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어땠냐고 누군가 물어오면, 대답을 망설이게 되는 요즘입니다. 오늘 먹은 점심 메뉴도 가물가물하고, 직장 동료와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포털사이트 뉴스탭에 걸린 뉴스 제목이 떠오를 때도 있지만, 그것 역시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일 뿐. 이렇듯 우리는 스쳐 사라지는 일들로 가득한, 경험이 사라지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최근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를 출간한 신진 시인은 이러한 현실을 풍자하고 일상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공존과 평등을 지향하는 글쓰기를 해왔습니다. 치열한 현실과 맞서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해왔는데요.
<경남매일> 이 창간 26주년을 맞아 "혼란한 시대,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를 주제로 신진 작가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타인과 상생하는 삶, 현대인에게 필요한 덕목과 추구해야 할 정신, 지역 신문의 미래 등에 대한 신진 시인의 답변, 함께 읽으러 가 보시죠!
석학에게 듣다
신진 교수 (전 동아대 인문대 학장)
"혼란한 시대,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에 답하다
타인과 상생하는 삶이 인간의 본성
자기 위주 허세 공동체 연대 파괴
진정성·솔직함 바탕 상호관계 필요
글 읽기 통해 존재·현상 이해 가능
지역신문, 공동체 강화 역할 힘써야
"인간의 본성적 삶이란 남에게 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남과 같이 보고 남을 나와 같이 여기며 상생에 맞춰야죠."
시대가 혼란할수록 참다운 어른과 진정한 지식인과 학자, 스승을 찾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가까운 곳에서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다. 주변에서 그런 분을 찾았다. 강직하고 허튼소리를 싫어하고, 관념의 삶이 아닌 땅에 뿌리를 둔 삶을 살아가는 시인이다. 몇 년 전 글공부를 배운 인연으로 신진 작가를, 가까이서 선비 같은 올곧은 면을 지켜봤다. 신진 작가는 동아대 인문대 학장을 지냈고, 동남어문학회장, 한국문예창작학회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경남매일이 26주년을 맞아 '혼란한 시대를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석학에게 듣는다'를 기획했다. 그 일환으로 신진 작가와 서면으로 그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았다.
경남매일 26주년 축하 부탁드립니다.
가속화되는 수도권 중심화, 시각적 영상 매체의 활황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 경남매일은 자영업자, 근로자, 선량한 도민의 권익 보호를 위해 묵묵히 노력해 왔고 지방자치와 정치·행정의 바른길을 제시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창간 26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혼란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 혼란한 시대는 어떻게 도래했고 해결책은 있을까요?
인간은 누구나 안락과 안정을 바랍니다. 현대 문명의 발달과 삶의 괴팍함은 안락과 안정을 개인화·편당화하는 이기심에서 기인합니다. 한도 없이 최고의 안락을 향하는 탐욕을 누르지 못하고, 법과 논리를 개발하고 이용하며 계몽과 산업화에 편승하다 보니 결국 본성적 삶에서 이탈하고, 소외와 단절, 절망과 불안을 초래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적 삶이란 남에게 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남과 같이 보고 남을 나와 같이 여기며 상생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문화사적으로, 탐욕에 물든 현실에 맞서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노장사상과 선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仁)과 측은지심, 기독교의 영성주의와 박애, 근대적 생명사상과 세계 내 존재로서의 지향성 등으로 제기돼 왔습니다.
혼란한 시대에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일까요?
요즘 자아실현 한다고 제멋에 살기를 당연시하고 자녀들에게 권하기까지 하는 것이 일종의 추세에 가깝지 않습니까. 존재와 존재 간의 '대화적 관계'에 철학적 사유를 집중했던 오스트리아의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인간의 자아 정체성이란 '나'라고 하는 아집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고, 나와 너 사이 즉, 개체와 개체 간 상호관계를 통해 형성된다고 합니다. '나'라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며, 나 이전에 '나와 너'의 관계가 실재한다. 즉 자아는 고립될 수 없고 항상 타자와 같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삶, 주택가격과 차량 가격과 명예에 의해 계량되는 삶은 본래적 인간성 밖의 비인간적 삶입니다. 사랑도 내게 필요하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진실하고 자유(自由) 로운 사랑, 그것은 자의(自意)의 속박에서 벗어난 '나-너' 간 소통행위 중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는 공자의 '남과 하나 되는 마음' 인(仁), 온갖 윤리 도덕의 근본이자 중심으로서의 인(仁)의 구현과 다르지 않습니다. 논리적 추상성을 덜어내고 삶의 현장성을 담보하고자 공동주체의 삶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공동주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지난한 일이지만 그것을 향한 도전마저 포기한다면 우리는 물론, 인류의 앞날 자체가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거친 말, 일방적인 주장 등으로 일어나는 갈등은 어떻게 풀어가는 것이 좋을까요?
