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50주기 공동 출판 프로젝트]
'너는 나다'
당신이 곧 나이기 때문에
어느 돌멩이의 외침
인턴 최예빈
어느 때나 한 시절을 풍미하는 책들은 자연히 시대정신과 그 배경을 담기 마련이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잉게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제각각 장르도, 결도, 국가도 다르지만 내게는 모두 한국의 7-80년대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해주는 책들이다. 이제 여기에 한 권이 더해진다. 바로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다.
이 책의 이름을 처음 알게된 것은 학부 때(졸업을 못했으니 지금도 학부지만…) 한창 교지를 만들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20세기 후반 이념전쟁을 그대로 거쳤던 대학잡지는 재밌는 구석이 많았다. 재고로 쌓여있던 90년대 출간 교지들을 읽어보면 NL이니 PD니, 지금의 대학생으로선 뜻모를 단어들이 가득했다. (표지에는 빨간색으로 ‘극우반동분자구독금지’ 딱지가 붙어있었으니, 말다했다.)
그때 그 낡은 교지를 펼쳤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다.
그렇게 외워둔 제목을 3년이 지나 산지니 인턴을 하면서 다시 마주쳤다.
유동우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어느 돌멩이의 외침>은 노동문학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한때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였던 이 책은 당시 공안에게 금서 처분을 당하면서 대화출판사, 청년사 등 출판사를 달리하여 출간되었다가 정지되기를 반복하는 수난을 겪었다. 90년대 초 청년사 판본을 마지막으로 유통되지 않았던 <어느 돌멩이의 외침>은 2020년,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기획된 공동출판프로젝트 '너는 나다'를 통해 다시 세상에 나왔다.
저자 유동우는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공장노동을 시작한다. 70년대 노동환경은 열악하기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저 끼니를 챙겨주는 것에 감사해야했던 ‘함빠’생활은 노예노동에 가까웠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자아를 강하게 갖고 있던 유동우는 기업의 이런 횡포와 착취를 묵과할 수 없었다. 저자는 결국 여러 각성과정을 거쳐 70년대 초, 인천의 삼원섬유에서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사측의 방해공작과 어지러운 시대상황 탓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저자는 마침내 ‘외국인투자기업은 노조를 설립하지 못한다’는 묵계를 깨고 삼원섬유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어낸다. 부평공단 최초의 노조였다. 이제 삼원섬유의 종업원들은 노조를 통해 근로자가 아닌 '노동자'로서의 의식을 각성하고,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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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은 도미노처럼 작용한다. 한번 고취된 의식은 전방위적 감각을 일깨우고, 여성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여성’으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게 했다. 노동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형식의 억압과 지배구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공장 노동자의 절대 다수가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에 비해 못한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공임이 적은 가공부에 소속되었으며, 그마저도 깎이기 십상이었다. 적은 임금에 쪼들리던 여성들은 다방과 술집으로 '부업'을 나가는 등 사실상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 실정이었으나, 초기 노조의 설립을 주도하고 간부직을 도맡은 것 또한 모두 남성 노동자였다.
그랬던 여성 조합원들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아가면서 저항의 원리를 터득하고, 자신들에게 내재되어 있던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차츰 깨뜨려간다. 자발적으로 공부모임을 조직하고 사회문제에 대해 토론하면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남성의 보조자가 아닌 책임자로 스스로를 위치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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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남자한테 좀 맞았기로서니 뭐가 그리 큰일이라고 <;;
노조 내에 만연했던 여성폭력을 지적하는 유동우의 통찰은 후일 드러나는 100인위 사건 등을 떠올리게 하며 뼈아프게 다가온다. 당시 운동권에서는 반집행부적 성향의 여성 노동자를 어용으로 몰아 운동에서 배제하고, 운동권 내부에서 일어난 성폭력을 사측의 사주로 명명함으로써 일축시켜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노동해방이라는 '대의' 앞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사소한 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저자의 지적처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기본적 원리가 남녀관계에 적용될 수 없다면 노동조합 또한 아무 의미가 없다.
유동우는 삼원섬유 노조를 설립하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회사로부터 해고를 당한다. 즉각 반발하며 조합원들과 함께 부당 해고에 항의하지만, 결국 경찰에 구속되며 취업 금지 대상자 명단(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을 원천봉쇄 당한다. 이후 재야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조직하는 일을 이어나가지만, 전민노련 사건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구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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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떠나며 동료들에게 남긴 저자의 말은 '너는 나' 프로젝트의 정신을 관통한다. 당신이 곧 나라는 연대의 정신. 우리가 유니온을 만들고 코뮨을 상상하는 것은 내가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다. 타인의 고통을 좌시하고 있을 수 없기에 하는 일이다. 당신이 나이며 내가 당신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여기에 희망이 있다. 돌멩이의 외침은 바위가 되어―어떤 노랫말처럼―마침내 올 해방세상 주춧돌이 된다.
전태일 50주기 공동 출판 프로젝트 '너는 나다' 시리즈
어느 돌멩이의 외침 - |
스물셋 - 이종철 지음/보리 |
읽는 순서 - 노정임 지음, 김진혁 그림/아자(아이들은자연이다) |
태일과 함께 그늘을 걷다 - 강성규 지음/한티재 |
작은 너의 힘 - 조영권 지음, 방윤희 그림/비글스쿨 |
우리들은 정당하다 - 뤼투 지음, 고재원.고윤실 옮김/나름북스 |
무조건 기본소득 - 다비드 카사사스 지음, 구유 옮김/리얼부커스 |
JTI 팬덤 클럽 - 김인철 외 지음/북치는소년 |
노동인권수업을 시작합니다 - 양설 외 지음/(주)학교도서관저널 |
여기, 우리, 함께 - 희정 지음/갈마바람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 김원 지음/이매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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