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발 없는 새를 위하여



왕가위, 그의 영화를 봤던 사람이라면, 일명 왕가위 영화라 불리는 그의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뉜다. 지루한 스타일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를을 듣자마자 거부 반응을 보일 것이며, 애잔한 스토리와 아름다운 화면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와는 정반대일 것이다. 이렇게 세상은 왕가위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과 왕가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양분된다. 그리고 나의 경우는 후자라고 할 수 있다. 





어렸을 때는 참 사소한 것들 가지고도 상처를 받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타인은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항상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는 이들에게도 같은 취향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소통할 수 없는 현실에 답답해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 후 좀더 자라서야 겨우 취향이라는 문제에 구차해지지 않고 무덤덤해질 수 있게 되었다.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 슬픈 일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직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일은 여전히 반가운 일일 수밖에 없다. 내가 읽었던 책을 그도 감명 깊게 읽었다는 사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그도 즐겨 듣는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그도 몇 번이고 다시 볼 정도로 빠져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과 나의 거리는 가까워질 수 있으며 이야기 소재 또한 충분해진다.

사람의 취향은 다양하기에 수많은 취향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특별히 영화에 관해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사람들의 영화에 대한 취향만큼은 각양각색이고, 따라서 똑떨어지게 일치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끝까지 본 영화라면, 그 영화에 대한 판단기준을 전적으로 자신의 기준에 맡기기 때문이다.

지금껏 많은 사람을 알게 되었지만, 신기하게도 취향이 일치하는 친구를 잊을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 친구를 알게 된 것은 어쩌면 내 인생의 커다란 행운이 아니었을까. 실연으로 몸속의 수분이 다 빠져나가 더 이상 울 수 없게 달리던 <중경삼림>의 금성무의 대사를 좋아한다던 그 아이와, 비디오 대여점에는 없어서 보지 못했다는 <아비정전>을 구해서 함께 봤다. 영화 속 슬픈 눈망울을 굴리던 아비역의 장국영이 자살한 것은 내가 왕가위의 영화를 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고, 좀 더 지나 <2046>이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지만 구하기 힘들었던, 혹여나 극장에 개봉해도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보기 힘들었던,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지루함에 약간 고개를 흔들지만, 결국 보고 나면 그 대사 그 장면 하나하나가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던, 왕가위 그의 영화들.




엇갈리는 청춘들의 외로움에 대한 보고서

왕가위 영화의 청춘들은 서로 한가지의 고독을 안고 있는 불안한 삶과 사랑을 보여주고 있기에, 할리우드 영화처럼 흥미진진하지 않고 일면 지루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런 이유에서 왕가위 감독의 광적인 팬들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청춘들처럼 과장된 젊음이 아닌, 진실한 젊음의 외로움을 영화 속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접했던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화양연화>이다. 불륜이라는 소재를 담은, 지극히 통속적일 수밖에 없는 사랑 이야기를 느린 음악과 약간은 우울하면서도 자극적인 화면 속에 그려내고 있었다. 좋아하면서 좋아한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이 스쳐 지나가는 떨림으로, 참은 눈물로 표현하고 있는 사랑을 말이다.

<아비정전>은 또 어떠한가. 아비정전에 나오는 모든 사랑은 엇갈린다. 수리진(장만옥)과 루루(유가령)는 아비(장국영)를 잊지 못하지만, 아비는 자신이 말했던 발 없는 새 이야기처럼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빗속에서 순찰을 돌던 경찰(유덕화)은 수리진을 좋아하지만, 수리진은 경찰이 떠나고 나서야 그를 다시 찾는다. 아비의 친구로 나오는 장학우 또한 루루를 흠모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은 매한가지다.


"발 없는 새가 있지. 날아가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번 땅에 내려앉을 때가 있는데 그건 죽을 때라지." "죽기 직전 뭐가 보이는지 궁금했어. 난 눈 뜨고 죽을 거야. 죽을 땐 뭐가 보고 싶을까? 발 없는 새가 태어날 때부터 바람 속을 날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 새는 이미 처음부터 죽어 있었어. 난 사랑이 뭔지 몰랐지만 이젠 알 것 같아. 이미 때는 늦었지만…"(아비정전 중 장국영의 독백)


사람들은 쉽게 남의 외로움에 대해 말하면서도 자신의 외로움을 마주하는 데는 항상 서툴다. 화를 내보기도 하고, 우울한 편지를 써보면서 외로움을 달래보지만, 이 외로움이란 쉬이 가시지 않는 법이다. 아비정전에서의 아비는 자신의 방에서 외로움을 달래고자 혼자 탱고를 춘다. 쓸쓸하지만 긍정적인 느낌의 춤은 이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기억과 과거의 슬픔 속에서

“1994년 5월 1일에 한 여자가 생일 축하해, 라고 말해줬다. 그 한마디로 난 그녀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었다면 유통기한이 영영 끝나질 않길. 만일 내가 기한을 적는다면 나는 만년 후로 하겠다.”(<중경삼림> 중 금성무의 독백)

“사랑은 타이밍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인연은 엇갈릴 수 있다.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스쳤다면 우리의 인연도 달라졌을까?"(<2046> 중 양조위의 독백)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하나같이 기억에 관해 묻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대체로 과거의 기억을 되짚는 경우가 많다. <아비정전>의 아비는 어머니의 기억에 고통스러워하고, <중경삼림>의 금성무는 과거의 연인과의 기억에 아파한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스토리 또한 아픈 이별을 경험한 노라 존스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2046>은 왕가위의 전작과 다르게 미래를 다루고 있는 영화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미래 또한 왕가위 감독이 만든 이전 영화의 미래이기에, 기억이 계속해서 변주된다 할 수 있다.





왕가위와 사람들

양조위 왕가위의 페르소나라는 명칭이 무색하지 않게, 왕가위 작 6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양조위는 커다란 눈망울에 슬픔을 담고 있는 명배우이다.


크리스토퍼 도일 유독 왕 감독과만 가장 많은 촬영을 한 촬영감독으로서, 독특한 화면 구성으로 유명한 왕가위 감독의 영화 스타일을 만드는 데 일조한 사람이다.


왕정문(왕비) 양조위가 왕가위의 남자 페르소나라면 왕정문은 여자 페르소나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중경삼림> 속 그녀의 인상은 강렬하다. <중경삼림>의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던 그녀는 영화를 찍고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어, 훗날 배우보다 가수로서 더 유명해진다.


장국영 <아비정전>과 <춘광사설(해피 투게더)>속의 그는 고독과 불안을 이야기하는 왕가위 감독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였다. 2003년 4월 1일 만우절, 마치 거짓말처럼 유명을 달리했다.


유가령 <아비정전> 속의 아비를 그리워하던 유가령은 기존의 여배우와 다른 묘한 매력이 있는 배우로서 양조위의 오랜 연인이기도 하다. <2046>에 잠시 등장하면서 <아비정전>의 내용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장만옥 <열혈남아>, <화양연화> 등 고양이를 닮은 외모를 가진 그녀는 주로 차분한 캐릭터를 맡아 내면의 연기를 펼친다. 프랑스 감독 올리비아 아사야시와 결혼한 그녀는 남편이 감독한 <클린>에서 진면목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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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며 썼던 글(2008년도)을 다시 싣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

Posted by 비회원