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문명과 신시문화 』 , 『 천지갑산이 굽어보는 마을 송제 』 등을 집필하신 임재해 안동대 명예 교수님께서 『룸비니 보리수나무 아래서 부처를 묻다』를 읽고 페이스북에 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함께 읽기 좋은 내용이어서 산지니 독자분들께도 공유드립니다.
<해탈의 각성과 통찰의 지혜가 담긴 이야기 시>
- 임재해 안동대 명예 교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의 소설은 시적 표현이 두드러져서 특히 주목을 끌었다. 그의 소설은 과도한 시적 묘사로 서사적 사건 전개의 흐름을 머뭇거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줄거리를 떠나서 섬세한 묘사 자체가 시적 감동과 여운을 길게 남기는 효과가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눈은 쏟아져 내렸다. 모든 것을 덮어버릴 듯, 모든 것을 지워버릴 듯.”이라고 함으로써 제주 4.3사건의 비극이 묻히어가는 상황을 눈의 이미지를 통해 현실적 문제의식으로 부각시켰다. 그러므로 소설작품에도 시적 표현이 매우 효과적 장치일 수 있다.
소설이 시적인가 하면, 시가 소설적이기도 하다. 시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까닭이다. 아예 산문시를 쓰거나 서사시를 써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가 있는가 하면, 운문시를 썼는데도 노래가 아니라 이야기가 살갑게 들리는 시도 있다. 시이지만 서정성보다 서사성이 더 짙은 시가 여기에 속한다. 서사성을 띤 시들은 이해하기 쉽고 읽는 재미도 있다. 그러나 시를 읽고 재미있다고 하면 실례되는 표현이다. 시는 재미있기보다 은유와 상징이 마음에 큰 울림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도 있고 큰 울림도 주는 시가 있다. 윤동재의 시는 일정한 배경과 사건이 있고 대화가 있어서 이야기의 재미도 있을 뿐 아니라, 시적 은유가 깊은 공감력도 자아낸다. 이번에 새로 간행한 시집 《룸비니 보리수나무 아래서 부처를 묻다》는 그런 시들로 일관하고 있어서 시집 속에 온갖 이야기들과 대화가 넘쳐난다. 따라서 정천구 박사는 윤동재 시를 ‘이야기시’라고 자리매김했다. 산문시도 아니고 서사시도 아닌데, 이야기가 있으니 ‘이야기시’라는 것이 적격이다. 더 풀어서 말하면 ‘이야기가 있는 시’이다. 자연히 그의 시를 읽으면 이야기가 들린다. 그러므로 시를 읽을 때 긴장할 필요가 전혀 없다. 동화책처럼 술술 읽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있는 시라고 했는데, 그의 시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시인이 직접 겪은 일이나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둘은 서로 만날 수 없는 사람이나 존재가 만나서 겪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는 이야기의 무대가 절집 일색이다. 따라서 소재로 말하면 사찰시이고 주제로 말하면 불교시이다.
그러나 사찰시라고 하면 한참 모자란다. 왜냐하면 어느 한 사찰이 아니라 반드시 구체적인 사찰을 직접 방문해서 현장에서 보고 듣고 깨달은 바를 작품화한 까닭이다. 따라서 제대로 말하려면 사찰기행시라고 해야 제격이다. 그러나 한갓 사찰 경관을 읊은 것이 아니라 거기서 만난 부처와 승려와 역사적 인물이 더 중요한 까닭에 인문학이 있는 사찰 기행시라 해야 제격이다.
불교시라고 하는 것도 자칫하면 헛다리짚을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시라면 으레 ‘공즉시색 색즉시공’과 같은 관념적 공담이 아닐까 하고 선입견을 가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 선입견을 바로잡으려면 불교시라고 해서는 모자란다. 불교 이야기시라고 할 수 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불교 이야기가 있는 시’라고 해야 할 것이고, 더 넓게 말하면 종교를 매개로 참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주는 통찰의 시라 해야 할 것이다.
