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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불수교 140주년 특별전 「선물과 기록, 한국-프랑스 우정의 140년」 개최 중::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서 독립운동가 서영해를 소개했습니다.

by jh5169455 2026. 8. 5.

정의를 위해 굳건히 투쟁하였고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와 독재체제에 대항하여 펜을 든 독립운동가 서영해를 아시나요? 외교관이자 언론인, 소설가였던 서영해는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치며 “미국에 이승만이 있다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양대 외교 축이었습니다. 

불어로 직접 장편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의 주변』을 집필하며 일본 침략에 고통받는 한국의 현실을 드러내기도 했고, 한국인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유럽에 알리는 데 외교적, 문화적인 큰 기여가 있었습니다. 산지니에서는 2019년 독립운동가 서영해의 이야기를 담은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를 출간하고 2025년 개정판을 출간했는데요. 개정판은 2025년 6월 서영해 관련 자료 323건과 686점이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내용과 함께 저자가 최초로 발견한 남목청 사건 당시 김구 총상 사진과 발견 과정 등 서영해 관련 언론 기사 등을 새롭게 수록했습니다.

한불수교 140주년 특별전 「선물과 기록, 한국-프랑스 우정의 140년」이 6월 3일부터 8월 2일까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립니다. 임시정부의 정통을 잊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독립운동가 서영해를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서 소개했습니다. 기사 전문을 아래 옮깁니다.


한·불수교 140주년에 만난 독립운동가 서영해

독립운동가 서영해 (1937년 파리)

한불수교 140주년 특별전 「선물과 기록, 한국-프랑스 우정의 140년」이 6월 3일부터 8월 2일까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양국이 주고받은 외교 선물과 기록을 통해 140년의 교류를 조명한다. 전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은 서영해(徐嶺海·1902~?)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유럽 외교를 위해 길러낸 최초의 프랑스어 전문 외교관이었다. 서영해는 파리에서 언론과 저술, 국제회의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고, 유럽 사회에서 임시정부를 대표했다.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양국 외교의 출발점이었다면, 서영해는 식민지 시대에도 한국과 프랑스를 잇는 외교의 끈을 이어간 인물이었다. 그러나 해방 81주년을 맞은 오늘까지도 그의 이름은 낯설다. 그는 남과 북 어느 쪽의 역사에서도 온전히 기억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 역시 평생 친아버지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은 서영해의 손녀 수지 웡, 가족사를 추적한 오스트리아 작가 에리카 피셔, 그리고 그의 생애를 발굴해 온 정상천 작가의 증언을 바탕으로 유럽에서 한국 독립을 외쳤으나 역사에서 사라진 한 외교관의 삶을 되짚었다.

상하이에서 파리로

1920년 11월 6일, 프랑스 마르세유로 향하는 뒤메르(Dumer)호가 상하이를 출항했다. 배에는 약 200명의 학생이 타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유럽 유학 대상자로 선발된 한국인 청년 21명도 포함돼 있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지 10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듬해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는 중국인 학생들이 일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근공검학(勤工儉學) 프로그램을 지원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 지역, 즉 프랑스가 행정권과 치안권을 행사하던 구역에 자리 잡은 임시정부는 중국 측을 설득해 한국인 청년들도 이 프로그램에 참여시켰다. 서구의 학문과 언어를 익힌 이들이 훗날 독립국가 건설에 기여하리라는 기대에서였다.

학생들에겐 가장 값싼 선실이 주어졌다. 39일 동안 배 밑바닥의 해충과 쥐, 뱃멀미와 굶주림을 견딘 끝에 12월 13일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이튿날 기차를 타고 파리로 향한 이들 가운데 작고 왜소한 체구에 둥근 안경을 쓴 열여덟 살 청년이 있었다. 서영해였다.

당시 파리는 식민제국의 수도이면서 동시에 혁명과 공화주의, 반식민주의 운동이 교차하는 도시였다. 호찌민이 베트남 독립을 호소했고,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도 노동과 유학을 위해 프랑스에 머물렀다. 훗날 아시아 현대사의 주역이 된 이들과 비슷한 시기 파리에 도착한 서영해 역시 한국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는 긴 여정에 첫발을 내디뎠다.

유럽에서 한국을 대표하다

서영해는 1902년 부산의 약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고, 임시정부의 최연소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 됐다. 처음에는 미국 유학을 희망했지만, 임시정부는 그를 프랑스로 보내기로 했다. 그 배경에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의 뼈아픈 경험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뒤 열린 이 회의에서 한국 대표단은 공식적인 발언권조차 얻지 못했다. 임시정부는 국제외교의 언어인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한국의 독립을 세계에 알릴 인재가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여권이었다. 일본 식민지배 아래 한국인은 일본 정부가 발행한 여권 없이는 해외로 나가기 어려웠다. 독립운동가인 서영해에게 일본 여권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는 중국인 가정의 양자로 입적해 중국 국적과 여권을 얻은 뒤 프랑스로 향했다. 당시에는 독립운동의 길을 열어준 여권이었지만, 훗날 이 중국 국적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원인이 됐다.

파리에 정착한 서영해는 프랑스어를 익혀 임시정부의 주(駐)프랑스 대표로 활동했다. 그는 프랑스 언론에 기고하고 책을 펴내며 한국의 역사와 독립의 정당성을 알렸다. 유럽의 정치인과 언론인, 국제기구 관계자들을 만나 일제의 식민통치를 고발했다.

정상천 작가는 그의 역할과 위상을 “미국에 이승만이 있었다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었다”는 말로 설명한다. 1933년 서영해는 이승만의 국제연맹 외교를 돕기 위해 제네바에 동행했고, 두 사람은 약 5개월 동안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국 독립을 호소했다.

