 시간이 촘촘히 배어 있다. 시인 구자순은 “태어난 곳은 지수지만 성장기의 대부분은 진주에서 보냈고, 실제 시의 배경은 의령”이라고 말했다. 진주를 '남강 상류', 의령을 '남강 하류'로 부르며, 자신을 “남강 상류에서 불려 하류까지 온 여자”라고 설명했다.

진주에서의 유년과 사춘기는 편안한 기억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고 시인은 털어놓았다. 상봉서동에서 봉원국민학교, 진주여중·여고를 다니며, 그는 '가면 안 되는 장소가 많은 시간'를 살았다. 어른들이 그어놓은 선 안에서만 학교와 공원 일대를 뱅뱅 돌았고, 겉으로는 ‘말 잘 듣는 딸’이었지만 속으로는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사춘기를 홀로 통과했다. 어른들의 말과 행동 사이의 간극, 대답되지 않는 질문들은 “나는 고향을 잃었다”는 감각으로 남았다.

시인의 길은 일찍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감상적인 시를 싫어하던 청소년이었다.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못하고, 사람을 감상적으로만 흐르게 한다”고 여겼던 그는, 소록도 다큐멘터리에 이끌려 간호대학에 진학했지만, 그곳에서도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경험했다. 졸업여행으로 찾은 소록도에서 그는 '숭고한 헌신' 대신 '그냥 직장인 간호사들'을 보았고, 또 한 번의 방향 상실을 겪었다. 이후 농민회 활동을 계기로 의령 성당마을로 시집가 농사를 짓지만, 남편은 활동가로 집에 거의 없었고, 시부모와 아이들, 수박하우스를 떠받치는 삶이 이어졌다.

“짜구가 났다”는 표현 그대로, 정신과 육체가 모두 피폐해진 상태에서 그는 다시 간호사로 일을 시작했다. 함안의 한 병원 노인병동에 들어갔을 때, 자격증만 있을 뿐 머리와 몸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남의 말이 귀에 안 들어오고, 기억도 안 되고, 얼굴 근육도 움직이지 않던” 자신을 마주한 그는, 뭔가를 외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시를 외우기 시작한 건, 시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머리를 돌리고, 귀를 열고, 몸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100편 정도의 시를 손으로 쓰고 중얼거리며 외우는 과정은, 1년 남짓 만에 막혀 있던 감각을 조금씩 열어주었다.

2007년, 함안 문학 강좌를 통해 경남대 평생교육원 박태일 교수의 소식을 듣고 혼자 등록했다. “경남에서 우리말을 제일 잘 부리는 시인”이라는 소개는 과장이 아니었다. 감상적인 시어를 즐겨 쓰던 그는 평생교육원 첫해에 혹독한 지적을 받았다. “그렇게 쓰면 안 된다. 남의 시에 기대지 말고, 니 일을 써라.” 머릿속 상상이 아니라 “지금 몸을 두고 살고 있는 삶”을 쓰라는 박태일 시인의 요구에, 그는 한때 “그만둬야 하나”를 고민할 정도로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게 과연 시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2008년부터 다시 수업을 따라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박태일 시인은 제자들에게 “10년을 버텨라”, “같이 밥 먹지 마라, 찻집에 가지 마라. 집에 들어가 글을 써라”고 강조했고, 글쓰기 기술보다 태도부터 가르쳤다. 제자에게 돈을 받지 않고, 어디를 가도 먼저 밥을 사며, 말한 것에 책임을 지는 스승의 모습에서 구자순은 “어릴 때 꿈꾸던 선생님을 이제야 만난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18년간 이어진 수업 속에서 그는 감상적 자기연민을 벗고, 의령 성당마을과 농촌 여성들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는 아내, 담벼락에 매달렸다 떨어진 아이, 수박하우스에서 얼굴 근육이 굳어가는 여자들… “사진 찍듯 있는 그대로 적고 싶었다”는 말처럼, 그의 시는 농촌 여성의 고통을 꾸미지 않고 드러낸다.

시집 제목이기도 한 표제작 〈내 사랑은 그래〉는 요양병원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등창에서 출발한다. “가만히 있으면 안 아프다”는 환자를 보며, 그는 자신의 사랑을 돌아본다. 상처를 직면하지 않고 “버티는 사랑”으로만 살았던 지난 시간을, 시인은 “맞춰가면서 버티는 사랑, 내가 앞에서 다 막고 있는 사랑”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그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며, 실패와 자기연민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구자순 시의 또 다른 특징은 말맛 나는 사투리다. 그는 “내가 쓰는 사투리는 다 말맛을 위한 것”이라며, 글을 쓸 때마다 입으로 중얼거려 본다고 말했다. “입 안에서 쫙 붙는가, 혀가 좋아하는가”를 기준으로 단어를 고르고, 외할머니가 쓰던 “쎄가 만발이나 빠진다” 같은 표현도 의미를 되짚어 시 속에 되살렸다. 간호사로서의 경험은 〈디스크〉, 〈골다공증〉 같은 시편에서 몸의 질병과 구조를 사실적으로 잡아내는 힘이 되었다.