시를 읽다가 보면 자기도 모르게 각종 불교 이야기를 듣고 여러 스님과 부처들도 만나게 된다. 불교인이 아닌 일상인도 불교에 관해 일정한 깨우침을 얻게 만든다. 불교에 입문하게 하는 시가 아니라 불교를 한 단계 더 높여 깨닫게 하는 시이다. 따라서 큰 스님도 읽을 만한 시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은 속 좁은 눈이다. 왜냐하면 불교 이야기가 부처 이야기이고 부처 이야기가 중생 이야기여서, 중생 이야기 안에는 사바세계의 이야기들이 두루 어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찰과 부처, 스님, 역사적 인물을 매개로 불교뿐만 아니라 맹목적 신앙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종교시이자, 온갖 세상의 문제적 현실을 족집게처럼 찾아내 지적하는 통찰의 시이다. 표제작인 <룸비니 보리수나무 아래서 부처를 묻다>의 일부를 보자.
부처님 탄생했다는 보리수나무 아래 가부좌하고
부처님께 물어보았지요
부처님 사람은 모두 부처라고 하셨으니
저도 부처이지요? 맞지요?
부처님 묵묵부답
참! 마야 부인이 부처님을 낳을 때처럼
보리수나무 가지를 잡고
다시 물어봐야지
부처님 사람은 모두 부처라고 하셨으니
저도 부처이지요? 맞지요?
부처님 이번에도 묵묵부답
아무리 물어봐도 부처님은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부처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뚝한 돌미륵도 그렇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도 그렇고, 성당 뜰을 지키는 성모 마리아도 그렇다. 만일 기도하는 대상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한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라 한갓 AI일 뿐이다. 거룩한 신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자기 존재를 나타내 보이는 법도 없으며 세속의 일에 참견하는 법도 없다. 다만 사람들이 신상을 만들어 섬길 따름이다. 부처상이든 예수상이든 신상은 묻는 말에 대답하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이 마치 신인 체 설법이나 강론이라는 이름으로 짐짓 말할 따름이다.
따라서 불상이나 예수상 앞에서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것에 대해 따지지도 않는다. 굳이 질문을 한다면 그 질문의 답은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 시인은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스스로 찾았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
보리수나무 잎들을
살랑살랑 흔들며 일러주었지요
사람이 되어야 부처가 되지
바보야 사람이 먼저지
자기 질문 안에 답이 있다. “사람은 모두 부처라고 하셨으니”라고, 스스로 질문의 조건을 제시한 것처럼, 사람이 아나면 부처가 될 수 없다. 이 명제를 거꾸로 말하면 “부처가 아니어서 사람이 아니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가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은 부처가 일컫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 보시기에 허울만 사람 꼴을 하고 있을 뿐 알맹이까지 사람인 진짜 사람은 없다. 모두 스스로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교만하게 살고 있는 것이 부처가 될 수 없는 요건이다. 그러므로 부처가 되려는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기 전에, 스스로 온전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야 한다.
부처는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다. 부처는 사람이 아니므로 사람들이 저마다 부처가 되려고 욕망한다. 사람이 부처가 되려고 욕심을 부리되 스스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으니,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사람이면 그는 곧 부처이다. 따라서 나는 누가 뭐래도 떳떳한 사람인가, 진정으로 사람다운 사람인가 자문하며, 진실로 사람이 되려고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바르게 하며 자비행을 마땅하게 실천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되려는 수련과 정진이야 말로 진정 부처가 되는 길이다. <경주 남산 진불(眞佛)>을 보면 부처도 부처가 아니다.
경주 남산에 가보면 코가 떨어져 나갔거나 귀가 떨어져나간 것은 물론, 아예 머리나 팔까지 떨어져나간 부처님이 많다. “처음에는 누가 떼어 갔을까?/ 이런 나쁜 놈! 부처님 머리를 떼 가다니!” 하고 노여워했는데, 자주 가서 보게 되니 부처님 스스로 “머리가 필요한 사람에게 머리/ 팔이 필요한 사람에게 팔”을 떼어주신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모두 멀쩡한 부처님은/ 가불(假拂)이 아닐까 하는 의심병이 생겼고” “한둘이 없거나 모두 없는 부처님은 진불이 아닐까 여기게 되었다.” 남산에서 진불을 여럿 만난 까닭에 세간에서 “남을 위해 쬐끔이라도 내주는 사람을 만나면/ 생불이 아닐까 하며 절로 두 손 모으게 되었다.”
