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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읽는다는 것의 위대함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4. 29.

읽는다는 것의 위대함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Reviewed by  엘뤼에르


                

                         주말에는 꼭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꼭 한 편씩을 관람해야만 하는 엘뤼에르 편집자는 오늘, 톰 크루즈와 모건 프리먼 주연의 <오블리비언>을 보고 왔습니다. 그저 그런 SF영화겠지 하고 치부할 뻔 했는데,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트릭처럼 숨겨진 교묘한 종교 비판과 함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읽기’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대목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극중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고뇌하는 주인공 잭 하퍼(톰 크루즈)가 세계의 의문을 품기 시작하는 계기가 바로 고대 로마시대의 책의 한 구절을 발견하면서부터인데요. 핵전쟁으로 지구가 파괴되어도 단 한 권의 책이 남아 있다면, 인간은 과거의 역사를 그렇게 배우고 기억한다는 데서 저는 굉장한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어쩌면, 제 자의적인 해석일지도 모르겠네요. 좋은 영화의 기준은 영화가 끝난 다음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거라고 누가 그랬던가요.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영화가 끝나자 복잡한 감정으로 등장인물들의 사유와 고민의 접점, 그리고 그들의 세계와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속의 연결고리들을 분석하기에 바빴으니까요. 고양된 마음을 안고 흥분해서 친구들에게 이 내용을 설명하려던 찰나, 정리되지 않은 논리들로 이 흥분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글로 ‘씁니다’.





                

                        지난 4월 23일은 세계 책의 날이었습니다. 책을 읽는 이들에게는 각종 이벤트를 통해서 지자체나 서점, 출판사에서 많은 행사를 하기도 했는데요. 사실 ‘책의 날’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이런 날을 통해서라도 책읽기를 강권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 탓을 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편집자랍시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탓하며 매일 투덜거리는 저조차도 그리 책을 많이 읽는 편은 못 되니까요. 게다가 편협한 독서력하며 어렵다싶은 책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으니 말입니다^^;;(교양서 위주로 읽다보니 편집자로서의 한계에 부딪히는 요즈음입니다. 책을 꾸준히 읽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재미에 살고 있기도 하고요.)

                        사실, 중요한 것은 책 읽기를 자연스레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사회에 있다고 보는데요. 최근 한 어린이 책읽기 프로그램의 소동을 보다보니 아이들이 책을 싫어할만한 요소가 이런 데 원인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도 중고등학교 때 억지로 읽었던 책들은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거든요. 물론 그중에도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처럼 잊지 못할 책도 있기도 합니다.(독서경시대회 때문에 억지로 읽었던 책이었지만,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는 책이네요.^^)

                       그러다 어떤 분의 추천으로 읽게 된 일본의 떠오르는 지식인,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제게 있어 굉장히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책의 날을 전후해서 읽었기 때문일까요.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기도 했고요.




                1. 읽는다는 것 - 불가지의 영역을 ‘읽다’

그는 신도, 신인 것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책을, 바로 책을 추구합니다.(p.134)


                       무함마드를 알고 계시나요? 아니, 마호메트는 알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바로 이슬람교의 선지자입니다.(마호메트는 미국식 발음법이고 아랍어의 발음에 가까운 표기법은 아무래도 무함마드라고 하네요.) 예수처럼 이슬람교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기는 하나, 그는 ‘신’으로 격상되지도, 스스로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단지 이슬람 경전 ‘꾸란’에 나오는 200여 명의 선지자 중 한 사람일뿐이니까요. 선지자 중에는 기독교에도 나오는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 솔로몬, 심지어 예수까지도 모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갑자기 웬 종교 이야기냐고 해서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으나, 여기에서 바로 책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의 의미가 바로 ‘읽기(Kuran)’이며, 대천사가 한 신의 계시가 바로 ‘읽어라(iqra)’라고 합니다. 읽는다는 것의 의미가 경전에서까지 드러나는 대목인데요. 사실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 내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읽기 혁명’에 관한 부분입니다.

                       무함마드는 사실 문맹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꾸란은 어떻게 쓰여진 걸까요? 읽을 수 없는 무함마드는 어쩔 수 없이 들리우는 천사의 목소리를 결국 쓰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붓을 들고 글을 '썼습니다'. 이처럼, 무함마드는 이슬람교의 최후의 예언자입니다.(p.132) 최초의 신의 말―책의 원전이겠네요―을 최후의 예언자가 ‘읽어냄’으로써, 이제 온전한 신의 말은 ‘불가지의 것’이 되고 맙니다.

