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의 신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았습니다. 아주아주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영화는 후기를 아니 쓸 수 없지요.. 약간의 스포일러와 함께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얘길 하고자 합니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아내는 정성스럽게 가꾼 정원과 집에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벽을 가리기 위해 손수 식재한 포도나무, 직접 만든 수영장과 간이 미끄럼틀, 꼼꼼하게 칠한 벽지 등 하나하나 자신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내는 남편의 전근으로 사택을 비워야 하는 상황이 되자 화를 냅니다. 그리고 집을 지키기 위해 남편만 오라니엔부르크로 전근 보냅니다. 가족이 떨어져 살던 어느날 루돌프가 가족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루돌프가 가족이 있는 그곳으로 다시 발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루돌프는 기쁜 마음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이번 작전에 자신의 이름이 붙여졌다며 자랑스러워합니다.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루돌프는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홀로 보내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집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가족들의 평화로운 일상에는 고함소리와 총소리, 폭발음, 그리고 굴뚝에서의 검은 연기가 끊이질 않습니다.
아이들이 노는 강가에는 사람의 아랫턱이 나오고, 아이들은 금니를 가지고 놀기도 합니다. 유대인 학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 회스는 아내가 집에서 계속 살 수 있도록 상사에게 간청합니다. 어머니에게 자신이 꾸민 집을 자랑스레 보여주던 아내는 유대인에게서 빼앗은 옷을 입는 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단란한 가정, 아름다운 집. 과연 악은 무엇일까요?
영화는 유대인 학살 현장을 다루지만 잔혹한 장면은 없습니다. 영화는 간접적으로만 보여줍니다. 음향, 대화, 연출로만 끔찍한 일을 들려줍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정답게 뛰어노는 정원 바로 뒤에 유대인이 박해받고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평화로움 속에 위화감은 켜켜이 싸이고, 회스는 헛구역질을 하고 어두운 계단을 내려갑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를 떠올렸어요. 하나는 폭력적인 소재를 다룬 영화의 태도와 자세. 다른 하나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입니다. 잔혹한 사건을 다룬다고 영화도 그러해야 할까라는 데 항상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요. 이 영화는 제게 아주 좋은 답을 주었습니다. 보여주지 않는 게 더 끔찍할 수 있다고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죠.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악'이 그가 악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은 데서 생겨났다고 말했습니다. 아이히만은 그저 명령을 '잘' 수행했을 뿐이라고요. 영화도 그러합니다. 회스는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일을 제외하면 평범한 가장입니다. 하지만 그가 무고하다고,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너는 왜 그런 행동을 하니?"
"나도 모르겠어! 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어. 난 그냥 남들을 따라 했던 거야."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너에게 그런 행동을 하도록 강제하는 끈은 어디에도 없었어"
"나는 법을 따랐을 뿐이야." 그는 자신을 정당화할 서류 더미들을 책상에서 꺼내며 분명하게 말했어요.
어른 한나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 보였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당신의 '말'이 없었던 거죠? 미리 준비된 서류의 언어 말고 당신의 말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거죠? 당신 정말 소름 끼치게 진부하네요!"
<한나 아렌트의 작은 극장> 중에서
한나 아렌트는 상투어(법, 명령 등)를 핑계로 사고하지 않는 사람들의 심리에서 '악'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악이 평범하다고,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악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악'은 사유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일차원적인 생각, 깊이 없는 사고로 악이 생겨난다고요.
영화에는 노역을 살고 있는 유대인에게 도움을 주고자 어두운 밤, 몰래 노역 현장에 사과를 심어두는 소녀가 등장합니다. 소녀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영화로 한나 아렌트에게 관심이 생겼다면 <한나 아렌트의 작은 극장>을 추천드려요. 개성 있는 그림을 통해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쉽고 재미있게 담고 있거든요. 동화책이라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일반 독자들 모두 한나 아렌트에 다가갈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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