앞의 시에서 진실로 사람이면 부처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부처라 해도 진불은 따로 있다고 한다. 부처라도 자기 것을 내주어야 진불이다. 그렇지 못하면 부처라도 가짜 부처이다. 사람도 남을 위해 자기 것을 내주는 사람은 살아 있는 부처이다. 부처가 되려고 엉뚱한 욕망에 집착하지 말고 자기 것을 남에게 내주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앞에서 절로 두 손을 모으게 되는 생불이 된다는 말이다.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 생불이라면, 생불은 절집에서 참선하며 설법하는 승려들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 사람들 사이에 있다. 이 시에 이르러, 인불론(人佛論)에서 진불론(眞佛論)으로 나아가다가 단숨에 생불론(生佛論)으로 비약했다. 논의의 비약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불교 용어나 까다로운 논리는 전혀 없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의 언어로 탁월한 부처론에 이른 것이자 놀랄 만한 불법을 펼친 것이다.
“신라의 원광 원효 의상 자장/ 고려의 균여 지눌 경한 나옹/ 조선의 무학 서산 사명 진묵/ 근세의 경허 만공 청담 성철을 얼른 알아보았지요” 그런데 이 고승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은지/ 금방 고개를 숙였지요” 이들이 부끄러워하는 것은 모두 수련 정진에 힘썼지만 성불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성불에 끄달리지 말고/ 부디 해탈하시라고 두 손 모았지요.” <거조암 영산전 오백 나한>의 일부이다.
역사적으로 명성을 떨친 고승들이지만 성불하지 못한 까닭에 불제자로서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출 수 없다. 성불한다는 것은 곧 부처가 되는 일인데, 성불에 집착하게 되면 부처가 될 수 없다. 성불에 끄달려 있으면 탐욕에 빠진 까닭에 성불에 이를 수 없다. 그것은 ‘욕심 없이 살고 싶다’는 것과 같다. 욕심 없이 살고 싶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욕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불에 집착할수록 성불의 길과 멀어지게 된다. 집착은 인간 고통의 근본 원인이다. 성불에서 해방되어 해탈에 이르면 마침내 불교의 최고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불에 집착하지 말고 부디 해탈하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평소 《금강경》을 늘 독송하던 도마는” “용케도 사월 초파일/ 봉암사에 들러 스님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봉암사 스님들이 모도/ 《도마복음》을 다 읽었다고 하자/ 도마는 깜짝 놀라고 있다” “도마와 봉암사 스님들은/ 초면인데도/ 서로 오래 사귄 친구처럼/ 담소가 끝없이 이어어지고 있다” 《도마복음》은 1945년에 이집트에서 발굴된 예수의 어록이다. 봉암사 스님들이 이 복음을 다 읽었으므로, 《금강경》을 독송해온 도마는 “오래 사귄 친구처럼” 서로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종교간 대화를 하려면 말만 앞세우지 말고 상대 종교의 경전을 읽어봐야 한다. 그러면 서로 뜻이 통하기 마련이다. 자유롭게 소통하며 같은 뜻을 공유하게 되면 종교간 장벽은 저절로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된다.
시인은 절에서 부처를 만나기도 하지만 역사적 인물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 인물을 만나는 것은 당연히 역사 담론을 하고 싶어서다. 어떤 역사를 말하려고 할까, 먼저 이승휴를 만나본다.