삶의 고단함에도 그의 얼굴이 어둡지 않은 이유를 묻자, 그는 “고통에 빠져 있는 대신 고통을 정확하게 드러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이라고 답했다. 숨기지 않고, 미화하지 않고, 자신이 본 것과 느낀 것, 분노했던 것을 그대로 쓰는 일, 그 정직함이 마음이 덜 병들도록 지켜주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의 자극적인 언어들 속에서, 시인은 “제 시처럼 날것의 고통을 대면하게 해줄 때, 독자들도 자기 문제를 돌아보고 직면할 용기를 얻을 거라 본다”고 말했다. “자기를 직면하는 게 제일 어렵지만, 그걸 피하는 동안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시집 곳곳에 배어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구자순 시인은 “가족이란 나를 채워주는 존재라기보다는, 내가 지켜야 할 존재에 가깝다”고 했다. 그는 시댁과 농촌 생활에서 “함께 밥을 천천히 먹는 식구”를 거의 경험하지 못한 채, 딸 둘과 아들 하나를 키워왔다. 그에게 가족은 “혈연으로 묶였지만 제대로 된 ‘식구’의 시간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 그럼에도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아이들”이라고 했다.

앞으로의 목적지를 묻자 그는 “거창한 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냥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계속 쓰고 싶다. 시인은 시인으로서 뭐가 되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독자에게는 한 가지를 꼭 부탁했다. “제 시는 눈으로만 읽지 마시고, 소리 내어 읽어주세요. 그러면 글이 아니라 사람이 보일 겁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누구지”를 묻던 시인은, 성인이 되어 “나는 내가 만든 존재가 아니라 주변이 만든 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렀고, 그래서 결혼도 “주변이 튼튼해야 내가 튼튼해진다”는 생각으로 선택했다. 이제는 그 시선을 바꿔, 자신이 자녀들의 ‘주변’이 되어 아이들이 기대 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시인은“돌아보니 지금 나를 둘러싼 가장 큰 주변은 시와 시의 세계이고, 여러 길을 돌아온 끝에 결국 나를 만든 것은 문학의 세계였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Q1: 시집 전반에 진주 남강과 의령의 정서가 가득합니다. 시인님에게 고향 ‘진주’는 어떤 의미인가요?

구자순 시인: 태어난 곳은 경남 진양군 지수면(현재 진주시 지수면)입니다. 예전에 지수 톨게이트 있던 그 동네에서 태어났고, 지수에서 한 네 살쯤에 진주로 이사를 왔어요. 지수에 대한 기억은, 큰엄마 계셔서 제사 지내러 한 번씩 가던 정도죠. 시집에 〈남강에 들어서다〉라는 제목의 시도 있고, 넓은 의미의 남강의 정서가 흐릅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씀드리면, 글의 실제 배경은 의령입니다. 진주는 남강 상류 쪽 도시이고, 제가 오래 살았던 의령은 남강 하류 농촌이지요. 그래서 저는 제 스스로를 ‘남강 상류에서 불려서 하류까지 온 여자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요.

진주가 저한테는,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성장기 대부분을 보낸 곳이에요. 보은국민학교, 진주여중, 진주여고까지 다 진주에서 나왔고, 집도 상봉서동이라서 제 발길이 닿는 공간이 늘 비슷했거든요. 우리는 가면 안 되는 장소들이 많았어요. 어른들이 “거긴 가면 안 된다”고 선을 많이 그으셨거든요. 저는 상봉서동에서 학교, 공원 그 주변만 뱅뱅 돌았어요. 진주에 살면서도 내가 실제로 접한 진주는 그 동네 일부뿐이었던 거죠.

겉으로는 어른들 보기엔 ‘말 잘 듣는 딸’이었어요. 그런데 속으로는 말을 잘 안 듣는 딸이었고, 포장이 잘 된 딸이었죠. 저는 어릴 때부터 항상 ‘나는 누구인가’ 같은 질문이 많았어요. 사춘기를 남들보다 좀 더 힘들게 보낸 편이었고요.

어른들이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았는데, 어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잘못들이 있잖아요. 엄마 아버지, 그러니까 제게 고향인 그 어른들이, 제 의문에 제대로 답을 못 해줬어요. 나중에 커서 돌아보니 어른들이 나쁘다기보다, 제 질문을 풀어줄 언어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나는 고향을 잃었다”라는 생각을 한참 했어요. 항상 “왜 저럴까, 왜 그런 말을 할까” 묻고 또 물으니까, 어른들도 저를 좀 불편해하셨을 것 같고요. 그런 기억들이 진주에 많이 겹쳐 있습니다. 그래서 제게 진주는, 단순한 고향이라기보다, 어린 시절의 의문과 불편함, 질문들이 많이 쌓여 있는 장소예요.

Q2: 진주여고 시절은 어땠나요, 문학소녀였나요?

구자순 시인: 진주여중 다닐 때, 진주여고는 우리한테 갈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이었어요. 선생님들이 진주여고를 선망하도록 얼마나 주입시켰던지 우리는 진주여고 언니들이 모두 천사인줄 알았어요. 쉬는 시간에 여고 언니들이 화단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였어요. 자연스럽게 “나는 저 학교를 꼭 가야지” 하고 다짐했죠.

사춘기가 슬슬 오려고 할 때가 중3이었는데, 그때가 또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해야 할 시기잖아요. 그래서 사춘기가 막 올라오다가, 그걸 살짝 눌러놓고 공부를 엄청 열심히 했어요. 아침 5시에 일어나 공부하고 밤 12시에 자고, 그렇게 진주여고에 가기 위해 제일 열심히 공부했던 게 그때입니다.