                       책을 편집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가 가지고 있는 온전한 최초의 ‘아이디어’는 책을 편집하는 도중 정교하게 다듬어지면서 책이라는 하나의 ‘물성’으로 탄생하게 되지요. 독자들은 저자의 생각을 온전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읽기’라는 것은 언제나 오독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으로 인해서 ‘읽기’라는 행위가 아름다운 것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저자’가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사유를 저자의 텍스트를 읽는 ‘독자’가 받아들이고, ‘독자’는 훗날 제2의 ‘저자’가 되면서 책은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책은 단순한 종이라고 치부해버리기 곤란한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저는 단언하고 싶습니다.




                2. 피의 역사가 담긴 책 ‘읽기’

읽고 쓰는 것 때문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었던 날들―그것은 역사상 실로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나날, 우리의 장소가 다소라도 그런 자유를 주고 있다는 것은 실로 기적이라 부를 만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뻔한 소리는 그만두고 이를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지켜내야 합니다. 아시아 중에서라도 다소라도―다소라도입니다―언론의 자유가 지켜지고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습니다. (p.117)


                       어쩌다보니 책을 편집하고,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책을 읽네마네 하면서 투덜대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문화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편집회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의문은 망각한 채 살았던 것 같습니다. 불과 10여 년 전만해도 우리는 ‘자유’도 ‘민주’도 아닌 허울뿐인 ‘자유민주공화국’에 살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글을 쓴다는 행위만으로, 글을 읽는다는 행위만으로 잡혀 들어가고 감옥행에 처하고, 심지어 사법살인을 당하기도 했었던 제가 소상히 알지 못하는 우리 나라의 ‘한 역사’가 분명 존재했습니다.(따라서 그 시절을 소상히 모르는 제가 어줍잖게 이렇게 얄량한 지식으로 타이핑하고 있는 게 부끄럽기도 합니다.)

                       앞서 말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담긴 작은 비화만 말씀드리자면, 조세희는 직설적으로 노동자의 삶을 그려내고 싶었다지만 동화같이 비꼬아 그려냄으로써 당시의 출판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나라는 언론출판의 자유가 부재했던 국가였습니다.

                       이 책에 언급된 마르게리트 포레트가라는 여성 또한 금서를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단자라는 선고를 받고 화형에 처합니다. ‘읽고 쓴다’는 행위가 이처럼 ‘광기’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역사로 배운 셈입니다. 그럼에도 그 소중함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집에 쌓아두기만 한 책들을 바라보니 저절로 눈물이 흐르고 마네요. 예수는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에게 마치 펼쳐진 책처럼 될 것이다’라고요. 종교를 떠나, 성경책도 참 재밌는 책입니다. 한 편의 대서사시와 같은 그네들을 삶이 담긴 책―성경을 뜻하는 영어 Bible도 ‘책들’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요―또한 ‘펼쳐진 책’처럼 말이 다할 수 없는 깊은 ‘삶’을 ‘읽기 혁명’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3. 책은 사라지지 않는다- 종언은 없다

                      모두들 무언가가 조금씩 끝난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서 쑥대밭이 될 것처럼 언론에서 호들갑이고, 일본인들은 이미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3·11 대지진 이후로 급속히 황폐해져 있습니다. 이러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일본인의 삶이 일본인인 저자에게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꼭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사뮈엘 베게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언급하며 ‘공생’을 설파합니다.

                      오늘 봤던 영화 <오블리비언>에서도 핵무기로 인해 황폐해진 지구가 나타납니다. 희망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고 사지도 않고 언젠가는 종이책은 박물관에서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냐고 자조하는 출판계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책을 읽는 사람이 있는 한, 읽는다는 소중한 행위를 위해서 목숨 바쳤던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한, 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나무밑에서 오지 않는 고도를 한없이 기다렸던 것처럼, 저도 고도를 믿어보려고요. 그들이 오지도 않는 고도를 기다렸듯, 저 또한 여전히 책을 아끼고 사랑할 ‘독자’를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포스팅을 쓰다보니 어느덧 월요일이네요. 오늘도 활기찬 한 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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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10점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자음과모음(이룸)


**함께 읽으면 좋을 산지니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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