소리를 들어보니
이승휴의 목소리였네
낮에 서울에서 찾아왔다는
한국사를 전공한다는 젊은 교수를 앉혀놓고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연구비를 받아 우리 역사를 연구한다고 해놓고는
중국 사회과학원 학자들과 북경에서 동북공정을 이야기할 때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돌아온 것을 사정없이 야단치고 있었네
이승휴는 만주 일대까지도 고려의 영역이었음을 고증한
《 제왕운기 》를 내놓으며 젊은교수에게 철저히 읽으라고 했네
그리고는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중국 사회과학원 학자들을 다시 만나면
한번 따끔하게 본때를 보여주라고 했네
천은사 부처님이 이승휴의 이야기를 같이 듣고 있다가
그 책 나도 읽고 싶다며 교수보다 먼저 책을 집어 들었네
<천은사 《제왕운기》 읽고 싶다는 부처님>의 일부이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비를 받은 역사학자들이 중국 사회과학원 학자들과 동북공정에 대해서 학술발표회를 하면서, 만주 일대까지 고려 영역이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당당하게 주장하지 못한 잘못을, 《제왕운기》의 저자 이승휴가 나서서 꾸짖는 이야기다. 연구비를 받지 않아도 한국사 연구자라면, 만주 일대가 고려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고증한 《제왕운기》를 샅샅이 읽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동북아역사재단이라는 정부 출연기관의 연구비까지 받고도 안일하게 대처하는 학자들의 게으름과 무능은 질타 받아 마땅하다. 오죽하면 곁에서 듣고 있던 부처님마저 “그 책 나도 읽고 싶다”며 역사학자보다 먼저 《제왕운기》를 집어 들었을까.
동북공정에 속수무책인 역사학자들을 보면, 학자들의 존재감에 회의가 든다. 역사학자로서 책임의식보다 연구비 챙기는 일에 더 골몰한 것처럼 보인다. 역사학자로서 최소한의 의무조차 실천하지 못한 자들이 연구비 챙기는 일에는 누구보다 재바르다. 그러나 매천 황현은 지식인으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절규한다. <연곡사 매천 황현>의 일부를 보자.
담양 창평의 고광순 항일 의병장이 되어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 진을 치고 일본군과 싸울 때
매천 황현에게 부하를 보내
격문 하나 써 달라고 하니
매천 황현 무슨 마음으로 심부름을 온 부하를
빈손으로 돌려보냈을까?
(중략)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 와서
항일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를 끌어안고
이 세상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어렵구나 절규하며 대성통곡하네
의병장 고광순이 매천 황현에게 부하를 보내 항일 의병들을 위한 격문을 부탁했는데, 무슨 까닭인지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때는 무슨 심정으로 그냥 돌려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일이 자못 후회가 된 매천은 날마다 피아골 연곡사에 와서 고광순의 순절비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한다. “세상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어렵구나” 하고 절규한다. 지금 지식인들은 지식인 노릇에 관해 통감하고 있을까. 지식인으로서 특권을 누리는 데만 급급할 뿐 지식인으로서 역할과 책임감에 대해서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큰 일깨움을 주는 시인의 죽비이다.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마곡사 대웅보전 싸리나무 기둥을
몇 번 돌았느냐고 물어보고
돈 바퀴 수에 따라
극락으로 보내준다는데
백범 김구 선생은 몇 번 도셨느냐고 하니까
빙긋이 웃으시기만 했습니다
몇 번을 거듭 여쭈어보자
난 관심이 없소
나 오직 대한독립에만 관심이 있소 하고는
더 이상 상대해 주지 않고
대빗자루를 집어 들더니
대웅보전 앞마당을 쓰윽쓰윽 쓸었습니다.
<마곡사 백범 김구>의 일부이다. 절을 찾는 사람들의 관심은 죽어서 극락 가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들의 소망이 극락이기 때문에 극락 가는 법이라면 너도나도 다투어 실천을 한다. 108배를 올리고 탑을 도는 것은 물론, 괘불 속의 부처와 눈을 맞추며 불상 뒤를 돌아 나오기도 한다. 마곡사 전설에 따르면 대웅보전 싸리나무 기둥을 많이 돌아야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신이 있다.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기둥을 몇 번이나 돌았는가 묻는데, 많이 돌았으면 극락으로 보내주고 적게 돌았으면 지옥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이 속신을 믿는 이들이 워낙 많이 돌고 돌아서 대웅보전 기둥은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하다. 그러므로 절에 가서 불심을 닦는 것이 아니라, 허황된 기둥 돌이나 탑돌이로 극락 가는 놀이에만 빠져 있는 셈이다.