막상 진주여고에 들어가 보니까, 제가 꿈꾸던 그 공간이 아니더라고요. 학교 자체가 일본식 오래된 건물인데, 마룻바닥은 삐걱거리고, 겨울바람이 들이치면 창틀이 덜컹덜컹하고… 제 기억에는 늘 ‘사각사각’ 연필 긁는 소리, 종이 넘기는 소리, 공부하는 소리만 가득했던 학교였어요.

애들은 전부 얼굴이 하얗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사각사각거리는 장면만 눈에 들어왔어요. 제가 그 학교를 들어갈 때는, 사춘기를 잠깐 멈추고 현실적인 목표를 향해 뛰어 들어간 상태였는데, 막상 가보니 제가 기대한 공간이 아닌 거예요.

그때부터 사춘기가 다시 시작됐어요. “나는 누구지? 나는 어디에 서 있지? 뭘 해야 하지?” 이런 질문들이 다시 본격적으로 올라온 시기가 진주여고 시절이었어요. 다른 애들처럼 막 많이 놀거나 그런 것도 별로 없었고, 혼자 고민하고 책 많이 읽고, 그런 시간들이었죠.

그때 시인의 길을 꿈꿨냐고 물으시면, 전혀 아니었습니다. 오빠가 조병화 시인 등의 시를 좋아해서 시집을 많이 봤는데, 저는 그 감상적인 시들이 별로였어요.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못하고, 사람을 감상적으로만 흘려보내는 것 같아서, 시를 오히려 싫어했습니다.

저는 제 문제를 좀 해결해줄 수 있는 책을 찾았어요. 철학책, 삶에 대한 책들, 그런 걸 붙들고 계속 파고들었죠. 그런데 그걸 건강하게 안내해줄 선생님이 없었어요. 중학교 때는 선생님들한테 꽤 영향을 받았는데, 고등학교에 와서는 “어른들이 나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구나” 하는 불신이 생겼어요. 진주여고가 대학 입시를 위한 교두보 역할을 많이 하는 학교였잖아요. 선생님들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제가 찾는 질문의 답과는 너무 달라서, 고등학교 시절 내내 그게 제 고민이었습니다.

Q3: 2021년 《장소시학》으로 뒤늦게 등단하셨습니다. 본격적인 시인의 길로 접어들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구자순 시인: 등단이란 걸 처음부터 목표로 한 건 아니었어요. 제가 시를 처음 제대로 붙든 건, 2004년쯤 경남 함안의 한 병원 노인병동에서였어요. 이전에 의령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정신과 육체가 다 피폐해진 상태로 오래 살았거든요. 그걸 제가 잘 모르고 있다가, 병원에 취직하면서 비로소 제 상태를 보게 된 거예요.

필요해서 간호사로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자격증은 있는데 머리와 몸이 완전히 굳어 있더라고요. 다른 사람 말이 귀에 안 들어오고, 머리도 안 돌아가고, 기억도 안 되고,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웃음도 없어지고, 얼굴 근육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요.

그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뭔가를 외워야겠다 생각했어요. 마침 촌에도 컴퓨터가 보급되던 시기라, 작은 자판으로 일기처럼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시를 외우는 쪽으로 갔어요. 처음엔 시를 쓰려고 한 게 아니라, 머리를 돌리려고, 귀를 열려고, 몸을 깨우려고 시를 외운 거였죠.

한 100편은 외워보자 마음먹고, 틈날 때마다 적고 중얼거리면서 외우다 보니, 1년 남짓 지나서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뭔가를 들은 것 같은데?”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귀가 조금씩 열리고, 머리도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거죠. 얼굴 근육을 푸는 데는 6개월 넘게 걸렸고요.

그렇게 시의 효용을 몸으로 느끼다가, 함안 문협 강좌를 통해 경남대 평생교육원의 박태일 교수님 이야기를 들었어요. “경남에서 우리말을 제일 잘 부리는 사람”이라고요. 마침 모집하는 걸 보고, 혼자 가서 등록했습니다. 그게 2007년도였고요.

그때부터 평생교육원에서 교수님 수업을 18년간 계속 들었어요. 평생교육원은 졸업이 없는 곳이어서, 학기마다 등록만 하면 계속 배우는 구조거든요. 저는 등단, 투고, 시집 출간 이런 계획 없이, 그냥 공부하고 쓰고, 교수님 말씀대로 ‘나를 써보자’ 하면서 버텼어요.

그러다 어느 시점에, 교수님이 “이제는 책을 만들고 거기에 실어도 어디에도 빠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책이란 지금의 《장소시학》을 말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2021년에 《장소시학》 창간호 ‘추천시인’으로 뒤늦게 이름을 올리게 됐습니다. 다만, 지금도 “내가 쓰는 게 과연 시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안고 살고 있습니다.

Q4: 시인 구자순에게 박태일 시인은 어떤 존재인가요?

구자순 시인: 처음에는 정말 감당이 안 되는 분이었어요. 저는 혼자 있을 때 아주 감상적인 글을 많이 썼거든요. 손가락 사이에 빠지는 바람을 붙잡는다든지, 얼굴에 있는 점 하나를 가지고 혼자 즐거워한다든지, 그런 식의 글이었죠. 남들하고 조금 다른 감각이 있긴 했는데, 그게 뭐인지도 잘 모르고 그냥 쓰고 있었어요.