우선 '나'라는 망상과 아집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손쉽지만 속 내보이기 쉬운 '나의 주관' 내세우기, 독선적인 주장과 변명을 포기해야 합니다. 진정성과 '솔직함'을 잃지 않는 상태에서 상호 소통해야 합니다. 진실과 솔직함은 사랑과 정의와 미학의 기반이고, 목표이기도 합니다. 자기 위주의 변명과 허세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적 연대를 파괴하고 공유해야 할 진실도 가치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나'라는 아집을 기술적으로 장식해 타자에게 강매하려드는 행위야말로 이 시대의 근본 병인(病因)이 아닌가 합니다.
추구해야 할 선은 무엇입니까?
대자연 속의 만물은 진화하고 있거나 퇴화하고 있습니다. 현상하는 것이 지금 상태로 계속머물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진화는 절대 자유와 절대 평등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시공, 인간 본성적 삶을 향할 때 계속될 것입니다. 공동주체로서의 양심의 실천입니다. 이는 인류가 만물의 영장으로 존립한 동력이며 사회 생태의 기본 구조일 뿐 아니라 비인간적 불공평과 부조리를 해소하고, 전쟁, 핵물질, 인공지능 등 문명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니, 문명적 도구들, 이른바 휴머노이드들과도 공존할 수 있는 삶을 위해서 구현하고 실천해야 할 실존의 조건입니다. 사회 체제와 법을 넘고 일신의 안위를 넘어 인간 본성의 실천이 요청되는 때입니다.
우리는 타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본성적이고 진실한 삶 속에는 '나'라는 자기가 없습니다. 타자를 대할 때는 내가 그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나와 상황이 연동하는 공동주체의, 개방적인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으로의 책임 윤리고 궁극의 가치입니다. 저마다의 모양과 향기를 지닌 꽃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꽃동네처럼, 너와 내가 함께 존재하는 공동주체로서 삶을 보다 윤택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인간 사회가 식물로 이루어진 화원이나 동물세계와 다른 점은 모든 인간에겐 인간으로서의 의식과 표현, 상생의 에너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굴복시키고 제한하지 말고, 타자와의 공동주체를 이루어 그 일원이 돼야 상생의 저력을 발휘합니다.
허영, 허상, 망상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논리 부족의 문제이기도 하고, 인식과 과욕으로 인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허영, 허상, 망상 등 환상을 좇는 행위는 자본주의적 경쟁의식과 배금사상에 의한 상처이고, 그것을 좇는 행위는 인간에게 믿을 수 있는 절대 가치란 없다는 허무적이고 염세적 사상과, 인간 심리의 심층에는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무의식이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에 의하면, 허구적 자아는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로 한없이 미끄러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환상이 정상적 상태에서가 아니라, 일군의 지식을 모방한 속임수이며, 또는 자신의 성찰력과 진정성 부족의 결함을 감추기 위한 허영의 결과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들은 허상, 망상, 환상을 기정사실로 해서 자신들의 허위를 감추고 기득권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을 감추고 있기 쉽습니다. 환상과 허영은 일종의 정신질환이고 가짜 개성이요, 자기 은닉 기술에 불과합니다.
지역 언론(신문)의 방향성은 어떠해야 하나요?