그런데 백범 김구는 다르다. 기둥을 몇 번 돌았느냐고 물어도 빙긋이 웃기만 한다. 거듭 묻자 귀찮다는 듯이 “난 관심이 없소.” “오직 대한민국 독립에만 관심이 있소” 하고는 대빗자루를 들고 대웅보전 앞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절 마당 쓰는 일이 오히려 보살행이자 독립운동의 길이다. 기둥돌이는 기둥에 손때만 묻힐 뿐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하는 헛된 믿음이자, 이기적 집착일 뿐이다. 차라리 백범처럼 마당이라도 쓰는 일은 작은 실천이지만 큰 보시에 해당된다. 관심의 방향이 이타적 대의여야 할 뿐 아니라 작은 실천이라도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성과를 내는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백범의 뜻을 빌어서 말하는 시인의 진실된 믿음이다.
생전에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마침내 죽이기까지 했다. 왜 그랬을까?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이다. 왕이라는 권력을 차지하려면 조카라도 죽여 없애야 한다. 그러나 세조는 조카 단종의 손을 잡고 수타사 성보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은 《월인석보》 초간 목판본을 보러 왔다. 살해자와 피살자가 서로 손잡을 수 있을까. <수타사 삼촌과 조카>를 보자.
초로의 사내가 “초등학교 3학년쯤 되는 어린아이 손을 잡고 수타사 성보박물관을 관람”하러 왔다. “사내가 《월인천강지곡》은 자기 아버지가 지었고 《석보상절》은 자기가 지었는데/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쳐서/ 자기가 펴냈다고 하자/ 어린아이는 삼촌이 펴냈다면”이라고 말한다. 둘은 삼촌과 조카 사이인데, 작품으로 봐서 세조와 단종이다.
그들 두 사람
삼촌 세조와 조카 단종이었다는 걸 알았지요
둘 다 죽은 뒤
권력을 손에서 완전히 놓게 되자
비로소 삼촌과 조카로
서로 손잡고 일 년에 한두 번은 함께
수타사를 찾는다는 게 놀랍고 놀라웠지요
손에 권력을 쥐고 있는 한 두 사람은 삼촌과 조카라도 서로 손잡을 수 없다. 손아귀에는 권력이 꽉 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어서 권력을 손에서 놓게 되자, 비로소 삼촌과 조카로 만나 서로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권력뿐만 아니다. 재산을 손에 쥐고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재산을 탐하게 되면 형제간은 물론 부모 자식 사이에도 손잡기 어렵다.
어떤 은퇴 교수에게 50대 제자가 찾아왔다. 아내가 죽고 3년째 혼자 산다고 했다, “그 나이에 재혼을 해야지 그러냐?”고 하자, 자식들이 말려서 재혼을 못한다고 했다. “자네 재산이 제법 많구만!”이라고 하자, 그렇다고 동의했다. 아이들이 아버지 재혼을 극력 말리는 것은 재산 욕심 때문이다. 재산이 많고 자녀가 여럿이면 상속 분쟁이 곧잘 일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권력욕처럼 재물욕에 사로잡혀도 피붙이끼리 서로 손잡기는커녕 다툼에 빠지기 일쑤이다.
시인은 역사 이야기와 아울러 혁명 이야기도 한다. 밑으로부터 치받치는 힘으로 세상을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의식 때문이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임꺽정을, 외국에서는 닥터 노먼 베쑨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였다. 아래는 <칠장사 임꺽정>의 일부이다.
