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정지우 연출, 2012)는 나쁜 영화다. 박범신의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으므로 그것과의 관련성을 말 할 수는 없다. 다만 은교는 베아트리체가 아니고 그러므로 노시인 이적요는 단테가 아니다. 은교는 그저 어린 소녀고, 그래서 늙은 이적요는 청춘의 시간을 그리워하며 절망할 뿐이다. 그래서 영화는 그저 그런 일종의 탄로가(歎老歌)로 전락한다. “늙는다는 건 이제껏 입어본 적이 없는 나무로 만든 옷을 입는 것이라 시인 로스케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는 벌이 아니다......” 결국 영화는 예술의 영원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동경을 외면하고, 육체의 노쇠라는 그 유한성에 편파적으로 집착한다. 그리하여 영혼에 대한 고담준론을 피하는 대신, 내러티브의 흐름은 젊은 육체에 대한 애착으로 집요할 뿐이다. 카메라의 동선은 게걸스럽게 은교의 몸을 훑기에 바쁘고, 그렇게 은교는 영화에서 시종 풋풋한 몸뚱이로 전시된다. 연출의 이런 불미함이 은교라는 인물을 성격 없는 육체로 만들어버렸다.
유한한 생명의 세계에서 넘치는 활력의 시간인 청춘은 아름답다. 그러나 몸에 대한 에로스로 축소된 청춘, 그 애욕에 달뜬 이적요는 치정의 번뇌로 고달플 뿐이다. 이런 번뇌 속에서 은교는 다만 관능적인 육욕의 대상이고, 제자 서지우는 연적이나 다름없다. 이런 가운데 극중의 소설 <은교>는 예술과는 무관한, 치정극의 서스펜스에 봉사하는 하나의 소품에 불과하다. 이렇게 이 영화는 문학을 저급하게 사물화한다. 이적요가 때때로 펼쳐 읽고 있는 시집은 그 유명한 문지시선이고, 서지후가 스승이 쓴 <은교>의 원고를 도적질 해 발표한 매체는 <<문학동네>>의 2011년 가을호다.(박범신의 장편소설 <<은교>>는 문학동네에서 발간되었다.) 서지우는 이 작품으로 문단의 인정을 받고 상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문학사상에서 주최하는 제35회 이상문학상이었다. 그리고 이적요가 서지우를 대신해 써 준 <<심장>>이라는 소설은 80만부가 넘겨 팔렸고, 극중에서 서지우는 그것이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에서 다 1등을 했다고 소리 높여 외친다. 이런 고유명은 상품명에 다름없으며, 소녀의 몸이 볼거리가 되는 것처럼 문학은 여기서 저 유명한 브랜드들의 후광을 받으며 매혹적인 상품으로 소재화되었다.
이적요와 서지우, 그러니까 사제 간의 그 ‘영향의 불안’(해롤드 블룸)에 대한 이전투구는 그나마 이 영화에서 볼 만한 장관이다. 예술은 홀로 이룩하는 역사다. 그래서 예술가는 언제나 심심한 고독 속에서 괴롭게 희열한다. 그 지독한 외로움이 제자를 받아들여 키우게 하고, 스승을 떠받들어 모시게 한다. 그러나 모든 제자는 언제나 저 네미 숲의 황금가지로 스승의 등을 찌른다. 그러므로 존경과 애정으로 단단한 사제의 정이란, 늘 그렇게 파탄 날 운명을 숨기고 가증스럽게 따뜻하다.
영화를 보기 전, 사실 나는 <은교>에게서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을 기대했다. 물론 그런 일방적인 기대는 폭력적이고 또한 무례하다. 하지만 <은교>는 지극히 피상적으로 젊은 육체에 대한 갈망을 표현할 따름이었고, 그리하여 영원한 청춘의 꿈은 무망한 것이 되고 말았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부터 에로스(eros)는 영원한 청춘에 대한 동경이었다. 에로스는 ‘나’의 유한성을 초극하는 영원불멸에 대한 동경이다. 그러므로 에로스의 대상(타자)은 ‘나’의 영원불멸을 위한 매개적 존재다. 그렇게 주체는 타자를 동일성의 힘으로 끌어안는다. 낡고 진부한 것은 예술일 수 없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늙은 작곡가 아센바하의 한 소년에 대한 동성애적 정념은, 예술의 영원성으로 자기의 유한성을 초극하려는 형이상학적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그 영화의 비극적인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기억 속에서 생생하다. 그러나 <은교>는 쉽게 망각되고 말 그런 영화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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