평생교육원 처음 갔을 때, 교수님이 그런 감상적 어투를 정말 세게 지적하셨어요. “그렇게 쓰면 안 된다, 남의 시를 베끼거나 외워서 거기 기대서 쓰지 마라, 니는 니 일을 써라” 계속 그러셨죠. 머릿속 상상이 아니라, 지금 몸을 두고 살고 있는 삶을 쓰라고요.

처음 1년은 ‘내가 여기서 그만둬야 하나’ 싶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그런데 2008년에 다시 마음을 다잡고, “내가 쓰는 것이 과연 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안고 적극적으로 교수님 수업을 따라가 보기로 했죠.

저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한테 많이 실망했어요. 부모님도 그렇고, 선생님들도 그렇고, ‘스승’이나 ‘부모’라는 말이 너무 크게 포장돼 있어서, 실제 행동과의 간극을 많이 봤거든요. 그러다 보니 어른들에 대한 불신이 아주 깊었어요.

그런데 박태일 교수님은 달랐어요. 제자들에게 돈을 받으려고 하거나, 대접받으려고 하는 태도가 전혀 없었고, 어디를 가든 교수님이 자기 돈으로 밥을 사주시고, 말한 것에 책임을 지시고,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선을 긋고 물러서지 않으셨어요.

저는 “자기에게 엄격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다가, 결국 그게 저를 망가뜨렸다고 느끼는데, 교수님은 자기에게도 엄격하고, 남에게도 필요한 만큼 엄격한 기준을 지키는 분이었어요. 선을 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르게 흐르지도 않는, 그런 엄격함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아, 내가 정말 어릴 때 꿈꾸던 선생님을 이제야 만났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상처가 많은 제게, 교수님은 가까이 끌어안지는 않지만, 자기 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어른이었어요. 그 자리에서 학문을 하고, 해야 할 말을 하고, 책임지는 어른.

저한테 박태일 선생님은, “내가 정말 살고 싶었던 삶을 지금 실행하고 계신 분”, 그리고 제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어른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가르쳐 주신 대로 따라가 보자, 그게 제가 시를 계속 붙들고 있는 큰 이유이기도 해요.

 

Q5: 시집을 낸 소감은? 지역에서 시인으로 살아가기는 어떤가요?

구자순 시인: 사실 저는 시집 내는 걸 한참 동안 싫어했어요. “시집은 나무를 죽이는 일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던 사람이거든요.

발표했던 시들을 모으고 고치는 작업을 시작할 때도 자꾸 엉덩이를 빼고 싶었어요. 교수님이 “오늘은 어디까지 해라”고 계속 밀어주시는데, 저는 자꾸 게으름을 피우고, 엉덩이를 못 떼고 그랬죠.

그런데 막상 책이 나오고 나니까, 제 생각들이 종이에 묶여서 남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모양을 갖추었다는 게, 처음 생각보다는 훨씬 괜찮더라고요.

여러 반응들을 들으면서, “내가 너무 쓸데없는 일을 한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 같은 것도 생겼어요. 지역에서 ‘시인’으로 산다는 건 조금 창피하면서도, 한쪽으로는 살짝 기분 좋은 일이에요. 원래 저는 드러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고, 그냥 동네 아줌마처럼 살던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불러주면, “저 사람은 그냥 일만 하는 아줌마가 아니라, 이런 일도 하는 사람이네” 하고 봐주는 시선이 생기니까요.

그게 저를 바꾸진 않지만, 예전보다 조금은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 정도는 있습니다.

Q6: 표제작 〈내 사랑은 그래〉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내 사랑은 그래

꼼짝 않고 누워 있으면 괜찮아져등이 배기고 뜨거워지지만조금만 더 참으면어깨가 허벅지가 바닥에 내려설 때숨만 쉬어도 아프지만가만히 있으면
다 지나가
고열이 지나간 꼬리뼈 새까맣게 탄다터진다진물이 마른다더께, 타들어 가는 신호다만져도 묻어나는 건 없다
살을 녹이고뼈를 갉아굴이 생기는 동안안으로 기어들던 너를
나는 모른다

구자순 시인: 표제작 〈내 사랑은 그래〉는, 제가 요양병원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 이야기에서 출발한 시예요.

엉덩이에 큰 등창이 생겨서 우리가 몸을 돌려 치료해야 하는 상황인데, 그분이 “가만히 있으면 하나도 안 아프다”고 하시는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속으로 더 썩어 들어가는 건데요. 그걸 보면서 문득 제 사랑이 떠올랐어요.

저는 제 사랑이, 너무 무식할 정도로 우직한 사랑이었다고 느껴요. 사랑도 원래는 가꾸고 돌리고, 상처 나면 치료해줘야 하는 건데, 저는 ‘그냥 버티는 사랑’만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한 번 선택한 삶, 한 번 선택한 사람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꾸 거기에 맞춰가버렸어요.

사실 인간이니까, 상처를 주고받는 건 당연한데, 저는 제가 받는 상처만 크게 느끼면서도 그걸 직면하지 않고, 모른 척하고 버티는 쪽을 택했어요.

