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이 있던 어느 사서로부터 청소년 인문학 강좌에 대한 제안이 들어왔다. 조금의 망설임 뒤에 바로 수락했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기회란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것은, 쓰고 읽어야 하는 계기들에 나를 접속함으로써, 그 부담 속에서 쉬지 않고 공부하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번다하지만 그 많은 청탁들에 쉬이 응하곤 하는 것이다.
인문학이란 지식의 전체주의적인 통합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의 연대와 교섭이다. 그래서 첫 책으로 최재천 교수의 <<통섭의 식탁>>을 골랐다. 백양산 자락 어딘가에 있는 구포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마치 등산을 하는 것처럼 유쾌했다. 토요일 아침 도서관 앞마당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은 한가로워 보였고, 나도 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약간의 설렘까지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강의실에서 들어갔고, 나는 그렇게 처음 만난 아이들과 서로 다정하게 상봉했다.
최재천 교수는 스스로를, 시인을 꿈꾸다 동물행동학을 전공한 생물학자로 소개한다. 자기의 근본이 통섭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통섭(統攝)은 저자의 지도교수였던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 'consilence'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든 조어다.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건너기 힘든 장벽에 대해서는 C.P.스노우의 <<두 문화>>가 이미 고전적인 견해를 내 놓지 않았는가. 굳이 기존의 문제의식을 마다하고 신조어를 유통하는 데 대한 여타의 정치적 견해들에 대하여, 저자는 여러 차례 그 이유를 해명하곤 했다. ‘통합’이 물리적이라면 ‘융합’은 화학적이고, 그러므로 자기는 살아 움직이는 학문 간의 소통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으로 생물학적인 ‘통섭’을 제안하는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비빔밥을 예로 들며 우리가 통섭에 능한 민족이라고 설명한 대목에 이르면, 그의 통섭 개념이 유기적인 전체의 조화를 소망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예감하게 된다.
56권의 저작에 대한 감상과 단평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개의 책들은 동물 생태에 대한 것으로 집중되어 있지만, 때로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저술도 포함되어 있다. 책의 구성은 서양식의 서빙 순서로 유기적으로 짜여있다. 유기적 전체의 서술은 ‘생명사랑(biophilia)’의 실천을 통한 종 다양성의 보존이라는 저자의 생각으로 수렴된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한 개발과 성장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교란하는 데 대하여, 생명 존중과 지속 가능한 삶이라는 테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응대한다. 그래서 저자는 인간의 교만함을 드러내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을 버리고, 공생과 협동의 삶을 지향하는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로 거듭날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이 모든 주장을 “다른 생명에 대한 사랑이 곧 나를 사랑하는 길”이라는 문장에 고스란히 담았다.
책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표현이 둘 있다. “가장 훌륭한 공부는 공부하고 있는 줄 모르면서 배우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알면 사랑한다”라는 문장이다. 인간의 교만함을 반성하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무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그것이 앎에서 사랑으로의 비약에 담긴 참뜻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처럼, 나도 모르게 알아가는 기쁨 속에서, 앎은 지식의 축적을 통한 주체의 오만이 아니라, 세계(생명)에 대한 겸허한 사랑으로 따뜻해진다. 그런 앎의 과정 가운데, 우리는 개미와 벌과 침팬지 같은 군집 동물들의 생태로부터 사랑과 정치의 어떤 이치를 생각하고, 이타적인 행위의 심연에 자기를 위한 이기적 동기가 있음을 배운다. 배움의 길엔 응당 앞서 간 선각자들이 있기 마련인데, 인간과 동물의 우정과 교감을 감동적으로 보여준 제인 구달이나, 종의 보존이라는 DNA의 작용을 해부한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누구보다 생물학적 앎의 위대한 선각자로 다윈을 맨 앞자리에 놓는다. 비글호를 타고 위대한 앎의 여정을 떠나, 드디어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꽃피운 진화론, 그것은 ‘자연 선택설’과 ‘성 선택설’로 구체화되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이란 결국 환경에 적응한 하나의 개체일 뿐이며, 이런 상대적 인식 안에서 자연 생태계의 모든 종은 질적으로 평등하다. 나아가 저자는 인간이 자연에서 배워야 함을 역설한다. 자연을 모방하고 흉내 내는 학문으로서의 ‘의생학(擬生學)’이 그것이다.
최재천 교수의 글은 쉽고도 투명하다. 아마, 사유보다는 사례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대목도 적지 않다. 하지만 조화와 공생의 정신에 투철한 그 생태적 사유에는, 미시적인 생존투쟁의 참혹함에 대한 주의가 결여되어 있다. 생명이라는 것을 너무 거시적인 관점으로 보면, 구체적인 실감을 놓치고 일종의 관념으로 추상화된 이념으로 기운다. 그러므로 자연과 생명의 문제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거시적 시야와 함께 조화 불가능한 실태에 대한 냉정한 감각의 수양이 필요하다.
강의는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겼다. 이어서 질의응답이 있었고, 한 학생이 ‘과학의 대중화’와 다른 ‘대중의 과학화’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질문했다. 최재천 교수는 카이스트의 정재승 교수와 더불어 한국에서는 꽤나 명망 있는 과학 저술가다. 본문에서 그는 과학의 대중화를 빌미로 과학에 물을 타서는 안 된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과학의 대중화를 과학의 통속화와 구분하고 있다. 이런 자의식은 충분히 필요한 것이고, 따라서 학생의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이렇게 설명했다. 어려운 과학적 지식을 대중들의 눈높이로 낮추어 전달하는 것이 과학의 대중화라면, 대중의 과학화란 대중들의 눈높이를 과학의 심층 지식으로 끌어올리고 그들의 삶 속에서 과학적 사유를 실천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그렇게 서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또 시간이 한참 흘러버렸다.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언제나 진정으로 즐거운 일이다. “가장 훌륭한 공부는 공부하고 있는 줄 모르면서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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