궁예와 임꺽정이 막걸리를 거푸거푸 마시며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한나절 내내 격론을 벌이고 있었네
궁예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
우리 미륵님 오실 때까지
힘을 기르고 활쏘기 연습을 하며
우리 미륵님을 기다리자 했네
임꺽정은 언제든 힘은 모으면 되는 거고
활쏘기 연습도 이만하면 되었으니
우리가 모두 스스로 미륵이 되어
다 같이 떨쳐 일어나 세상을 바꾸자 했네
(중략)
임꺽정이 원통전을 나오다가 엉덩이를 들썩이는 향나무를 보고
힘을 얻어 바로 떨쳐 일어나니
백정 노비 농투성이 모두 따라 일어났네
나라님도 조정도 관군도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랐네
궁예와 임꺽정이 칠장사에서 세상을 바꾸는 방법을 두고 하루 종일 격론을 벌였다. 궁예는 미륵님이 오실 때까지 힘을 기르며 때를 기다리자는 반면에, 임꺽정은 힘은 모으면 되는 거니까 당장 함께 떨쳐 일어나 세상을 바꾸자고 했다. 어느 일에서든 때를 기다리자는 신중파가 있는가 하면, 지금 나서야 한다는 행동파가 있다. 신중파는 기다리다가 때를 놓치기 일쑤이고, 행동파는 성급하게 나섰다가 실패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양극단이고 진실은 그 중간에 있다.
임꺽정은 때를 기다리지 않고 용기를 내어 떨쳐 일어나는 행동파였다. 그러자 백정과 노비는 물론 농투성이들도 모두 따라서 일어났다. 그러자 왕과 관군도 겁을 먹고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한다. 여럿이 함께 일어서면 조정도 관군도 기가 죽기 마련이다. 임꺽정은 승승장구했으나 결국 세상을 바꾸는 혁명의 보람을 누리지는 못한 채 관군에게 잡혀 죽었다. 신중파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실기하고 마는데, 임꺽정과 같은 행동파는 실패했지만 일정한 성취가 있다. 따라서 때를 기다리지 말고 총궐기하는 것이 오히려 승산이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임꺽정의 실패를 알면서도 그의 행동하는 용기에 지지를 보낸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했는데, 혁명에는 때를 기다리는 신중성보다 떨쳐 일어나는 용기가 더욱 긴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의사 노먼 베쑨이
빨치산 야전병원 터를 둘러보고 있다
벽송사 목장승 호법 대신과 금호 장군이
의사 노먼 베쑨을 밀착 경호하고 있다
벽송사 선반의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할 수 있다는데
의사 노먼 베쑨은 선방의 문고리에는 애시당초 관심이 없다
빨치산 야전병원에 대해서만
벽송사 공양주로 일하고 있는
빨치산 출신 늙은 보살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다
<벽송사 의사 노먼 베쑨>의 일부이다. 노먼 베쑨은 사회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로, 스페인 내전과 중국혁명에 투신한 캐나다 출신 의사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의료 지원단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 수많은 병사들을 살려낸 진정한 의사이자 의료 혁명가이다. 그가 벽송사를 찾은 것은 “선방의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할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이 아니다. 오직 벽송사에 설치되었던 “빨치산 야전병원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고, “빨치산 출신 늙은 보살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다”.
노먼 베쑨은 의사이자 사회주의 혁명가이다. 캐나다 의사가 국경을 넘어 스페인 내전과 중국 혁명전에 목숨 걸고 현장 구호와 수혈대 활동을 했다. 당연히 빨치산 야전병원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의 질문에 “빨치산 출신 벽송사 공양주 늙은 보살/ 숨겼던 옛 신분이 드러나는 것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의사 노먼 베쑨에게 무엇이든 깡그리 이야기해 주고 있다”고 했다. 빨치산 출신 늙은 보살도 노먼 베쑨과 한 마음 한 뜻이다. 따라서 빨치산 출신이라는 신분노출조차 경계하지 않고 모든 사실을 알려주었다. 노먼 베쑨처럼, 늙은 보살도 사회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역사와 혁명을 말하는 한편, 여전히 신앙의 진정성에 관해 말하는 데 시인은 매우 골똘하다. <도리사 아도화상의 삼천 배> 일부를 보자.