수도권 과밀화와 인구 감소로 지역소멸의 위기로 신문의 입지가 더욱 좁아졌습니다. 특히 지역신문은 국가사회와 지역적 생활 사이의 길항에 놓여 있습니다. 지역의 인습을 소거하는 한편, 지역의 가치를 계발·창안하며 국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상생할 수 있는 가치 창달에 앞장서야 할 책무 또한 무겁습니다.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여기에 지역신문 나름의 미래적 가치 또한 있습니다. 저출생, 고령화, 의료격차, 청년 일자리 감소 등 지역의 난제를 해소하고 나름의 공동주체로서 국가 공동체와 상생하는 길이 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상상력만으로 말하자면, 기존의 타성에서 벗어나, 당장의 사업성, 경쟁력 같은 기준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장기적인 가치성, 공동체적 연대성을 살려가면서 지역민과 함께하는 공동의 장을 열어 가면 어떨까 합니다. 시민, 농어민 명예기자제도를 활성화하는 것도 구체적인 방안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 지역의 세세한 삶과 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지역적 삶의 전통을 발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단 명예기자의 선정과 운영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순수성이 담보돼야 할 것입니다. 순수성이란 행위 밖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데서 담보되는 행위의 만족감입니다. 이런 시도들을 통해 중앙 집권 세력과 어울리면서 지역 지배력을 행사하는 부당한 토착세력의 횡포와 권력독점을 차단하고 부단하게 지역성은 재구성하면서 다층적으로 역동하는 지역 생태계를 재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덕목과 추구해야 할 정신은 어떤 것일까요?
21세기는 인공지능 시대지만 역으로, 현대인은 원시주의(primitivism)적 삶의 전통을 시시때때로 체화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원시주의는 서양의 진보사상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나타나 인공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이, 인위적인 것보다 자발적인 것이, 문명이나 이성보다 미개한 원시생활이나 본능적 활동이 더 바람직하다고 하는 신념입니다. D. H. 로렌스처럼 본능적이고 과격한 이념과 실천을 앞세울 수도 있지만, 현대문명의 갈등과 불안과 공포로부터 탈출해 원초적이고 단순 소박한 삶으로 실천하고자 한, 20세기 후반 미국의 히피(hippie)의 핵심가치관이기도 합니다. 원시적 삶이란 벌거벗은 짐승의 삶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유와 사랑이 연동하는 아름답고 정의로운 삶의 전통을 발굴하고 조명하는 시간을 갖자는 것입니다. 원시의 삶을 비판적으로 계승해 여유와 연대의 신명, 공동의 축제와 재충전의 일상을 성찰하고 실천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생명의 복원과 본성적 삶으로 가는 길이고 만물과 함께하는 연대의 품에서 행복한 일원이 되는 길입니다.
니체는 글은 피로서 쓰라고 합니다. 글쓰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나요?
글을 쓰기보다 먼저 읽기부터 하자, 글을 쓰기 전에 자연을, 인간을, 또 나를 읽으며 남을 읽고, 남의 글을 읽어야 합니다. 세상에 글이 많습니다. 상품이나, 자연, 인물 등에 대한 글이 넘치고, 창의와 발견의 언어가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읽기부터 해야 온갖 존재와 현상의 숨은 냄새, 낌새를 알 수 있습니다. 읽기도 전에 써대기만 하면 그것은 글이 아니라 편협한 망상, 펄프 과소비 행위를 범하기 쉽습니다.
또 한 가지는 글을, 시를 쓰는 시간만은 숱한 선입견들과 현실적 명리에서 해방돼야 합니다. 글 한 편 쓰지 않더라도 공동체와 연동된 주체로서의 아름다운 삶을 산다면 그는 글을 쓰지 않고 읽지 않아도, 인간성의 발견과 미학을 체험하고 실천하는 인간, 글의 여유와 안심과 엑스터시를 품고 사는 행복한 글쟁이가 아닐까 합니다.
신진 교수 프로필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시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외, 논저 「한국시의 이론」 외, 동화집 「반려인간」 외, 귀촌 에세이 「촌놈 되기」 등 발간. 봉생문화상, 부산시문화상, 문덕수문학상 외 수상. 동아대 인문대 학장, 동남어문학회장, 한국문예창작학회 자문위원 등 역임.
출처: 2025년 4월 9일, 하영란 기자, 경남매일
[창간 기획] "'나' 아집 벗고 소통 통해 공동주체성 회복해야 해요" - 경남매일
\"인간의 본성적 삶이란 남에게 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남과 같이 보고 남을 나와 같이 여기며 상생에 맞춰야죠.\"시대가 혼란할수록 참다운 어른과 진정한 지식인과 학자, 스승을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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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 ● 존재와 생명을 노래하는 시인, 신진의 열한 번째 시집 출간 ●스쳐 지나가는 것들로 점철된 세상을 통탄하며 공생공락하는 공동체를 염원하다 1974년 시문학의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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