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신진 시인은 5년 만에 신작 시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를 출간했습니다. 시집에서 신진 시인이 주목했던 것은 ‘경험’인데요. 수사와 상상력으로 채워진 언어가 아닌 구체적인 언어로 일상을 포착하고, 삶의 철학을 역설의 단어로 풀어냈습니다. 경남매일신문의 하영란 기자가 저자의 의도와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를 소개했습니다.

책과 생각 넘기기 52
신진 시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인생 철학이 녹아 있는 시인의 잠언집
머리맡에 두고 읽으면 마음이 닦여지는 시
"시 쓰려거든 시 쓰지 마라."
수많은 시집들이 앞다퉈 봄날 꽃 피듯이 피어 출판되고 있다. 곁에 두고 읽을 시집도 많겠지만 유독 한 시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신진 시인의 시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2024, 산지니)다. 이 시집은 마치 잠언집 같다. 읽어나가다 보면 한국적 리듬을 살려 쓴 시구들이 살아서 가슴으로 뛰어든다. 시어가 살아 있다. 죽어 늘어진 언어를 쓰지 않는다. 지나친 비유어를 쓰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절제된 인생관이 녹아 있다. 노(老)시인의 인생 철학을 잠언집으로 엮어낸 것 같다.
시집을 한 곳에 두고 틈날 때마다 몇 편씩 읽었다. 읽으면 힘이 솟는다. 힘이 솟는 이유는 공염불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 경험하고 경험 속에서 우러나온 곰탕 같다. 따뜻한 곰탕을 한 그릇 밥을 말아 먹으면 이마에 땀이 나고 뭔가 하고 싶은 기운이 난다.
시는 먼저 가슴을 쳐야한다. 가슴으로 들어오는 시어들이 시편들이 읽는 이를 움직이게 해야 한다.
신진 시인의 시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는 간결하다. 읽으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아, 그렇구나' 하는 공감을 이끌어낸다. 솔직하다. 솔직한 말들은 우리에게 지나친 이상 세계에 빠져서 자신을 괴롭히며 살기를 원하지 않는 시적 화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비우고 산다는 말, 분에 넘는 수사(修辭)이다/정작 비워내고 나면 제풀에 앉고 서기나 하라//애써 버리고 비우고자 한들/심지 없는 램프불이 불이 아니듯/탄력 잃은 고무줄이 고무줄이 아니듯/숨탄 것 숨통인 이상 마냥 비워지지는 않으리//나무는 가진 잎 다 떨어낸 겨울에사 몸빛 밝힌다지만/발가벗은 나목이라야 나무이든가/벋을 데 벋고 맺을 데 맺은 여름의 성장(盛粧)/온갖 잡벌레 먹고 싼 세월이 나무의 면목인 것을//비우지 마라, 그득 찬 미혹과 허세/쏟아놓다 남의 길막이나 될라/미련도 허물도 안고 구르다 보면/물 내도 분(糞) 내도 구색 맞춰 헤살대며 다가올 것인즉(이하 생략)
-「비우지 마라」
'마음을 비워라'라는 말이 항상 유행어처럼 우리의 주변을 떠돈다. 그러나 비우고 산다는 말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말처럼 쉽지가 않다. 비우고 싶어도 마냥 비워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관념적인 현실 인식이 아니라 두 발로 땅을 딛고 땅을 일구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시적 화자를 만난다. 뜬구름 잡는 소리로 자신도 실천하지 못할 말을 이상에 취해서 하지 않는 것이 이 시집의 매력이다.
걷지 못하고 나앉아 있는 슬픔을 지날 때에는/걷는 슬픔이여 너도 잠시 멈추었다가 가라/너도 슬픔이고/못 걷는 슬픔이었지 않느냐?//못 걷는 슬픔에게 예를 갖춘다 해서/금세 일어나 걷기야 하겠냐마는/지나가던 슬픔이 걸음 멈추고 다독이는 동안/그도 매무새 추스를 수 있을 것이니//(…)//언제 비 오지 않는 날 있더냐/아침곁에 한 식구/서로 얼굴 살핀 후에 제가끔 길을 나서듯/걷는 슬픔이여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에는/잠시 등짝 다독이며 얼굴 살피다 가라//비 맞지 않는 자 어디 있더냐/슬픔이 슬픔을 잊지 않고 우산그늘 나눌 때/못 걷는 슬픔도 멈춤/그 다음 동작을 기억하려니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걷는 슬픔이여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에는/잠시 등짝 다독이며 얼굴 살피다 가라'는 이 시구절이 가슴으로 들어와서 몸의 핏줄을 타고 흘러 마음의 온도가 절로 올라갈 것 같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살피'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할 수 있는 배려다. 거창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을 시적 화자는 요구한다. 거창한 배려가 아니라 그 사람의 안색을 살피며 '등짝을 다독이'며 인생길을 같이 가는 것이다.
내 집 지키고자/남의 집을 턴다/남의 집 터는 동안/내 집 털린다//남의 집 터는 궁리를 지혜라 하고/내 집 털리는 짓을 양심이라 하고/털고 털리는 품앗이를/경제라 한다//경제와 지혜와 양심의 바퀴 굴리기/그 짓을/요새는 자아실현이라고 한다//
-「자아실현」
'자아실현'을 '경제와 지혜와 양심의 바퀴 굴리기'라고 시적 화자는 말한다. 자아실현은 자아의 본질을 완전히 실현하는 일이다. 이것은 어쩌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숭고한 목적은 없어지고 경제적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는 성취가 '자아실현'이 돼 버린 씁쓸한 현실을 보여준다.
신진 시인의 시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는 우리가 현시대를 살아가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이고 그래도 우리 가슴에 품어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를 자문하게 한다. 지나친 감상에 빠져 읽고 나면 뭔가 허무해지는 시집이 아니라, 읽고 나면 새로운 가치의 삶을 생각하게 하는 목소리가 함축돼 있다.
시 쓰려거든/시 쓰지 마라//시는 이미/사방에 널려 있다//시를 쓰노라면/시를 날리고 마느니//시를 쓰겠다면 시를 버려야 하고/시를 만나자면 시를 잊어야 한다//(이하 생략)
-「시 쓰지 마라」
이 땅의 시인들이 이 땅의 글쟁이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시다.
출처: 2024년 4월 3일, 하영란 기자, 경남매일신문
가슴 치는 시어로 공감 이끌고 시선 잡는다 - 경남매일
\"시 쓰려거든 시 쓰지 마라.\"수많은 시집들이 앞다퉈 봄날 꽃 피듯이 피어 출판되고 있다. 곁에 두고 읽을 시집도 많겠지만 유독 한 시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신진 시인의 시집 「못 걷는 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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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시문학의 추천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등단 50년을 맞는 신진 시인이 5년 만에 신작 시집을 출간한다. 신진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인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에는 표제작 「못 걷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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