그래서 제 사랑은 ‘맞춰가면서 버티는 사랑’, ‘내가 앞에서 다 막고 있는 사랑’이었지, 서로 주고받고 고쳐나가는 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실패한 사랑일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제가 놓여 있던 환경에서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는 마음도 있어요.

그런 모순된 마음들이 〈내 사랑은 그래〉에 들어 있습니다.

Q7: 시인의 이번 시집은 농촌 여성의 삶을 생생한 토박이말로 복원 혹은 증언하고 있던데요, 박태일 교수님은 해설에서 ‘구자순 시와 고통의 현상학’이라는 제목으로, 삶의 고통을 단순한 ‘신세 한탄’으로 두지 않고 문학적으로 승화했다고 평했습니다. 이에 대해 시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자순 시인: 제가 쓴 건 결국 의령 성당마을과 그 주변, 농촌 여성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예요.

거기서 본 장면들이 정말 리얼했거든요. 예를 들면, 술 먹은 남편이 자기 부인을 집에서 끌고 나와, 동네 마당에서 옷을 벗겨놓고 때리는 장면 같은 것들이었어요. 그걸 같은 동네 며느리인 제가, 어떻게 못 본 척 할 수가 없잖아요.

제가 20대에 여성 문제에 관한 책들도 꽤 읽었어요. 매춘 여성, 페미니즘 관련 책을 보면서, “이 사람들에게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했었죠.

그러다 농촌에 실제로 들어가 보니까, 그곳 여성들의 삶은 정말 19세기 여성들 삶처럼 느껴졌어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왜 그러고 사냐, 그냥 나와버리지”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아예 선택지 자체가 없는 삶들이 있어요.

저는 그걸 사진 찍듯, 있는 그대로 적고 싶었어요.

사람들은 보통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드러내고 싶어 하죠. 추하고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것들은 안 보이는 데 밀어 넣고요. 그런데 저는 숨어 있는 것, 음침한 것, 고통스러운 것들도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서로 공론화하고. 저는 저의 역할을, 제 동네에서, 제 언어로, 최대한 정확하게 수행해보고 싶었어요.

교수님은 해설에서 말씀하신 ‘고통의 현상학’이나 ‘창조적 전회’ 같은 어려운 말로 표현해주셨지만, 제 마음속엔 “신세 한탄으로만 놔두지 않고, 끝까지 사실대로 쓰자”는 생각 하나가 있었어요.

그래서 최대한 정확하게, 숨기지 않고 썼습니다.

Q8: 시집 속 사투리 사용에서 가장 신경 쓰신 부분은 무엇인가요?

구자순 시인: 저는 제가 쓰는 사투리가 다 말맛을 위한 겁니다. 글을 쓸 때도 머릿속에서만 쓰지 않고, 계속 입으로 중얼중얼 해보거든요. 혼자서 “어쩌고 저쩌고” 말로 내뱉어보면서, 그 문장이 입에서 잘 도는지, 말맛이 맞는지 꼭 확인해요.

사투리라고 해도, 시라는 것은 그래도 믿음이 있어야 하는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아무 사투리나 가져다 쓰는 게 아니라, 실제 제가 쓰고 듣던 말 중에서 말맛이 살아 있는 것만 고르려고 해요.

시만 보면, 마치 한 달 동안 말 한마디도 안 하고 시로만 쓰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직접 얘기를 해보시면 알겠지만, 저는 사슬 풀듯이 말을 술술 잘 풀어내는 편이에요.

이 얼굴하고, 이 혀가 풀린 데도 시간이 꽤 걸렸어요. 제가 어느 날 갑자기 혀가 풀렸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 전에는 아니었어요.

요양원에서 일을 했는데, 대략 2010년쯤이었나… 어느 날 문득, 말을 하다가 “어? 말이 엄청 맛있네?” 이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전에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단어 자리가 잘 안 맞았어요. 생각나는 단어도 자꾸 어긋나고, 말을 끌어와서 이어 가야 하는데 중간중간 툭툭 끊기고, 문장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글을 쓰면서도, 혼자 계속 주물주물 말하는 연습을 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말이 쫀득쫀득하고 진짜 맛있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아, 이제 말이 좀 붙는구나” 싶은 때가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말맛이 있어야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단어의 뜻만이 아니라, 리듬감, 입에 붙는 느낌까지 다 포함해서 말맛이죠. 제가 시를 쓸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도 그거예요. “입 안에서 쫙 붙는가, 혀가 좋아하는가.” 그걸 보고 말을 고르는 거죠.

Q9: 〈디스크〉, 〈골다공증〉 등 육체의 질병을 이토록 솔직하게 시로 쓰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구자순 시인: 저는 직업에 대한 나름의 상상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교수님이 한번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거든요.

“각자 자기가 택한 직업에 대한 상상력이 있다. 그 직업이야말로 자기가 제일 잘 아는 거고, 제일 잘하는 거고, 그 느낌도 가장 잘 아는 영역이다.”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나는 간호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알고 있는 간호의 세계와 내 현실을 같이 붙여서 시를 써봐야겠구나 싶더라고요. 그 즈음이, 그냥 내 현실을 말하던 시기에서, 직업과 상상력을 접목해 시를 조금씩 만들어 가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이전에는 늘 ‘나’만 봤어요. 나, 우리 동네, 우리 이야기만 봤다면, 그때부터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내 옆의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모습도 같이 보기 시작한 거죠.