서영해는 단순한 민족주의자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유럽의 반파시즘 운동에 참여한 지식인이자 언론인이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관여하다 나치에 투옥된 것으로도 알려졌다. 여러 언어를 구사한 그의 능력이 연락과 정보 활동에 활용됐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국 독립은 그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지만, 그가 지키려 한 가치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으로 확장돼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서영해와 엘리자베트 바우어 부부 (1937년 파리)

서영해의 개인사는 20세기의 정치적 격변이 한 가족을 어떻게 갈라놓았는지를 보여준다. 1937년 그는 파리에서 오스트리아 출신 미술학도 엘리자베트 바우어를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1939년 초 파리를 떠나 빈으로 돌아갔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해 9월 엘리자베트는 아들 슈테판을 낳았다. 슈테판은 어머니가 재혼한 중국인 남편의 성을 따라 슈테판 웡으로 성장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시골에서 아시아인처럼 보이는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았지만, 어머니는 친아버지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서영해 역시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뒤인 1948년 서영해는 귀국해 경남여자중학교 교사 황순조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승만 중심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김구의 통일정부 노선에 가까웠던 그는 분단된 조국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해 부부는 프랑스로 가기 위해 상하이로 향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이 1949년 상하이를 점령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중국 여권 소지자였던 서영해는 자유롭게 출국할 수 없었다. 그는 아내를 먼저 부산으로 돌려보내고 뒤따라가려 했지만, 두 사람은 끝내 재회하지 못했다.

황순조는 재혼하지 않은 채 198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편을 기다렸다. 서영해는 상하이에 남아 임시정부 계열 학교인 인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현재까지 확인된 그의 마지막 모습은 1955년 인성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그 뒤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으로 갔다는 증언도 있지만, 시기와 경로, 이후의 삶을 입증할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평양 애국열사릉 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없다. 북한 체제에 비판적인 말을 했다가 숙청됐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추정일 뿐이다. 그의 무덤도, 죽음을 기록한 문서도 아직 찾지 못했다.


명함 한 장에서 되살아난 이름

서영해의 아들 슈테판, 3살 무렵 (1942년 8월 오스트리아)

서영해의 이름이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실종 이후 수십 년이 지나서였다.

1995년 조카 서정철이 정부에 서훈을 신청했고, 서영해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건국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본격적으로 발굴된 계기는 2000년 프랑스 외무부 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명함 한 장이었다. 당시 한불 관계를 연구하던 정상천은 문서 속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서영해’라고 적힌 명함을 발견했다.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그는 관련 자료를 모아 추적을 시작했고, 2019년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를 펴냈다.



한편 오스트리아에서는 서영해의 손녀 수지가 할아버지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 스테판은 친아버지가 한국인 기자 서영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표해 유럽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라는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2013년 세상을 떠났다. 이후 수지는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할아버지가 단순한 기자가 아니라 임시정부를 대표한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2018년 수지 왕은 한국 친척들의 초청을 받아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았다. 이후 서영해의 삶을 추적해 온 정상천과 한국의 가족들이 자료와 기억을 나누면서, 오랫동안 흩어져 있던 그의 생애와 가족사는 하나씩 복원되기 시작했다. 수지는 오스트리아 작가 에리카 피셔와 함께 서영해와 엘리자베트, 그리고 두 사람의 아들 스테판으로 이어지는 가족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 결과 2023년 독일어권에서 『수지 웡 이전의 세계』가 출간됐으며, 이 책은 2025년 한국에서 『수지가 만난 세계』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됐다. 그러나 서영해와 엘리자베트가 왜 헤어졌는지, 엘리자베트가 왜 아들에게 친아버지의 존재를 숨겼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서영해는 아들의 존재를 몰랐고, 아들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잊힌 외교관을 다시 기억하는 일

서영해의 삶은 한 독립운동가의 전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생애에는 식민 지배와 망명, 파시즘과 전쟁, 해방과 분단, 중국혁명과 냉전이 겹쳐 있다. 그는 중국인의 양자가 돼 중국 여권으로 프랑스에 갔다. 프랑스어로 한국 독립을 호소했고, 유럽에서 반파시즘 운동에 참여했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분단된 남한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했다. 다시 프랑스로 향하려 했으나 중국혁명에 가로막혔고, 상하이에 남은 뒤 행방이 끊겼다.

그처럼 언어에 능통했던 망명 지식인들은 외국어로 조국의 현실을 알리고, 지도와 외교문서에서 지워진 나라를 국제사회의 언어로 되살리려 했다. 그러나 독립을 위해 국경 밖에서 싸웠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해방 이후 냉전과 분단의 정치 속에서 다시 밀려났다. 이들은 기억 속의 나라를 품고 세계를 떠돌았던 한국 최초의 정치적 디아스포라였다.

수지 왕은 더 많은 한국인이 할아버지 서영해를 기억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인들도 아직 서영해를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그의 삶을 기억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의 꿈은 이 이야기가 언젠가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불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에서 다시 마주한 서영해의 이름은 양국 우호의 역사에 가려져 있던 또 하나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나라가 그와 그의 꿈을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라도 증명하는 일이다. 

출처: 강 월터 하나 Hannah Kang Wolter 인턴기자, 2026년 7월 31일,   <르몽드디플로마티크>(LeMonde Diplomatique) 

 

한·불수교 140주년에 만난 독립운동가 서영해 - 르몽드디플로마티크(LeMonde Diplomatique)

한불수교 140주년 특별전 「선물과 기록, 한국-프랑스 우정의 140년」이 6월 3일부터 8월 2일까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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