한밤중 극락전에서 촛불도 켜지 않은 채
아도화상이 부처님께 삼천 배를 올리고 있지요
(중략)
도리사 스님들이 대입 수능 시험
불제자의 자녀들만 특별나게 잘 보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기도를 올린 것은 불제자로서 잘못한 일이라며
낮에 수능 기도를 올린 바로 그 자리 극락전에서
아도화상이 부처님께 삼천 배를 올리고 있지요
아도화상은 불교를 처음 들여와 전파한 승려이자 한국 최초의 사찰 도리사를 창건한 분이다. 따라서 한국 불교의 비조라 할 수 있다. 그런 분이 요즘 불교인들의 행태를 보면, 한갓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사실을 포착하기 마련이다. 자비행은커녕 생존경쟁에서 이기는 편리한 수단으로 불교를 이용하기 일쑤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녀들의 대입 수능 시험 기도이다.
도리사 부처님이 입시에 영험하다고 소문이 났는지, 너도나도 대입 수능시험 잘 보게 해달라고 시주를 하며 청탁을 한다. 시주 받은 스님들이 청탁한 대로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자, 도리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한밤중에 부처님께 삼천 배를 올리며 사죄한다. 최초 불교 전파자로서 지금의 불교가 엉뚱한 길로 빗나간 데 대해 깊이 속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찰이나 교회, 성당에 찾아가서 자기 자녀들이 수능시험 잘 보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은 모두 부처님과 예수님께 부정청탁을 하는 일이다. 부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는커녕 그 신통력을 빌어 자기만 부당이익을 취하려는 행위이다. 제대로 신앙심을 갖추었다면 수능시험이 뭔지도 모르는 분께 공연히 보챌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아이들 수능 성적을 빌어줄 일이다. 그런데 자녀 수능시험이나 대학 입시 기도로 정작 다른 수험생들에게 피해를 주는 기도를 하고 있다. 반불교적 신앙이 횡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 땅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아도화상의 이름으로 불교계의 잘못된 기복신앙을 신랄하게 꼬집는 것이다.
용문사에 법문 잘 한다는 스님이 있어서 신자들의 관광버스가 끊이지 않았다. 오늘도 버스 두 대에 보살들이 우르르 내려서 스님 법문을 들으려 법당으로 향하는데, 정작 스님은 법당에서 나와 아랫마을로 내려가며 입속말을 한다. <용문사 안도쇼로 스님>의 일부이다.
“이 절 저 절 떼 지어
많이 찾아다닌다고
부처되는 거 아니여
누구나 자심(慈心)을 잘 쓰면
곳곳이 극락이지만
누구나 자심을 잘못 쓰면
걸음걸음이 지옥이여” 했네
법당으로 향하던 보살들이 듣고 보니 옳은 말이라 다시 찾으니 보이질 않았다. 마침 콩밭 매던 할머니께 스님 행방을 물어보니, 그 스님 속명이 권상로라는 것만 알지 행방은 모른다고 했다. 안도쇼로(安東相老)는 권상로가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한 이름이다. 권상로는 소문난 학승이어서 법문은 잘 했다. 그러나 일제에 영합하여 “성불은 그 전쟁에 나가 이기는 거”라고 하며, 젊은 스님들을 일본군 전쟁에 자원하도록 선동한 잘못을 저질렀다.
따라서 “요즘은 누구나 찾아오면 스스로 몸을 숨겨”버린다고 했다. 스스로 저지른 잘못을 아는 터라, 보살들 앞에서 얼굴을 들고 법문을 할 철면피는 아닌 까닭이다. 학승이어서 법문은 잘 했지만 스스로 자심을 잘못 써서 걸음마다 지옥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찾아온 보살들에게 법문 아닌 법문을 한다. 이 절 저 절 떼 지어 다닌다고 부처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극락과 멀어진다며, 진정한 자비행을 일깨워 준다. 자비행이야말로 곳곳이 극락이라는 것이다.