그중에서도 제가 특히 중요하게 보는 게 ‘척추’예요. 등골. 실제로도 척추가 중요하지만, 상징적으로도 등골이 참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제가 제일 재밌게 붙들었던 말이 ‘골다공증’, ‘등골’ 같은 단어들이거든요. 우리가 일상에서 “등골 빼먹는다” 이런 말 하잖아요.

또 “쎄가 만발이나 빠질라” 같은 말도 있고요. 그 “쎄(혀)가 만발이나 빠진다”는 말은 외할머니가 저한테 늘 하시던 말이에요. 제가 뭘 하면 “그라다가는 쎄가 만발이나 빠진다”는 식으로요.

예전에는 그냥 꾸중으로만 들었는데, 어느 날 일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거예요.

“쎄가 만발이나 빠지면, 그 ‘한 발’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거지?”

한 발, 한 발이 쌓여서 만 발이라면, 그게 얼마나 큰 고통이고, 얼마나 큰 소모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렇게 옛날에 들었던 말들, 지금은 잘 안 쓰는 우리 말들에 관심이 많이 생겼어요. 직업적인 경험, 간호사로서 본 몸의 구조나 통증과, 이런 오래된 말들을 엮어서 시를 쓰게 된 것도 다 그런 영향인 것 같아요.

상상력도 결국은, 뭔가를 충분히 알고 있어야 그 연장선에서 싹이 나지, 전혀 모르는 데서는 갑자기 나올 수는 없잖아요. 제가 알고 몸으로 겪어온 직업과 말, 그 둘이 만나서 지금 제 시의 상상력이 된 셈입니다.

Q10: 〈괜찮아 호 됐어 그래 가봐〉라는 시에는 어떤 사연과 서정이 담겨 있나요?

구자순 시인: 제가 이 말을 처음 떠올린 건, 우리 둘째 아이 때문이에요. 제가 늘 부석(부엌)에서 불 때고 있을 때였거든요. 집 구조가 좀 높아서 마당 아래로 담벼락 같은 게 있는데, 그 애가 벽만 보면 타오르는 애였어요. 말 그대로 원숭이처럼 벽을 타고, 담벼락도 잘 타고 올라가고 그랬죠.

어느 날도 구석에서 불을 때고 있는데, 밑에서 ‘쿵’ 소리가 나더니 둘째가 굴러 떨어진 거예요. 그러고는 저를 보면서 “엄마, 나 굴렀어!” 이러는 거예요.

그때 애가 진짜로 원했던 건, “그래, 많이 놀랐지? 어디 보자, 어디 아픈데?” 하면서 안아주고 달래주는 반응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때 마음속에 ‘죽을 병 난 것도 아니고, 뼈가 부서진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수연아, 괜찮아. 됐어. 그냥 그리 가봐” 이런 식으로만 말했어요.

애는 계속 여기저기서 “엄마, 나 여기 아파” 하고 부르는데, 아이가 원했던 반응을 제가 제대로 못해준 거죠.

그때는 제 상황이 너무 벅차서, 애를 충분히 안아줄 수 없는 형편이었어요. 나중에야 그때 일을 돌이켜보면서, 우리 애한테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그때 내가 내 상황에만 빠져 있어서, 이 아이한테 정말 필요한 걸 못 해줬구나” 하는 마음이 크게 밀려왔어요.

그 시는 그래서, 제 아이에게 미안해서 쓴 시예요. 내가 몰랐던 게 너무 많았고,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반응을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뒤늦은 자책이 담겨 있어요.

사실 우리 모두 그런 실수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는 위로와 공감이 필요한 순간인데, 자기 생각에만 갇혀서 “괜찮다, 됐다” 하고 퉁치면서, 오히려 상처를 주는 태도요.

〈괜찮아 호 됐어 그래 가봐〉는 그런 태도에 대한 제 반성, 그리고 아이에게 늦게나마 건네는 미안함과 다정함이 함께 들어 있는 시입니다.

Q11: 〈고치잠〉이나 〈광성 인쇄소〉처럼 팍팍하고 비린내 나는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길어 올리는 시인님만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구자순 시인: 저는 글을 쓸 때, 늘 한 걸음 떨어져서 보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 그 말을 그냥 제 안에 집어넣는 게 아니라, 살짝 떨어져서 다시 바라봅니다.

“저 사람이 그때 어떤 감정이었을까?”, “그 상황의 공기는 어땠을까?” 이런 걸 같이 보면서 써나가요.

그래서 제 글에는 관찰자 시선이 많이 들어가요. 제가 제 감정에 푹 빠져버리면 오히려 쓰기가 어려워져요. 조금 떨어져 나가서, 마치 저 멀리 있는 장면을 바라보듯이 보는 거죠.

그게 팍팍하고 비린내 나는 일상에서도, 그 안에 있는 결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남편과의 잠자리 같은, 말로 꺼내기 민망한 장면을 쓸 때도 마찬가지예요. 몸은 그 자리에 있지만, 머릿속은 계속 돌아가고, 제 안에서 또 다른 제가 그 장면을 관찰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이 상황에서 꼭 필요한 단어가 뭐지?”를 찾게 되는 거죠.

