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스펙트럼 03
병이나 죽음이라는 단어는 아직 나와는 멀다고 생각하며 일상을 산다. 하지만 그것은 암 선고를 받기 직전까지 작가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런 단어들이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누구에게 다가올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암에 걸린다면? 내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가 암에 걸린다면? 평소에는 해보지 않았던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동시에 이 책은 내가 암에 걸린다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지에 대해 좋은 지침서가 됐다. 의미 없이 연명하며 살지 말기, 풀지 못할 문제에 빠지지 말기, 몸 건강을 챙기듯 정신건강도 챙기기. 암에 걸리면 작가처럼 이겨내자며 마음속에 꼭꼭 새긴 문장들.
책을 다 읽고 천천히 다시 보니 암에 걸리지 않은 지금의 나에게도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아… 병에 걸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평소처럼 열심히 나를 아끼고 살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병에 걸렸어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삶도 있고 준비 없이 별안간 맞이하게 되는 죽음도 있다. 많은 줄 착각하고 허비하지 말고, 적다고 생각하고 놓아버리지 말고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나가야겠다.
몸이 힘들면 정신도 따라서 불안정해지고 그런 사람과의 관계는 몸과 정신이 건강한 사람을 대하는 것보다 훨씬 난도가 높아진다. 혼자 사는 친구가 바쁜 일에 지쳐 방안에 박혀서 이런저런 잡생각을 잔뜩 하며 우울을 키우던 때가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밤을 새우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을 수없이 하고 풀 수 없는 문제에 깊숙이 빠져들어 정신건강이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그때의 그 친구는 누구보다 예민하고 깨지기 쉬운 사람이었고, 그런 자신이 나쁜 사람 같다고 느끼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러한 특징들은 그 사람의 타고난 천성이 아니라 상황에 의해 만들어지는 일시적인 상태였다. 나와 친구들은 여러 가지 예민함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옆을 지켰다. 이후 친구는 우울감을 극복해냈고 지금 누구보다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성실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내가 누군가의 행동이나 태도에 대해 비판하고 있으면 엄마가 자주 해주던 말이 있다. “나쁜 사람이라기보다는 나쁜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 이 말이 처음에는 이해도 안 되고 왜 그런 사람 편을 드나 싶어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은 바뀌었다.
내가 원래 알던 그 친구는 대책 없을 정도로 해맑고 단순한 친구였지만 바뀌는 상황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그 친구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나아지면서 그때와는 또 다른 사람이 되는 친구를 보고 엄마의 말에 동의했다.
몸 상태가 안 좋으면 정신도 쉽게 우울해질 수 있다. 컨디션 난조로 인해 예민해지고 쉽게 짜증을 내거나 서운함을 느끼면서 그런 내 모습에 또 속상해지는 악순환. 그런 때에 저 말을 생각하면서 서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난 원래 못되고 예민한 사람이 아니야. 지금 상태가 그런 것뿐이지.’ 또는 ‘저 친구도 지금 힘들어서 그렇지 저게 본모습은 아니야.’ 그렇게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것이 우리 관계를 유지해 주었다. 그렇게 태풍을 이겨낸 관계는 내가 몸이 힘들어 예민해졌을 때 친구도 날 이해하고 기다려줄 것이라는 신뢰도 생겨났다.
여기서 얻은 또 하나의 교훈은 사람을 쉽게 손절하지 말자는 것. 요즘은 나를 지키기 위해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들과는 관계를 정리하라는 조언이 많다. 하지만 그 사람이 단지 일시적으로 상태가 나빠 그 태도에 내가 상처받는지도 모른다. 과거에 소중했던 추억이 있는 사람,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쉽게 관계를 포기하기보다는 가만히 기다려주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한 번도 몸이 아프지 않고 살다 가는 삶은 없지 않을까. 이 책의 내용은 언젠가는 나에게도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한다. 병을 얻게 되는 그날에도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내 삶을 놓지 않고 살아갈 용기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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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암이지만 비키니는 입고 싶어 - 미스킴라일락 지음/산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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