우리 신앙의 문제점은 기복신앙과 더불어, 종교인들이 자기 영달에 치우쳐서 세상에 영합하는 일이다. 더 일반적인 문제이자 오래된 문제는 조형된 신상을 신의 실체인 것처럼 섬기는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동서고금의 여러 종교가 서로 다르지 않다. <단하 선사와 사도 바울>의 일부를 보자.
하나님은 사람이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새길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연설하는 것을 듣고
단하 선사 자기 귀를 의심했네
(중략)
어쩌면 평소 내가 하던 말과 똑같으냐고
절집 안에 나무로 불상을 만들어놓고
그 앞에다가 시줏돈을 올리고 공양미를 올리고
엎드려 절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고 했네
단하 선사는 절집에 들를 때마다
절집 안에 나무로 만든 불상이 있으면 도끼로 패
얼른 아궁이로 가지고 가서
방을 뜨뜻하게 하는 데나 쓴다며
부처님은 사람이 나무에다 새길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부처님은 사람이 금이나 돌덩이에다 새길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했네
사도 바울은 기독교도를 박해하러 가다가 예수의 음성을 듣고 신앙에 빠져서 전 생애를 기독교 전도에 힘쓴 예언자이다. 단하선사는 헛된 신앙에 빠진 속승들을 계도하기 위해 겨울에 목불상을 아궁이에 때어 방을 따뜻하게 한 스님으로 유명하다. 그는 목불을 태워 방을 데움으로써 외물에 사로잡힌 형식적인 신앙의 맹목성을 배격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이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새길 수 있는 분이 아니다”는 사도 바울의 연설을 듣고 감복한다. ‘나무로 만든 불상 앞에다가 시줏돈을 올리고 엎드려 절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고’ 평소에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우상을 섬기는 일이 아닌가.
굳이 말하자면 그러한 형상은 한갓 방편이다. 방편을 진리로 착각하고 우상으로 섬기는 신앙은 기독교나 불교나 다르지 않다. 금붙이 십자가나 불상일수록 세속의 욕망을 드러내는 우상물이다. 대형 금불상을 다투어 거대하게 세우는 일도 신앙의 우상화를 조장하는 일일 뿐이다. 진정한 신앙은 이웃을 사랑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자비행에 있다. 스님에게 의존하거나 목사를 따를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을 닦아 해탈하고, 가난한 이들과 동행한 예수의 삶을 본받아 사는 것이 참 신앙이다. 껍데기 신앙은 단하선사처럼 기꺼이 불태워버려야 한다.
이 시집을 통해서 윤동재 시인은 사찰을 매개로 지식인의 올바른 삶과 신앙인의 진정한 믿음의 길에 대해 일관되게 이야기한다. 따라서 이 시집은 그동안 쓴 이런 저런 시들을 모은 시집과 수준이 다르다. 진정한 불심에 이르도록 일깨우는 신앙 시들로 가득한 수미일관된 시집이다. 《룸비니 보리수나무 아래서 부처를 묻다》고 한 표제어처럼 내가 부처인가, 우리가 부처인가, 스님은 부처인가, 설법 잘 하는 학승은 부처인가, 끊임없이 묻고 답한다. 부처는 따로 없다. 이 절 저 절 찾아다니는 사람도 부처가 아니고, 시주 많이 하는 사람도 부처가 아니며, 성불에 집착하는 사람도 부처가 아니다. 오직 사람다운 사람이 부처이다.
시인은 이 가르침을 얻고 나누기 위해 수많은 절을 일일이 답사하며, 여러 부처와 선사, 스님, 역사적 인물들을 두루 만나왔다. 따라서 이 시집에 수록된 시는 발품 팔고 땀내 나는 현장답사 시이자, 문제적 인물들을 두루 끌어와 그 목소리를 듣게 한 인물 시이기도 하다.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앉아서 “사람이 부처”라는 각성에 이르고, 부처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자는 마음가짐을 다지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윤시인은 알기 쉬운 이야기 형식으로 가장 단순한 논리와 깊은 통찰력을 발휘하여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깊은 불심을 심어주는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3월 25일 화재 현장에서 컴퓨터 본체를 가져올 수 있어서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임재해 교수 페이스북 202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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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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