여성들이 보통은 입 밖으로 잘 꺼내지 않는 단어들, 특히 성적인 말이나 성기와 관련된 말들은 더 그래요. 하지만 저는, 필요하다고 느끼면 씁니다. 그 단어가 그 자리에서 가장 정확하다 싶으면, 그대로 가져다 써요.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많은 소리를 빼앗기고 살아왔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어떤 부분에서 자유롭고 싶다면,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황에 대한 이야기, 단어, 이름들을 입 밖으로 꺼내야 비로소 그 자리를 되찾는 거라고 봐요.

그걸 안으로만 눌러 담는 순간, 그 영토는 잃어버린다고 느껴요. 그래서 저는 자꾸 말하려고 하고, 소리를 내려고 하는 거예요.

팍팍하고 지저분한 현실 속에서도, 저는 한 발짝 떨어져 관찰하고, 그 장면에 꼭 맞는 말을 찾아 이름을 붙이고, 사람들이 빼앗겼던 소리들을 다시 밖으로 꺼내는 것, 이 세 가지를 통해서 그 안의 아름다움, 혹은 진실 같은 것을 건져 올리려고 합니다.

Q12: 〈새 며느리〉, 〈우리 남자〉 등 가족 관계를 미화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리시는데, 시인님이 생각하시는 ‘가족’이란 무엇인가요?

구자순 시인: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가족을 ‘나를 채워주는 존재’라기보다는 “내가 책임지고 지켜야 하는 존재” 쪽에 더 가깝게 생각해온 것 같아요.

가족이 나를 뭘 채워주고 보상해주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엄마로서 마지막까지 아이들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제 머릿속에 있는 가족이에요.

정상적인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경험은 많지 않았어요. 진주에서 살 때를 떠올려보면,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은 그렇잖아요. 같이 밥을 먹고, TV도 보고, 과일도 깎아 먹고, 이런 시간을 함께 보내는 식구들.

그런데 저한테는 그런 가족이 거의 없었어요. 결혼하고 시골로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시댁 어른들이 계시긴 했지만, 식구들이 둘러앉아 천천히 밥을 먹은 기억이 거의 없어요. 모든 일이 “빨리 해치워야 하는 일”이었고, 같이 느긋하게 밥 먹고 이야기 나누는 문화가 아니었거든요.

시댁 집 구조도 좀 상징적이었어요. 원래 아버님이 계시던 옛집 위로 축대를 몇 단 쌓아 올린 데 사셨고, 제가 결혼해서 들어간다 하니까 사랑채를 밀어 새로 집을 지으셨어요.

어머님, 시아버님, 남편, 저 이렇게 모여 살았지만, ‘혈연’ 말고는 따뜻한 의미의 가족이라는 느낌을 느끼기 어려운 시간이 많았어요. 남편은 활동가라 집에 거의 없었고, 시아버지는 우리 막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시어머니도 막내가 겨우 세 살 때 세상을 떠나셨어요.

결국 집 안에서 실질적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을 지키는 역할은 거의 제가 혼자 맡게 됐죠. 딸 둘, 아들 하나를 10년 동안 낳았어요. 큰애는 90년생, 둘째는 94년생, 셋째는 99년생이라, 10년 동안 계속 애를 낳고 키운 셈인데, 그 과정에서 “가족이 나를 지켜준다”는 느낌보다는, “나는 어떻게든 이 애들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어요.

결혼을 결정할 때도, 사실 저는 결혼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어느 순간 “어차피 현실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 언젠가는 뭔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농민회 총무 선배가 소개해준 그 집에 가서, 해거름 시간에 밀짚모자 쓰고 검정 고무신 신고 서 있는 남편을 봤을 때, “참 농사꾼 같다, 저 사람은 현장에서 괜찮은 사람이라고들 하니까 믿을 수 있겠다” 이런 느낌이 들어서 결심했죠.

그 사람도 자기 방황했던 이야기들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들려줬어요. 고등학교 때 방황한 얘기 같은 것들을 하면서, 자기 약점도 미사여구 없이 말을 하더라고요.

그걸 들으면서 “저 사람은 적어도 그런 문제로 나를 속이진 않겠구나, 이 정도 문제라면 내가 감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래도 결과적으로 보면, 저는 가족에게 뭔가를 기대하기보다는, 늘 '지켜내는 쪽'에 서 있었던 것 같아요.

시댁에서도, 남편과 아이들 사이에서도, 받는 사람이라기보다, 어떻게든 버티면서 유지하는 쪽 말이에요.

그래서 제게 가족은, 예쁘게 포장된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혈연으로 묶여 있긴 하지만 제대로 된 ‘식구’의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던 사람들, 그럼에도 내가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아이들, 내가 지켜야 할 자리들, 이런 것들의 묶음에 가까워요.

〈새 며느리〉, 〈우리 남자〉 같은 시에서 가족을 미화하지 않는 것도, 그런 경험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살아온 가족은 애써 꾸미면 더 거짓말이 되는 삶이라, 그냥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 제 방식입니다.

Q13: 삶의 신산함이나 고통 앞에서도 밝은 얼굴을 갖게 된 비결이 있나요?

구자순 시인: 제가 거기(그 시절)에서 빠져나온 뒤로 생각해보면, 비결이라면 딱 하나예요. 고통에 빠져서 헤엄치는 대신, 그 고통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에요.

고통은 고통대로 인정합니다. 그걸 억지로 꾸미거나 가장하지 않고, 내가 그때 느꼈던 것, 본 것, 분노했던 것들을 어떤 것도 거르지 않고 그대로 쓰려고 해요.

글을 쓰면서도 늘 점검해요.

“내가 지금 뭔가를 숨기고 있지는 않나, 표현이 느슨해진 건 없나.”

어떤 사람의 삶을 보든, 최대한 예단하지 않고 정확하게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정확하게 보고, 정확하게 쓰는 게 결국 제 마음을 덜 병들게 해준 것 같아요. 숨기는 게 없으니까, 괜히 속으로만 끙끙 앓을 일이 줄어들거든요.

차라리 바로 얘기해버리고, 글로 써버리고, 훤히 드러내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해요. 그게 얼굴까지 너무 고단해지지 않도록 지켜준 비결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우리 교수님이 늘 그렇게 가르치셨어요.

“가장 정직하게, 가장 솔직하게 써라.”

그 가르침을 따라, 숨기지 않고 쓰려고 애쓴 덕분에, 고단한 삶을 겪고도 어느 정도는 웃는 얼굴을 지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Q14: 정교하게 가공된 문장이 쏟아지는 AI 시대에, 시인의 시가 어떤 위로를 줄 수 있을까요?

구자순 시인: 요즘 세상은 말이 너무 많잖아요. 자극적인 말, 매끄럽고 무난한 말, 잘 포장된 말이 넘쳐요. 그런데 정작 자기 안에 있는 문제는 잘 안 들여다보고, 덮어두고 사는 사람이 많다고 느껴요. 겉으로는 다들 웃고 있지만, 사실은 다 웃는 게 아니거든요. 안으로는 각자 자기 문제를 끌어안고 있으면서, 바깥에 에너지를 다 쓰는 거죠. 그러면 속은 굶어 있고, 나중에는 그 굶주림이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시가, 그런 자기 속의 문제와 마주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봐요. 제 시에서 쓰는 말들은 번지르르하거나 자극적인 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들여다보는 말들이거든요.

문학치료에서도 그렇지만, 치유를 위해서는 먼저 자기 상처를 인정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저도 비슷하게 생각해요. 자기를 직면하는 게 제일 어렵지만, 그걸 피하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저는 “해서는 안 되는 말은 없다”고 생각해요. 다 써봐도 된다고, 다 말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드러내 보고 나서야, 비로소 밑바닥부터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어요.

자극적인 언어 대신, 자기 안의 고통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말들이, 결국 더 깊은 위로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15: 끝으로 시인으로서 가고 싶은 다음 목적지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구자순 시인: 시인으로서 제 목적지는 거창한 게 아닙니다. 그냥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계속 쓰고 싶어요.

저는 시인이라는 게, 시인으로서 뭐가 ‘되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목적지는 ‘쓰는 것’ 그거 하나예요. 쓰는 것 말고 다른 건 지금 따로 없습니다.

독자들께 꼭 부탁드리고 싶은 건, 제 시를 읽으실 때 소리 내어서 읽어달라는 거예요. 소리 내서 읽으시면, 글이 문자로만 보이는 게 아니라, 그 뒤에 사람이 보일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제 글은 눈으로만 훑지 마시고, 입으로 한 번씩 중얼중얼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예전에 저는 “나는 누구지, 나는 무엇이지” 같은 질문을 많이 했어요. 그 질문에서 빠져나올 때쯤, “나는 내가 만든 존재가 아니라, 주변에서 만들어진 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놓인 자리, 내 주변이 나를 결정한다는 걸 깨달은 거죠.

그래서 결혼을 선택할 때도, “주변이 튼튼해야 내가 튼튼해진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내가 내 자녀들의 주변이 되어줘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아이들이 기대고 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사람, 케어하는 나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지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지금 제 주변에는 시가 크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변이 나를 만든다”고 할 때, 이제는 시와 시의 세계가 제 주변이 된 거죠. 시 속의 나, 시인으로서의 나가 그렇게 조금씩 정리되어 가는 것 같아요.

여러 길을 돌아왔지만, 결국 저를 만든 주변은 시의 세계였다는 생각을, 이제는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에필로그]

시인의 얼굴은 맑았다. 현대 시골 여성의 삶과 고통을 온온히 온몸으로 감내해내며 문학으로 승화해낸 자의 표정은, 그 자체로 인간승리이자 문학의 승리처럼 느껴졌다. 첫 시집 《내 사랑은 그래》는 바로 그 얼굴과 목소리가 우리에게 건네는 한 권의 증언으로 다가왔다.

◇ 구자순 시인

1963년 남강 가 마을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출생. 진주여고와 부산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21년 《장소시학》 신인상을 받아 문학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경남시인회 회원. kjs9414@daum.net

 

출처 : 조송현 기자, 2026년 6월 1일, <인저리타임>

 

【인저리타임이 만난 사람】《내 사랑은 그래》 펴낸 구자순 시인 `몸으로 겪은 농촌 현실, 날것

[프롤로그]구자순 시인의 첫 시집 《내 사랑은 그래》는 오늘날 우리 문단에서 참으로 보기 드문 귀한 기록이었다. 시인은 지금 농촌 여성들이 마주한 가파르고 고된 삶의 현장을 어설픈 관념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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